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럽 여행을 마치며
2005.05.25 06:59
서유럽 여행을 마치며
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기) 김 정자
비가 내린다. 여행 마지막 밤이다. 여행을 하던 첫날도 이 프랑크푸르트 공항엔 약간의 비가 내렸었다. 창문을 열어 놓고 빗소리를 들으니 어디를 어떻게 다녀왔는지 생각나진 않고, 침대에 깔아놓은 하얀 시트와 이불이 푸근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국에서 듣는 빗소리는 더 정겹게 느껴지는가? 노란 유채 밭이 파란 밀밭과 어우러져 수평선까지 이르더니 이내 키 작은 민들레 밭으로 장관을 이루던 프랑스와, 스위스를 잇는 TGV구간과 붉은 양귀비꽃이 A1고속도로를 따라 쭉 피어 있어 고호의 양귀비꽃 그림을 생각나게 했던 이탈리아 등을 돌아보던 서 유럽여행의 끝날 저녁이다.
빗소리가 정겹다. 마루 끝에 앉아 초가지붕에서 뚝뚝 떨어지던 낙숫물소리를 들으며 아버지가 가져다주실 먹을 것을 기다리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의 평화로움처럼 창문을 열어놓고 듣는 빗소리가 아늑하여 9일간의 피로를 한꺼번에 씻어주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우리와 닮은 이태리 사람들은 참 부산스러웠는데 첫날 영국에서 만난 그들은 조금씩 내리는 비에 익숙해졌는지 우산이 없어도 느긋했다. 허기야 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변덕스런 날씨가 우리처럼 소나기로 변하지 않을 것을. 창 밖으로 넓은 길이 보이는데도 아까부터 두 대의 승용차만 주차되어 있을 뿐 하나도 바쁠 것 없는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이 호텔주변의 마을은 빗소리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열어 놓은 창으로 비치는 풍경이 아름답다. 몇 백 개의 등불을 달고 있는 것처럼 하얀 꽃송이를 단 커다란 마로니에가 진한 향기라도 내뿜을 것 같은데 비에 묻혀 버려서 창으로 들어오는 공기만 달다.
어둠이 스멀스멀 스며들어도 불을 켜기가 싫다. 오랜 여행에 지쳤는지 남편은 가볍게 코까지 골면서 잠에 떨어져 있다. 여러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슬쩍슬쩍 엿들어 가면서 우리 사는 모습을 조율해나가는 것일까? 이제는 화를 냈다가도 곧 스스로 맞추어 가는 걸 보니 이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남편뿐이구나 싶어진다. 남편과 만났을 무렵의 나이가 되어 각자의 보금자리를 찾아 떠난 아이들도 내가 살아온 것처럼 또 열심히 살아가겠지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남편의 잠든 모습을 바라본다.
비가 그치고 새소리가 들린다. 첫날과 마지막날을 빼고는 공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여 여행객들에게는 최상의 날씨였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모인 일행들은 지금 자기 방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일행이 함께 온 울산 팀들은 옆 호프집에서 생맥주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이태리에서 사온 와인을 마시며 나처럼 창 밖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 일행 중 유일한 신혼부부는 분홍빛과 하얀빛 꽃을 가로등처럼 달고있는 마로니에 거리로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젊은 그들 부부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내가 쓰는 글씨도 잘 보이지 않게 어둠이 깊어진다. 행복이란 이런 게 아닐까? 육신의 나른함 속에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이런 날은 참 흔하지 않은 날이다. 무엇에 그렇게 쫓기듯 살았을까?
지금이 몇 시쯤인지 핸드폰에 의지하던 습성으로 둘 다 시계를 가져오지 않아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다. 이건 우리뿐만이 아니라 몇 팀이 그런 것 같다. 습관이 참 무서운 거라고 다시 한 번 느끼며 다음엔 시계부터 챙겨야지 생각했다. 더구나 백야현상의 시작으로 낮이 점점 길어진다니 이 땅에서는 도대체 시간을 알 수가 없다. 이 방에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시간도 알려주지 않는다.
내일은 집으로 간다. 그 등치 큰 비행기가 지구 반대편으로 우릴 데려다 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일상이 시작되리라.
(2005. 5. 3)
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기) 김 정자
비가 내린다. 여행 마지막 밤이다. 여행을 하던 첫날도 이 프랑크푸르트 공항엔 약간의 비가 내렸었다. 창문을 열어 놓고 빗소리를 들으니 어디를 어떻게 다녀왔는지 생각나진 않고, 침대에 깔아놓은 하얀 시트와 이불이 푸근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이국에서 듣는 빗소리는 더 정겹게 느껴지는가? 노란 유채 밭이 파란 밀밭과 어우러져 수평선까지 이르더니 이내 키 작은 민들레 밭으로 장관을 이루던 프랑스와, 스위스를 잇는 TGV구간과 붉은 양귀비꽃이 A1고속도로를 따라 쭉 피어 있어 고호의 양귀비꽃 그림을 생각나게 했던 이탈리아 등을 돌아보던 서 유럽여행의 끝날 저녁이다.
빗소리가 정겹다. 마루 끝에 앉아 초가지붕에서 뚝뚝 떨어지던 낙숫물소리를 들으며 아버지가 가져다주실 먹을 것을 기다리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의 평화로움처럼 창문을 열어놓고 듣는 빗소리가 아늑하여 9일간의 피로를 한꺼번에 씻어주었다.
무엇이 그리 바쁜지 우리와 닮은 이태리 사람들은 참 부산스러웠는데 첫날 영국에서 만난 그들은 조금씩 내리는 비에 익숙해졌는지 우산이 없어도 느긋했다. 허기야 그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변덕스런 날씨가 우리처럼 소나기로 변하지 않을 것을. 창 밖으로 넓은 길이 보이는데도 아까부터 두 대의 승용차만 주차되어 있을 뿐 하나도 바쁠 것 없는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이 호텔주변의 마을은 빗소리에 미동도 하지 않았다.
열어 놓은 창으로 비치는 풍경이 아름답다. 몇 백 개의 등불을 달고 있는 것처럼 하얀 꽃송이를 단 커다란 마로니에가 진한 향기라도 내뿜을 것 같은데 비에 묻혀 버려서 창으로 들어오는 공기만 달다.
어둠이 스멀스멀 스며들어도 불을 켜기가 싫다. 오랜 여행에 지쳤는지 남편은 가볍게 코까지 골면서 잠에 떨어져 있다. 여러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슬쩍슬쩍 엿들어 가면서 우리 사는 모습을 조율해나가는 것일까? 이제는 화를 냈다가도 곧 스스로 맞추어 가는 걸 보니 이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남편뿐이구나 싶어진다. 남편과 만났을 무렵의 나이가 되어 각자의 보금자리를 찾아 떠난 아이들도 내가 살아온 것처럼 또 열심히 살아가겠지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남편의 잠든 모습을 바라본다.
비가 그치고 새소리가 들린다. 첫날과 마지막날을 빼고는 공해 없이 맑은 하늘을 보여 여행객들에게는 최상의 날씨였다. 우리나라 곳곳에서 모인 일행들은 지금 자기 방에서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일행이 함께 온 울산 팀들은 옆 호프집에서 생맥주를 마시고 있을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이태리에서 사온 와인을 마시며 나처럼 창 밖을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 일행 중 유일한 신혼부부는 분홍빛과 하얀빛 꽃을 가로등처럼 달고있는 마로니에 거리로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문득 젊은 그들 부부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내가 쓰는 글씨도 잘 보이지 않게 어둠이 깊어진다. 행복이란 이런 게 아닐까? 육신의 나른함 속에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는 이런 날은 참 흔하지 않은 날이다. 무엇에 그렇게 쫓기듯 살았을까?
지금이 몇 시쯤인지 핸드폰에 의지하던 습성으로 둘 다 시계를 가져오지 않아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다. 이건 우리뿐만이 아니라 몇 팀이 그런 것 같다. 습관이 참 무서운 거라고 다시 한 번 느끼며 다음엔 시계부터 챙겨야지 생각했다. 더구나 백야현상의 시작으로 낮이 점점 길어진다니 이 땅에서는 도대체 시간을 알 수가 없다. 이 방에 있는 텔레비전에서는 시간도 알려주지 않는다.
내일은 집으로 간다. 그 등치 큰 비행기가 지구 반대편으로 우릴 데려다 줄 것이다. 그리고 또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한 일상이 시작되리라.
(2005.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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