애국가를 부르자

2005.04.18 08:18

김학 조회 수:71 추천:9

애국가를 부르자
                                               김  학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무궁화 삼 천리 화려 강산/ 대한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

우리는 한 평생 살아가면서 수많은 노래를 부르고 듣는다. 동요, 대중가요, 가곡, 팝송, 국악, 칸소네, 샹송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애국가처럼 오랜 세월 계속하여 부르고 듣게 되는 노래도 드물 것이다.
초등학교 때 배웠던 나라 사랑의 노래 ‘애국가’. 이승을 떠나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부르고 들어야 할 나라 사랑의 노래 ‘애국가’. 아시안 게임이나 올림픽 경기장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대한건아(大韓健兒)들이 시상대에 오르는 순간, 울려 퍼지던 애국가는 한국인의 가슴에 진한 감동을 남긴다. 더구나 만리 타국에서 듣게되는 애국가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의 심지에 불을 밝혀준다. 애국가는 겨레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튼튼한 끈이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은 날마다 애국가를 들려준다. 방송이 시작할 때와 끝날 때마다 우리는 애국가를 만난다. 그것은 어느 방송이건 마찬가지다. 우리는 애국가를 많이도 불렀고, 그보다 더 많이 들어왔다. 제 아무리 수명이 긴 유행가라 해도 그 어찌 감히 애국가와 어깨를 견줄 수 있으랴. 우리는 앞으로도 애국가를 많이 부르고 또 듣게 될 것이다. 국력이 신장되면 그 만큼 그런 기회는 더 확대될 것이라 믿는다.
애국가를 자주 부르고 많이 듣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의례적으로 애국가를 부르고 무심히 애국가 연주를 듣는다면 가슴에 고이는 감동이 없다. 가사 한 구절 한 구절, 선율 한 가락 한 가락에서 광부가 광석을 캐내듯 깊고 넓게 의미를 캐내려는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 애국가의 참 맛을 느낄 수가 있다.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 나라 만세”

이 노랫말에는 우리 겨레의 순천사상(順天思想)과 끈질긴 생명력이 옹골지게 담겨져 있다. 9백여 회의 외침(外侵)을 이겨내며 반만년의 역사를 꾸려 온 겨레의 저력이 살아 숨쉰다. 짧은 애국가의 이 가사 한 구절을 읊조리면서 파란만장했던 지난 역사의 큰 물줄기를 되새겨 보는 것도 유익한 일이려니 싶다. 먼 조상으로부터 나에게 이르기까지 이어 내려 온 끈끈한 핏줄의 흐름을 음미해 보고, 나로부터 연면히 이어나갈 후손을 그려보며, 내가 어떻게 이 시대를 호흡하며 삶의 흔적을 남겨야 할 것인지에 생각이 머물면 절로 어깨가 무거워진다.
동해물이 마르고 백두산이 닳기란 실로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불가능의 차원이다. 그 시간적 길이는 상식의 잣대로는 측량할 수 없는 영원의 세계다. 그 애국가 1절의 가사 속에는 우리 나라가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영원무궁토록 튼튼히 뻗어나기를 기원하는 겨레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있다.
안익태(安益泰) 선생이 작곡한 애국가 연주가 귀에 잡히면 조선시대 선비의 걸음걸이가 연상된다. 길을 가다가 소나기를 만나도 종종걸음을 걷지 않았다는 딸각발이의 나막신 끄는 소리가 애국가의 선율에서 묻어난다. 경박한 고고리듬도 아니고, 느려빠진 진양조도 아니다. 엄숙하고도 장엄한 분위기의 4분의 4박자 리듬인 까닭이다.
한때 애국가는 4절까지 제창하도록 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엔 1절만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간소화로 치닫는 세태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애국가의 2절엔 바람 서리 불변하는 소나무를 통해 겨레의 기상을 노래하고 있고, 3절엔 광활한 가을 밤 하늘의 밝은 달을 기리며 겨레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을 읊고 있다. 그리고 4절에서는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를 사랑하자는 노랫말로 매듭지어 지고 있다. 이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지 않으면서부터 나라와 겨레보다는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익을 더 추구하게 된 게 아닐까?
애국가의 가사가 시적(詩的)이냐 아니냐, 애국가의 작곡이 음악성이 있냐 없냐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그것은 마치 나의 어머니가 미인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요즘 우리 사회는 카오스의 와중에 휩싸인 듯하다. 잇단 시위가 우리를 불안케 한다. 농어민도, 교육자도, 노동자도, 국회의원도 주먹을 불끈 쥐고 집단적으로 선동적인 구호를 합창한다.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 가는 징검다리라 여기지만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나는 연일 보도되는 갖가지 시위장면을 보면서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린 적이 있다.
“시위를 하는 측이나 말리는 측이 다함께 애국가를 합창하면 어떨까?” 라고. 애국가를 부른다면 ‘나’와 ‘우리’보다는 그래도 ‘나라’와 ‘겨레’를 더 먼저 떠올리게 되지 않을까 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