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이야기
2005.05.09 16:42
*제1회 가정의 날 기념 우리 가족이야기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
내가 사는 이야기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유영희
1급 지체장애인! 내가 가진 또 하나의 신분증이다. 스물 넷에 결혼을 하여 아들 둘을 낳은 후, 의사는 '전신류머티스관절염 환자'라는 이름표를 붙여 주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늘이 찔러대는 듯한 통증에 의식은 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인간과 다름없는 삶이 되어 버렸다.
갓난아이가 배고파 울어도, 아이를 들어 젖을 먹일 수가 없었다. 머리맡에 놓여진 젖병을 누운 채 물리다 보면 아이는 늘 사래가 들렸고, 기침을 하다가 젖을 토했다. 배가 고프다는 네 살짜리 큰 녀석 손에 동전을 쥐어주며 빵과 우유를 열심히 가르쳐서 보내면 아이는 배부르지 않을 껌이나 사탕을 손에 들고 왔다. 배고픈 아이에게 밥을 줄 수 없다는 내 설움에 펑펑 울어 제치면, 아이는 덩달아 서럽게 따라 울었다. 어미도 굶고, 두 아이도 굶고…….
누운 채 대소변을 해결해야 했고 숟가락을 들 수도 없었다. 통증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아픔은 남편과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누운 채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스테로이드 중독과 극심한 합병증으로 생명도 보장할 수 없다는 선고를 들었다. "미련을 버리거라. 미련을 가질수록 더욱 애착이 가는 게 삶이다. 산 사람이나 살아야지 않겠니?" 아직 숨쉬고 있는 딸을 향해 고인이 되신 친정 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이다.
부모, 형제마저 포기한 목숨을 악착같이 붙잡고 있는 사람은 남편이었다. 공기 좋은 요양원을 찾아 아내를 맡겼다. 아직 땅에 소명이 남아서일까? 한달 뒤를 보장할 수 없다던 생명은 회복이 되어 띄엄띄엄 집을 찾게 되었다. 작은 녀석은 몇 달만에 손님처럼 오는 어미가 낯설어 선뜻 다가오지도 못하였다. 그러다 어미의 살 냄새가 좋다고 느낄 무렵이면 어미는 또 다시 훌쩍 집을 나섰다. 아이는 어미와 떨어지지 않으려 온 골목을 뒹굴며 울었다. 큰 녀석은 자다가도 화들짝 놀라며 어미의 존재를 확인하는 상처 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 가정의 며느리, 아내, 어미의 자리를 고집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내 욕심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에게는 따뜻한 밥을 해 먹이며, 옷을 빨아 줄 건강한 사람이 필요하였다.
이혼을 요구하였으나 남편은 도리질만 하였다. 부부는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이니 어느 한쪽이 약하면 강한 쪽이 채우면 된다는 것이다. 3년의 요양원 생활로 목숨은 건졌으나 전신의 연골은 갈수록 말라갔다. 남편은 느닷없는 수술을 제의해 왔다. 나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는 입장이었다. 지방에서의 수술은 믿을 수 없다며 서울 S병원에 덜컥 진료예약을 하고, 곧바로 수술 스케줄을 잡았다. 1989년부터 시작한 수술은 작년까지 열 번의 수술을 해야만 했다. 무릎, 팔꿈치, 어깨 주관절을 전부 인공관절로 갈아 끼우고 시간이 지나 닳아진 관절은 또 교체를 하곤 하였다.
23년 동안 아내의 병 수발을 하면서 한 번도 등을 돌린 적이 없는 남자. 불편한 아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여행길 어느 곳이든, 해외에 나가서도 스스럼없이 아내를 업고 길을 걷던 남편이었다. 교사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수술비를 대면서도 아내가 집을 떠나 써야 할 돈을 마르지 않도록 공급하던 손길이었다. 결혼한 지 2년 뒤부터 사람 구실을 못하는 며느리나 올케를 곱게 봐줄 시댁은 없을 것이다. 남편은 그때마다 온 몸으로 투쟁하다시피 하여 아내의 자리를 만들어 갔다. 남편이 만들어 놓은 아내인 나의 위치는 시댁행사에 참석만 해도 나는 고마운 사람이 되었다.
숱한 날, 아내의 빈자리를 보며 그가 소리 없이 흘렸을 한숨과 눈물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내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수술 동의서에 열 번의 도장을 찍으며 가슴은 이미 숯이 되었을 것이다. 올해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큰 녀석이나, 금오공과대학에 학부 수석으로 입학하여 지금까지 전과목 A+를 받는 작은 녀석. 두 녀석은 주말이면 집에 오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다. 아이들에게 어미의 공백을 채워 주려고 숯이 된 가슴으로 웃음을 잃지 않던 아빠의 눈물어린 헌신은 튼실한 열매를 맺은 것이다. 포기하지 않았던 사랑의 결실인 것이다.
아들의 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한 때는 밉기도 했다는 시어머님도, 할머니의 손길을 통해 바르게 자라는 손자들을 보며 죽지 않고 살아 준 며느리가 그저 고맙다고 하신다. 4년 전부터 고혈압과 당뇨, 협심증과 관절염으로 시어머님은 걸음을 걷지 못한 채 앉아서만 사신다. 스스로 몸도 부지하기 어려운 처지에 거동 못하는 어머니를 어찌 모시느냐고 말들을 한다. 나는 억지로 효도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머니는 설 수가 없는 대신 나는 혼자 앉을 수가 없으니, 서서 하는 일은 내가 하고 앉아서 하는 일은 어머님이 하시며 더불어 살아갈 뿐이다. 필요하면 24살, 22살로 장성한 두 녀석의 등을 고부간에 빌리기도 한다.
열 번의 수술을 받고 보행이 가능한 나는 수필을 공부한다. 등단의 과정을 거치도록 도와 준 남편과 두 아들, 그리고 어머니. 그동안 가족들의 헌신이 부족하다는 듯 올부터 디지털대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새로운 시작에 무조건 격려의 박수를 보내던 남편과 아들들이 마냥 고맙기만 하다. 평생동안 병원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진통제에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아내. 머리 감기기, 옷 입혀주기, 양말 신기기 등 끊임없이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내. 남편인들 어느 구석에 짐을 벗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으랴마는 그의 가슴엔 끝없이 솟아나는 사랑의 샘이 자리했나 보다. 더도 말고 마흔까지만 살기를 소원했던 나는 벌써 쉰을 바라보는 나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의 사랑 안에서 굽고 휘어진 손발이지만 어깨가 쳐지는 적이 별로 없다. 죽음이라는 고비도 함께 넘어선 동지들이 곁에 있는데 어찌 세상을 향해 당당히 고개를 들지 못하겠는가?
앉은 채로만 사시는 83세의 시어머님이 건강하신 게 감사하다. 진수성찬을 마련할 힘이 없어 김치와 국뿐인 밥일망정 내 손으로 어머님 식사를 드릴 수 있는 것도 감사하다. 어머님께 주어진 세월이 얼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할 것이다. 유치한 장난으로 끊임없는 웃음을 짓는 우리를 향해 어머님은 언제 철들 것인지를 걱정하신다. 그런 부모가 이미 익숙해져 버린 아들들의 건강한 웃음이 늘 담을 넘는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웃으며 걸어가자는 남편의 철학이 뿌리를 내린 셈이다.
건강한 가정은 환경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약함을 강한 자가 담당하고 보완하여, 건강한 가정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내가 사는 이야기를 감히 자랑하여 본다.
내가 사는 이야기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유영희
1급 지체장애인! 내가 가진 또 하나의 신분증이다. 스물 넷에 결혼을 하여 아들 둘을 낳은 후, 의사는 '전신류머티스관절염 환자'라는 이름표를 붙여 주었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바늘이 찔러대는 듯한 통증에 의식은 있으나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식물인간과 다름없는 삶이 되어 버렸다.
갓난아이가 배고파 울어도, 아이를 들어 젖을 먹일 수가 없었다. 머리맡에 놓여진 젖병을 누운 채 물리다 보면 아이는 늘 사래가 들렸고, 기침을 하다가 젖을 토했다. 배가 고프다는 네 살짜리 큰 녀석 손에 동전을 쥐어주며 빵과 우유를 열심히 가르쳐서 보내면 아이는 배부르지 않을 껌이나 사탕을 손에 들고 왔다. 배고픈 아이에게 밥을 줄 수 없다는 내 설움에 펑펑 울어 제치면, 아이는 덩달아 서럽게 따라 울었다. 어미도 굶고, 두 아이도 굶고…….
누운 채 대소변을 해결해야 했고 숟가락을 들 수도 없었다. 통증보다 더 견딜 수 없는 아픔은 남편과 아이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누운 채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스테로이드 중독과 극심한 합병증으로 생명도 보장할 수 없다는 선고를 들었다. "미련을 버리거라. 미련을 가질수록 더욱 애착이 가는 게 삶이다. 산 사람이나 살아야지 않겠니?" 아직 숨쉬고 있는 딸을 향해 고인이 되신 친정 아버지께서 하셨던 말씀이다.
부모, 형제마저 포기한 목숨을 악착같이 붙잡고 있는 사람은 남편이었다. 공기 좋은 요양원을 찾아 아내를 맡겼다. 아직 땅에 소명이 남아서일까? 한달 뒤를 보장할 수 없다던 생명은 회복이 되어 띄엄띄엄 집을 찾게 되었다. 작은 녀석은 몇 달만에 손님처럼 오는 어미가 낯설어 선뜻 다가오지도 못하였다. 그러다 어미의 살 냄새가 좋다고 느낄 무렵이면 어미는 또 다시 훌쩍 집을 나섰다. 아이는 어미와 떨어지지 않으려 온 골목을 뒹굴며 울었다. 큰 녀석은 자다가도 화들짝 놀라며 어미의 존재를 확인하는 상처 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 가정의 며느리, 아내, 어미의 자리를 고집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내 욕심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들에게는 따뜻한 밥을 해 먹이며, 옷을 빨아 줄 건강한 사람이 필요하였다.
이혼을 요구하였으나 남편은 도리질만 하였다. 부부는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이니 어느 한쪽이 약하면 강한 쪽이 채우면 된다는 것이다. 3년의 요양원 생활로 목숨은 건졌으나 전신의 연골은 갈수록 말라갔다. 남편은 느닷없는 수술을 제의해 왔다. 나는 선택의 여지조차 없는 입장이었다. 지방에서의 수술은 믿을 수 없다며 서울 S병원에 덜컥 진료예약을 하고, 곧바로 수술 스케줄을 잡았다. 1989년부터 시작한 수술은 작년까지 열 번의 수술을 해야만 했다. 무릎, 팔꿈치, 어깨 주관절을 전부 인공관절로 갈아 끼우고 시간이 지나 닳아진 관절은 또 교체를 하곤 하였다.
23년 동안 아내의 병 수발을 하면서 한 번도 등을 돌린 적이 없는 남자. 불편한 아내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여행길 어느 곳이든, 해외에 나가서도 스스럼없이 아내를 업고 길을 걷던 남편이었다. 교사 월급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수술비를 대면서도 아내가 집을 떠나 써야 할 돈을 마르지 않도록 공급하던 손길이었다. 결혼한 지 2년 뒤부터 사람 구실을 못하는 며느리나 올케를 곱게 봐줄 시댁은 없을 것이다. 남편은 그때마다 온 몸으로 투쟁하다시피 하여 아내의 자리를 만들어 갔다. 남편이 만들어 놓은 아내인 나의 위치는 시댁행사에 참석만 해도 나는 고마운 사람이 되었다.
숱한 날, 아내의 빈자리를 보며 그가 소리 없이 흘렸을 한숨과 눈물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 것인가? 아내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수술 동의서에 열 번의 도장을 찍으며 가슴은 이미 숯이 되었을 것이다. 올해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큰 녀석이나, 금오공과대학에 학부 수석으로 입학하여 지금까지 전과목 A+를 받는 작은 녀석. 두 녀석은 주말이면 집에 오는 게 가장 큰 즐거움이다. 아이들에게 어미의 공백을 채워 주려고 숯이 된 가슴으로 웃음을 잃지 않던 아빠의 눈물어린 헌신은 튼실한 열매를 맺은 것이다. 포기하지 않았던 사랑의 결실인 것이다.
아들의 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한 때는 밉기도 했다는 시어머님도, 할머니의 손길을 통해 바르게 자라는 손자들을 보며 죽지 않고 살아 준 며느리가 그저 고맙다고 하신다. 4년 전부터 고혈압과 당뇨, 협심증과 관절염으로 시어머님은 걸음을 걷지 못한 채 앉아서만 사신다. 스스로 몸도 부지하기 어려운 처지에 거동 못하는 어머니를 어찌 모시느냐고 말들을 한다. 나는 억지로 효도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다만 어머니는 설 수가 없는 대신 나는 혼자 앉을 수가 없으니, 서서 하는 일은 내가 하고 앉아서 하는 일은 어머님이 하시며 더불어 살아갈 뿐이다. 필요하면 24살, 22살로 장성한 두 녀석의 등을 고부간에 빌리기도 한다.
열 번의 수술을 받고 보행이 가능한 나는 수필을 공부한다. 등단의 과정을 거치도록 도와 준 남편과 두 아들, 그리고 어머니. 그동안 가족들의 헌신이 부족하다는 듯 올부터 디지털대학교의 학생이 되었다. 새로운 시작에 무조건 격려의 박수를 보내던 남편과 아들들이 마냥 고맙기만 하다. 평생동안 병원을 내 집처럼 드나들며 진통제에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아내. 머리 감기기, 옷 입혀주기, 양말 신기기 등 끊임없이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아내. 남편인들 어느 구석에 짐을 벗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으랴마는 그의 가슴엔 끝없이 솟아나는 사랑의 샘이 자리했나 보다. 더도 말고 마흔까지만 살기를 소원했던 나는 벌써 쉰을 바라보는 나이다. 가정이라는 울타리의 사랑 안에서 굽고 휘어진 손발이지만 어깨가 쳐지는 적이 별로 없다. 죽음이라는 고비도 함께 넘어선 동지들이 곁에 있는데 어찌 세상을 향해 당당히 고개를 들지 못하겠는가?
앉은 채로만 사시는 83세의 시어머님이 건강하신 게 감사하다. 진수성찬을 마련할 힘이 없어 김치와 국뿐인 밥일망정 내 손으로 어머님 식사를 드릴 수 있는 것도 감사하다. 어머님께 주어진 세월이 얼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여전히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할 것이다. 유치한 장난으로 끊임없는 웃음을 짓는 우리를 향해 어머님은 언제 철들 것인지를 걱정하신다. 그런 부모가 이미 익숙해져 버린 아들들의 건강한 웃음이 늘 담을 넘는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웃으며 걸어가자는 남편의 철학이 뿌리를 내린 셈이다.
건강한 가정은 환경에 의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의 약함을 강한 자가 담당하고 보완하여, 건강한 가정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내가 사는 이야기를 감히 자랑하여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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