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타기 하는 세상
2005.05.07 11:08
줄타기하는 세상
김재희
조리개를 당기어도 보고 밀어도 본다. 외줄을 타고 노는 광대의 몸놀림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며 카메라 렌즈 안에 잡힌다. 한 손에 쥔 부채가 몸짓 따라 허공에 원을 그리고 몸의 율동에 따라 퉁기는 줄의 탄력이 관객들의 몸 속으로 전이된다. 광대와 관객은 일체가 되어 같이 움직이고 같이 웃는다. 민속촌의 줄타기 공연장 풍경이다.
가느다란 줄 위에서 온갖 묘기를 부리는 몸놀림은 과히 신기(神氣)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물살을 가르며 나아가는 오리 발짓 같은 걸음걸이와 껑충껑충 널을 뛰는 듯한 묘기를 거침없이 해낸다. 줄의 반동에 따라 몸을 허공에 날릴 때는 박수가 절로 터진다. 관중들은 일제히 탄성을 지르고 거기 맞추기라도 한 듯 몸이 하늘에 치솟는다. 땅 위에서도 하기 어려운 동작이 공중의 외줄 위에서도 자유롭다. 자칫하면 줄 위에서 떨어질 듯한 아슬아슬함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조리게 한다. 광대가 공연하는 무대는 그저 선 하나이지만 그 위에서 모든 동작을 다 이루어낸다
광대의 발끝에서 무한한 세계를 보았다. 그의 발걸음에 보여주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짧은 보폭에 빠른 걸음에서는 즐거움을, 느릿하고 넓은 보폭에서는 왠지 모를 서글픔을 느꼈다. 율동은 몸 동작이 왼발과 오른발이 서로 나누어 갖는 몸의 무게가 어느 만큼인가에 따라 달랐고, 팔 동작의 동선도 발의 움직임에 따라 방향과 크기가 달랐다. 그런 동작과 재담, 소리, 춤사위가 어느 예술에 뒤지랴. 그 어느 것에도 뒤지지 않을 예인은 광대란 이름을 얻었나보다.
줄광대, 그의 잔 노릇(묘기)의 이유들이 다 그럴듯하다. 가지각색의 풍자가 들어있다. 사회의 기생적 존재인 왈자들의 걸음걸이에는 질펀한 방탕함이 엿보이고, 물동이를 인 아낙네의 발걸음에는 쏟아 버릴 수도 떨어뜨릴 수도 없는 얽매인 삶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양반걸음 속에는 체면의 굴레에 걸려 넘어질 듯한 허점이 담겨 있고, 상놈이 양반다리 흉내를 낸다는 책상다리 묘기는 반상의 차를 허물어뜨려야 한다는 풍자였다. 권력의 뒷면에서 숨죽여 살아야 하는 서민들로서는 감히 말로 할 수 없었던 일들을 갖가지 타령과 재담으로 표현해 냈다. 그들의 과오를 폭로하고 일깨우려는 의도의 몸짓에 구경꾼들이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웃으며 침을 놓는 것이다. 이런 해학이야말로 얼마나 차원이 높은가. 우리 조상들의 번득이는 지혜가 돋보이는 풍속이다.
19세기 조선회화 '기산풍속화첩(箕山風俗畵帖)'에 줄광대라는 작품이 있다. 그 그림에는 스님 모습을 한 줄광대와 포졸 모습을 한 어릿광대가 있다. 아마도 '중타령'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산에서 내려 온 스님이 팔선녀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그만 세속의 흥에 빠져 선녀들과 놀다가 포졸에게 혼이 나고는 다시 산으로 올라간다는 내용이다. 줄광대의 타령과 몸짓에 따라 어릿광대는 이런저런 재담으로 줄광대를 놀리기도 하고 혼내기도 하면서 세상사 돌아가는 인심을 엮어 내는 놀이다. 이런 장면이 그림으로 길이 남아있는 것은 그 당시 줄타기의 묘기 중에서 이 '중타령'이 인기가 있지 않았나 싶다.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일이어서 많은 사람들의 머리에 각인이 돼 있던 사회현상이었을 것이다.
줄타기에도 시대정신이라는 것이 은근히 끼어 들 것이다. 이 시대는 어떤 광대가 어떤 정신으로 줄을 탈까. 또 어떤 모습의 사람이 줄을 타는 그림 한 장으로 길이 길이 남아 있게 될까. 그 그림을 상상해 본다.
줄광대의 손에는 아마도 망치 모양의 부채가 들려 있고, 가슴엔 커다란 배지를 달고 있는 모습이지 않을까. 줄 아래에는 촛불을 든 어릿광대가 이런저런 말로 줄광대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있으리라.
생각해 보면 세상살이란 제마다의 줄타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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