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연일기

2005.07.02 08:43

김학 조회 수:65 추천:9



금연 일기

김학




나는 그 동안 나 자신에 대해서 너무 모른 채 살아왔다. 환갑 진갑이 다 지나도록 나는 나에 대해서 무지했던 것이다. 앞만 보고 달려오느라고 나 자신을 성찰할 기회가 없었고, 깊이 알려고 노력하지도 않았다. 그저 은근히 욕심이 많고 자존심만 강한 사람인 줄만 알았다.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따위의 하여가(何如歌)식 사고방식의 소유자이며, 맺고 끊는 결단력이 없는 연체동물처럼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오늘로서 금연 6개월이 지났다. 아직 대단한 기록은 아니고, 자랑할만한 일도 아니다. 사실 옛날 두 번이나 석 달씩 금연했다가 도로아미타불이 되었던 전과가 있지 않은가? 그때는 천사로 위장한 장난꾸러기의 부추김이 있어서 내가 금연에 실패했다고 변명할 수는 있다. 일주일이면 두세 번 술자리를 함께 하던 장난꾸러기 K선배는 술이 몇 잔 돌아가면 슬며시 담배를 꺼내 권하며 나의 파계를 유혹했었다. 그럴 때 단호하게 거절했어야 하지만 나는 “술 마실 때만 담배를 피워볼까?” 하고 한 발 물러서고 말았다. 그런 일이 잦아지더니 이슬비에 옷 젖듯이 결국 나의 금연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지난해 연말, 그러니까 담뱃값이 오른 2004년 12월 30일부터 담배를 끊었다. 40여 년 동안 하루 2갑 가까이 피우던 담배를 과감히 끊어버린 것이다. 맹자 어머니가 칼로 짜던 베를 싹둑 잘라버렸다는 맹모단기(孟母斷機)의 정신을 본받아 나도 단칼에 담배를 끊어버렸다. 담뱃값을 한 번에 25%나 올린 처사가 못마땅했고, 애연가를 우습게 여기는 풍토에 심한 비애를 느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담뱃값을 한꺼번에 몽땅 올려도 애연가들은 군소리조차 못할 것이라는 당국의 얄팍한 계산이 나의 자존심을 짓밟았다. 그래서 금연을 단행하게 된 것이다.




어떤 이들은 금단현상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런 건 별로 느끼지 못했다. 심심하면 피우던 담배 대신에 은단을 활용했다. 입술이 좀 섭섭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담배를 빼 물었을 때의 그 만족감이 그리웠던 것일까. 내 입술은 담배연기를 빨아들였다가 내뿜던 그 기분을 빼앗겨 섭섭하기도 했으리라.




나는 온 천하에 나의 금연사실을 선포했다. 만나는 이마다 자랑을 늘어놓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이도 있었고, 부러워하는 이도 있었다. 오늘로서 금연 며칠 째라고 광고를 하고 다녔다. 또 스스로 올가미를 하나 더 마련했다. 담뱃값으로 지난해 8월에 태어난 손주 동현이를 위하여 보험을 하나 들었다. 만 5년 동안 매월 11만 9,920원씩을 넣으면 24살 때까지 손주의 건강도 보장받고 학자금도 지원을 받는다니 일거삼득(一擧參得)이 아닌가. 내 핸드폰에 저장해 둔 동현이의 웃는 사진을 보면서 나는 날마다 나의 금연의지를 다지곤 한다.




사실 내가 나 자신에게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날마다 새벽에 눈을 뜨면 담배부터 찾았고, 잠자리에 들 때까지 하루에 두 갑 가까이 피우던 담배였다. 식사 중에도 한 손으로는 담배를 피웠다는 공초 오상순 선생과는 견줄 수 없지만 나도 인근에서는 알아주던 줄담배였다. 거실에는 백반상(白飯床)의 간장종지처럼 언제나 한 가운데 재떨이가 버티고 있어야 했고, 그 재떨이는 하루에도 몇 번씩 비워주어야 했다. 거실에서만 담배를 피운 게 아니라 안방과 사무실에서도 당당히 담배를 피웠다. 돌이켜 생각하니 그 사이 내가 쫓겨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구나 싶다. 우리 집 거실에 있는 세 개의 서랍에는 꼭 예비담배가 한 갑씩 들어 있어야 안심이 되었다. 쌀뒤주에 쌀이 떨어지는 것은 괜찮아도 서랍에 담배가 없으면 그건 곤란한 일이었다. 쌀은 배달이 가능하지만 담배는 배달을 해주지 않은 탓이다. 그러던 내가 담배를 끊었다.




돌이켜 보면 담배를 끊으려고 한방병원에 찾아가 금연침(禁煙鍼)을 맞기도 했고, 피부에 붙이는 미제 패치를 사서 활용하기도 했으며, 금연담배를 피워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결국은 자신의 의지가 문제였다.

금연? 그거 알고 보니 별거 아니었다. 안 피우면 되었다. 나는 금연을 작심하고 집에 보관하던 예비담배와 라이터를 애연가인 아파트 경비원 K씨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K씨의 표정에는 “왕년에 금연선언 안 해본 사람 있나?”하는 듯 심드렁한 미소가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보란 듯 지금도 금연중이다. 아니 앞으로도 금연할 것이다.




내가 애연가였을 때는 길을 가다가 담배 가게 표지판을 보면 처갓집 문패처럼 반가웠다. 그러나 지금은 개 바위 보듯 한다. 마치 이혼한 남편이 길거리에서 전 아내를 만난 기분 같다고나 할까.

내가 금연한다고 했더니 주위 사람들이 금연 후 사흘, 3주, 석 달, 3년을 무사히 넘겨야 한다고 충고했다. 나는 이제 그 마의 석 달을 넘기고 3년을 향해 대장정에 나선 셈이다. 나는 나의 금연사실을 보면서 내가 이렇게 결단력이 있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이 자랑스럽고 떳떳하다. 옛날에는 내가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한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나 자신이 나를 몰라도 너무 몰랐었다. 이제 보니 나도 한다면 하는 사람인 것을.

(2005. 4.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