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봄날 이야기

2005.04.29 14:08

최선옥 조회 수:56 추천:9

어느 봄날  이야기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최선옥


이렇게 눈부신 아침 햇살은 참 드문 일이다. 봄철 아지랑이가 개니 맑디맑은 아침공기와 더불어 멀리까지 잘 보인다. 서둘러 베란다 창문을 활짝 열고 바깥 공기를 맞아들였다. 그 틈새로 4월의 달콤한 봄 향기가 반가이 밀려들어왔다. 새삼 봄이 절정임을 느낀다.
주방에서 차 끓는 소리가 유난히 정겹게 들리며 향긋한 차향기가 후각을 자극했다. 나는 차 한 잔을 들고 거실로 나가 4월의 봄을 만끽하며 가벼운 상념에 잠겼다.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산책길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주택가를 뒤로하고 낮은 산을 휘감듯이 오르는 이 길은 가벼운 아침운동을 하고 산책을 즐기는 이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다. 특히 올해는 봄이 기다려질 만큼 늑장을 부려서일까. 꽃샘추위로 움츠리던 이들도 다시 모여들어 분주하고 활기찬 모습을 찾게 되었다.  
평소보다 오늘은 좀 이른 시간이어서일까, 으스스한 기분이 들 정도로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길을 밝혀주는 가로등도 이제는 자기 일을 끝마칠 시간이 되었다는 듯 졸고 있다.    너무 이른 새벽, 눈이 떠졌는데 뒤척거리며 다시 잠을 자려니 번거로워 그냥 나선 참이었다. 평소보다 한 시간정도 이른 셈이다. 다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했으나 내친 김에 그대로 걷고 있었다. 그때였다. 앞쪽에서 내려오는 검은 그림자가 보였다. 순간 철렁 가슴이 내려앉는 것 같은 무섬증이 일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그림자가 사람들이었음을 확인하고서도 머리가 쭈뼛거리는 공포는 가시지 않았고 오히려  더 커져 갔다. 한적한 곳에서 사람을 만나는 것이 제일 무섭다는 말이 실감되어지는 순간이었다. 외면하고 서서 어서 비켜 내려갔으면 하고 주춤거리는데 반가운 듯이 “안녕하세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 부부였다. 앞장 선 남편이 지팡이 같은 것으로 뒤에 부인을 이끌어주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피하려 했는데 “! 좋은 하루 되십시오!”아주 깍듯한 인사가 뒤따랐다. 나도 얼른 인사말을 해야겠는데 순간 입이 붙어버렸다. 그들은 천천히 내려갔고, 난 나대로 한 마디 말도 못 한 채 그들을 스쳐 보냈다. 얼굴이 붉어졌다. 아마도 주위가 밝았으면 붉어진 내 얼굴이 보였으리라. 왜 난 한 마디 말도 못했을까? 하다 못 해 그들 말을 따라서라도 하던가, 손이라도 들어줄 것을. 혹시 그들이 무안하지는 않았을까? 가벼운 한 마디가 얼마나 부드러운 하루의 시작이 되는데, 그들의 밝은 마음이 흐려지지나 않았는지 몹시 후회가 되었다. 내 이런 행동은 아직도 낯가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질병이다. 새로운 사람과 만나면 우선 피하고 싶어지는 성격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이 습성은 어디서나 따라왔을까. 외국에 나갔을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왜 그렇게도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하기를 좋아(?)하는지, 더구나 말만 하는 게 아니라 일상적으로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거나 심지어는 악수를 청해 오기도 했다. 눈을 찡긋거리기도 하고, 그들의 얼굴엔 항상 밝은 미소가 머물렀다.
그럴 때마다 난 당황해서 쩔쩔맸다. 잔뜩 얼어서 겨우 입술에서만 나오는 인사를 중얼거리곤 했다. 그래서 될 수 있는 한 사람들을 피하려고 엘리베이터 쪽을 살피다가 사람들이 없는 틈을 타서 얼른 나가곤 했다. 난 성격적으로 절대 무뚝뚝한 편은 아니다. 아니 퍽 부드럽고 상냥한 편이라고들 한다. 수다도 잘 떠는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왜 그런지 생각해 볼 문제다. 아무리 부정을 해도 난 구세대에 속한 사람이고 봉건적인 오랜 교육 탓이라고 할까, 여자가 먼저 인사하고 말을 건네는 것은 정숙하지 못한 태도라고 은연중에 배어든 관습 탓이라 자위해 보지만, 역시 난 어쩔 수 없는 구식 노인세대다.

막 아침 해가 떠오르려고 하자 산은 온갖 향내를 내뿜기 시작했다. 나무며 한꺼번에 활짝 핀 꽃에서 풀 한 포기 한 포기에서 풍기는 봄 냄새로 산 전체가 향기로 가득 찼다. 난 심호흡을 아주 크게 하며 내 속에 자리하고 있던 찌꺼기들을 몽땅 쏟아내려 했다.

혹시라도 내려오는 길목에서 쉬고 있을 그들을 만날 수만 있다면 나는 아주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