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의 두 무덤

2005.07.04 02:20

이광우 조회 수:63 추천:7

영월의 두 무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이광우



  영월에는 단종의 무덤 '장릉(莊陵)'과 방랑시인 김삿갓의 무덤이 있다. 단종은 세조 때에 비운으로 숨졌고, 김삿갓은 순조 때 살았던 분으로 400여 년의 시간차가 있다. 단종은 슬픔의 주인공으로, 김삿갓은 비정상적인 삶으로, 이 고장 영월을 명소로 만들었다.


장릉의 곰솔들이 일제히 북쪽(임금님 있는 곳)을 향해 부복하고 있음은 충절의 표시인 것 같아 신기하다. 600년 전 이곳에서 있었던 슬픔과 고난을 기억하고 있음일까? 한편 김삿갓 묘소 부근의 수많은 시비(詩碑)들은 천재시인의 넋을 대하는 기분이다. 오늘 모처럼 이곳을 찾은 우리 일행은 숙연한 자세로 두 곳의 참 뜻을 되새겼다.


  장릉 근처의 솔을 관음솔이라 부른단다. 600년 전 그 옛날에 죄 없는 단종이 겪었던 서러운 세월을 똑똑히 보았을 것이고(觀), 쌓이고 쌓인 한숨 소리(音)를 모두 들었대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잘못한 일도 없고, 영문도 모르는 채, 숙부(叔父)의 정략(政略)에 따라 끌려나오고 시달리고 지치고 괴로웠던 애간장이 녹아난 세월은 길었으리라. 눈물은 얼마나 흘렸으며 한숨은 얼마나 지었을까? 잠 못 이루고 하얗게 지샌 밤도 많았고, 까치가 우는 아침이면 행여나 기쁜 소식 올까 마음 졸였을 날도 많았으리라.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 있고, 다른 한 면은 험준한 절벽으로 되어 있어, 천연감옥인 청령포는 귀양 보낼 곳으로 적격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동력선 한 척이 쉴새없이 관광객을 실어 나른다. 망향탑, 재실, 정자옥, 장릉(단종 능), 관음송, 금표비 등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단종이 한양을 그리며 쌓은 탑이 망향탑(望鄕塔)이고, 사람들의 출입금지 지점에 세웠던 것이 금표비(禁標碑)다. 600년 전의 어린 임금 단종의 혼을 대하듯 숙연해졌다. 17세의 어린 나이로 정쟁(政爭)에 휘말려 비운을 겪어야 했던 단종, 태어날 때에 평탄하지 않을 것을 예상했던 듯, 신하들에게 앞날을 잘 돌봐달라고, 아버지 문종은 운명하면서 유언했다.


  왕의 자리를 노린 수양대군은 황보인 김종서 안평대군을 제거하는 계유정란(癸酉靖亂)을 일으켰고, 영의정 자리를 차지하여 왕위를 압박했다. 단종은 재위 3년 만에 왕의 자리를 양위(讓位)했으며, 사육신(死六臣)들의 복위운동(復位運動) 거사가 사전에 들통 나, 단종은 천리만리 머나먼 영월로 귀양을 왔고, 노산군(魯山君)으로 낮춰 불렸다. 연약한 어린 왕의 고난을 보고 가슴 아파하는 주민들의 심정은 처절했을  것이다. 표나지 않는 속울음도 퍽 울었으리라. 금부도사(禁莩事) 왕방연(王邦衍)은 시조 한 수를 지어 잠 못 이루는 밤을 노래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는지 청령포에 대홍수가 있어 섬 전체가 물에 잠기니 처소를 관풍헌으로 옮겼다. 그 후 풀리리라 기대했던 좋은 소식은커녕 사약을 받으라는 교지가 내려졌다. 강물도 울고, 돌도 나무도 슬피 울었으리라. 어린 왕의 기구한 사연은 사람들의 가슴  가슴에 피멍으로 남았을 것이다.


  역사관(歷史館)에는 사육신들의 처참한 죽음과 일생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심으로 마친 생육신들의 행적을 설명한 자료들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다. 단종의 시신을 한 밤중에 몰래 수습한, 염홍도(廉弘道)의 이야기며, 그 뒤 숙종 때 장릉이란 묘호를 내리고 묘 앞의 장식물도 설치했다는 내용을 알려주고 있었다.            
  장릉부터 2km 떨어진 '김삿갓 유적지'인 와석리 계곡에는 김삿갓(金笠)의 시문(詩文)으로 채워져 있었다. 호는 난고(蘭皐)요 이름은 병연(炳淵)이고, 김삿갓(金笠)은 그 외모로서 지어진 이름이다. 큼직한 바위에다 한시 원문과 해석문을 적어 놓은 것이 수도 없이 많다.
  김삿갓의 조부 김익순(金益淳)은 선천(宣川) 부사였는데 홍경래란(洪景來亂) 때 초기에 투항(投降)했다는 이유로 대역죄에 몰려 처벌받고 가족들은 숨어살다가 풀렸다. 김병연은 홀로 계신 어머님을 모시고 이곳 영월로 와 살았다. 20세 때 영월 관아가 주최하는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는데, 그 내용이 김익순을 호되게 질타하는 내용이었다.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로부터 그 분이 할아버지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그는 인생이 무상함을 통감하며, 벼슬에의 미련을 버리고, 삿갓 하나 쓰고 경향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걸식하며 시 짓는 일로 일생을 마쳤다. 우리 국문이 아니라 한자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각종 시를 불편 없이 지었었다. 문학관에서는 김삿갓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분위기로 꾸며져 있다.
  장릉과 김삿갓 유적지를 통하여, 기구한 운명을 살다간 두 분의 발자취를 더듬고, 상상의 날개를 펴 보았다. 달뜨는 저녁이면 두 분의 영혼이 만나,  추억의 대화를 나누리라. 만약 단종이 서글픈 삶을 살지 않고 평범한 일생이었다면, 또한 김삿갓이 방랑시인으로 빠지지 않고 그의 재주를 활짝 펼 수 있었다면, 오늘의 문화는 더욱 발전하였을 것이다. 그 두 분의 명복을 빌 뿐이다.
(05년 5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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