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조루 객담
2005.05.15 23:29
운조루 객담 (雲鳥樓 客談)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야) 양 용 모
봄이 지리산을 덮고 운조루에 푸른 그림자를 드리웠다. 솟을대문 앞 연못에 잡초가 돋아나고 졸졸 흘러드는 물길은 섬을 맴돈다. 나그네 발자국에 놀란 물방개가 물살을 가르며 줄달음 치고 둑 옆에 심어놓은 작약이 꽃망울을 터트리려 안간힘을 쏟는다. 부연에 거미줄을 걸고 먹이사냥에 나선 거미는 게으름을 피우다가 이제 일을 시작하려나 보다.
운조루는 지리산 끝자락 구례군 토지면에 있다. 섬진강이 급한 물살로 구례를 돌아 잠시 한숨 돌리는 곳, 북으로 어머니 품속같이 넉넉하게 자리 잡은 양지바른 곳에 지어진 조선시대 양반 가옥이다. 입구에서 좌판 비슷한 상점을 벌여놓고 후손임을 강조하며 청산유수로 운조루에 대하여 설명하는 노 교육자는 결국 운조루의 곁가지인가 보다. 집주인인 듯한 노파는 대문에 쪼그리고 앉아 며느리인 듯한 젊은 여인의 도움을 받아 1인당 단돈 1,000원씩의 입장료 챙기기에 바쁘다.
물건을 산 사람만 준다고 하는 노인에게서 가까스로 얻은 안내문에는 운조루의 내력에 대하여 잘 설명해 놓았다. 조선조 영조52(1776년)년에 당시 삼수보사를 지낸 유이주가 세운 99칸의 주택으로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배치형태인 품자형(品字形)의 집이다. 지금은 73칸만 남아 있어 아쉬웠다. 운조루(雲鳥樓)라는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에서 따왔다고 하며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이 집의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도연명은 세상에 나갔다가 자신의 이상과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가난을 벗삼고자 고즈넉한 전원이 그리워 귀거래하였다. 도연명은 부자도 아니었으며 높은 벼슬을 지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 인심에 휩쓸리기가 실어 그래도 아직은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생각하고 고향 전원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도연명은 부귀영화를 위하여 돌아간 것이 아니고 재산을 모아 유유자적(悠悠自適) 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연에 묻혀 흐르는 구름을 벗삼아 시 한 수 짓고 벗이 오면 한 잔 술에 만족하였던 것이다.
운조루는 풍수지리설에 의한 금구몰니(金龜沒泥)라느니 금환락지(金環落地) 등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좌우 산세가 집을 싸고 있고 앞에 큰 강이 흐르고 뒤에는 거대한 지리산이 버티고 있으니 무슨 이름이라도 붙이면 그것이 곧 명당일 것이다. 하긴 이 정도의 오랜 집이 잘 보존되어 있으려면 그만한 신비한 이야기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집에서 자랑으로 여기는 목독이라는 이름의 나무로 된 쌀뒤주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또한 낮은 굴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집 안채의 부엌에는 대형쌀뒤주 두 개가 있다. 원통형의 쌀뒤주에는 항상 쌀을 가득 담아두고 가난한 동네 사람들이 이 집 식구들 눈치 보지 않고 한 끼 식사를 지을 만큼의 쌀을 마음대로 가져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 뒤주의 마개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 씌어져 있다. 누구나 이 마개를 풀고 쌀을 가져가라는 뜻이다. 또 이 집의 굴뚝이 낮은 것은 끼니때 연기가 피어오르면 가난한 동네 사람들이 위화감을 느낄까봐 일부러 그렇게 낮게 만들었다고 한다.
운조루의 멋은 웅장한 고가도 아니요, 고풍스런 건축미도 아니다. 바로 굴뚝의 의미와 목독의 인심에 있다. 부자는 가난한 자의 세정을 모른다. 부자는 오만해지기 쉽고 부를 이어가기 위하여 자린고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단단한 땅에 물이 고이듯이 그저 쥐어짜고 하여야 부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은 부자는 노력으로 되지만 큰 부자는 하늘이 내어야 한다. 하늘은 곧 사람이고 인심이다. 인심이 넉넉하여야 부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운조루의 주인 정도이면 구례일대의 토지는 거의가 이 집 소유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많은 소작농이 있을 것이고 일꾼들이 늘 장사진을 쳤을 것이다. 훈훈한 인심이 아니고 흉년에 베풀지 않았더라면 재산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주인이 이런 하늘의 이치를 아주 잘 알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동학란, 여수순천반란사건, 6.25 등 처절한 변란 속에서도 이 집 식구들이 목숨을 잃거나 이 집이 화재를 당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운조루 식구들이 동네에서 인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간방에서 젖먹이 아이가 세상 모르게 자고 있다. 이 집의 대를 이을 후손인가보다. 300여 년의 세월은 몇 대를 거쳐 생과 사를 거듭하였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산천은 의구하지만 인걸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이 집의 영화도 한 때뿐 그 지체 높은 분들이 살던 옛집은 이제 세인의 구경거리로 변해버렸다. 후손들에게 물려준 것이 무엇일까. 후손은 운조루 마루에 글 읽는 선조의 낭랑한 초성이 들리는데 자신은 할 일없이 세월만 보낸다고 탄식하며 한 수의 시를 써놓았다. 선대의 유업에 비하여 자신이 스스로 불민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어쩌랴. 관심 있어 찾아온 사람들에게서 몇 푼의 입장료를 받아 살아가는 것도 선업의 후덕이라면 후덕이 아니겠는가.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야) 양 용 모
봄이 지리산을 덮고 운조루에 푸른 그림자를 드리웠다. 솟을대문 앞 연못에 잡초가 돋아나고 졸졸 흘러드는 물길은 섬을 맴돈다. 나그네 발자국에 놀란 물방개가 물살을 가르며 줄달음 치고 둑 옆에 심어놓은 작약이 꽃망울을 터트리려 안간힘을 쏟는다. 부연에 거미줄을 걸고 먹이사냥에 나선 거미는 게으름을 피우다가 이제 일을 시작하려나 보다.
운조루는 지리산 끝자락 구례군 토지면에 있다. 섬진강이 급한 물살로 구례를 돌아 잠시 한숨 돌리는 곳, 북으로 어머니 품속같이 넉넉하게 자리 잡은 양지바른 곳에 지어진 조선시대 양반 가옥이다. 입구에서 좌판 비슷한 상점을 벌여놓고 후손임을 강조하며 청산유수로 운조루에 대하여 설명하는 노 교육자는 결국 운조루의 곁가지인가 보다. 집주인인 듯한 노파는 대문에 쪼그리고 앉아 며느리인 듯한 젊은 여인의 도움을 받아 1인당 단돈 1,000원씩의 입장료 챙기기에 바쁘다.
물건을 산 사람만 준다고 하는 노인에게서 가까스로 얻은 안내문에는 운조루의 내력에 대하여 잘 설명해 놓았다. 조선조 영조52(1776년)년에 당시 삼수보사를 지낸 유이주가 세운 99칸의 주택으로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배치형태인 품자형(品字形)의 집이다. 지금은 73칸만 남아 있어 아쉬웠다. 운조루(雲鳥樓)라는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에서 따왔다고 하며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이 집의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도연명은 세상에 나갔다가 자신의 이상과 맞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가난을 벗삼고자 고즈넉한 전원이 그리워 귀거래하였다. 도연명은 부자도 아니었으며 높은 벼슬을 지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세상 인심에 휩쓸리기가 실어 그래도 아직은 정도에서 벗어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 생각하고 고향 전원으로 돌아간 것이었다. 도연명은 부귀영화를 위하여 돌아간 것이 아니고 재산을 모아 유유자적(悠悠自適) 하지도 않았다. 다만 자연에 묻혀 흐르는 구름을 벗삼아 시 한 수 짓고 벗이 오면 한 잔 술에 만족하였던 것이다.
운조루는 풍수지리설에 의한 금구몰니(金龜沒泥)라느니 금환락지(金環落地) 등의 명당자리라고 한다. 좌우 산세가 집을 싸고 있고 앞에 큰 강이 흐르고 뒤에는 거대한 지리산이 버티고 있으니 무슨 이름이라도 붙이면 그것이 곧 명당일 것이다. 하긴 이 정도의 오랜 집이 잘 보존되어 있으려면 그만한 신비한 이야기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 집에서 자랑으로 여기는 목독이라는 이름의 나무로 된 쌀뒤주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는가. 또한 낮은 굴뚝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집 안채의 부엌에는 대형쌀뒤주 두 개가 있다. 원통형의 쌀뒤주에는 항상 쌀을 가득 담아두고 가난한 동네 사람들이 이 집 식구들 눈치 보지 않고 한 끼 식사를 지을 만큼의 쌀을 마음대로 가져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 뒤주의 마개에는 '타인능해(他人能解)라 씌어져 있다. 누구나 이 마개를 풀고 쌀을 가져가라는 뜻이다. 또 이 집의 굴뚝이 낮은 것은 끼니때 연기가 피어오르면 가난한 동네 사람들이 위화감을 느낄까봐 일부러 그렇게 낮게 만들었다고 한다.
운조루의 멋은 웅장한 고가도 아니요, 고풍스런 건축미도 아니다. 바로 굴뚝의 의미와 목독의 인심에 있다. 부자는 가난한 자의 세정을 모른다. 부자는 오만해지기 쉽고 부를 이어가기 위하여 자린고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단단한 땅에 물이 고이듯이 그저 쥐어짜고 하여야 부자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은 부자는 노력으로 되지만 큰 부자는 하늘이 내어야 한다. 하늘은 곧 사람이고 인심이다. 인심이 넉넉하여야 부를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운조루의 주인 정도이면 구례일대의 토지는 거의가 이 집 소유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많은 소작농이 있을 것이고 일꾼들이 늘 장사진을 쳤을 것이다. 훈훈한 인심이 아니고 흉년에 베풀지 않았더라면 재산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마 주인이 이런 하늘의 이치를 아주 잘 알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동학란, 여수순천반란사건, 6.25 등 처절한 변란 속에서도 이 집 식구들이 목숨을 잃거나 이 집이 화재를 당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운조루 식구들이 동네에서 인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간방에서 젖먹이 아이가 세상 모르게 자고 있다. 이 집의 대를 이을 후손인가보다. 300여 년의 세월은 몇 대를 거쳐 생과 사를 거듭하였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 산천은 의구하지만 인걸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이 집의 영화도 한 때뿐 그 지체 높은 분들이 살던 옛집은 이제 세인의 구경거리로 변해버렸다. 후손들에게 물려준 것이 무엇일까. 후손은 운조루 마루에 글 읽는 선조의 낭랑한 초성이 들리는데 자신은 할 일없이 세월만 보낸다고 탄식하며 한 수의 시를 써놓았다. 선대의 유업에 비하여 자신이 스스로 불민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러나 어쩌랴. 관심 있어 찾아온 사람들에게서 몇 푼의 입장료를 받아 살아가는 것도 선업의 후덕이라면 후덕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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