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뻴하세요
2005.07.24 18:15
씻뻴하세요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유영희
"아줌마! 씻뻴!" 차 뒷좌석에 타고 있던 친구의 아들이 꼬부라진 발음으로 외치는 소리다. 듣기에 영 어감이 좋지 않은 말이다. 아무리 귀를 세워 들어봐도 듣기 거북한 욕처럼 들렸다. 대꾸를 거부한 채 분주한 도로로 차를 몰았다. 다시 한 번 외치는 소리 "아줌마! 씻뻴!" 여전히 나는 묵묵부답으로 운전만 하고 있다. 겉은 태연함을 가장했지만 사실 머릿속은 녀석이 외치는 난감한 언어에 슬며시 부아가 치밀었다. 분명 욕설 같은데……. 이번에는 친구의 딸이 소리를 질렀다. "아줌마! 씻벨하세요." 애들이 단체로 뭔가 항의를 하는 모양인데 하필이면 욕설에 가까운 말을 해댈까?
친구의 딸과 아들은 교포 2세로서 미국에서 나고 자라 한국어보다는 영어가 더 편한 아이들이다. 처음 아이들과 대화를 할 때는 통역으로 친구를 세워야만 하였다. 이젠 익숙해져서 대충 말해도 이해하는데 별 무리가 없다싶었는데 '씻뻴'이란 말 앞에서 그동안 잡았던 소통의 가닥을 다 잃어버릴 판이다. 침묵 시위를 벌이는 나에게 보다 못한 친구가 소리를 지른다. "너! 벨트 매라고 하잖아?" 그때야 '씻벨'은 가닥이 잡혀지고 내 안에서 웃음이 솟아났다. 밀리는 도로에서 마구잡이로 끼어 드는 차들, 신호등이 없는 교차로에서 사정없이 차 머리를 들이미는 기막힌 운전 풍토에 아이들은 이미 기가 질려 있는 상태였다. 차 뒤에 앉아 "오! 마이 갓!"을 수십 번이나 연발하고 있었다.
그나마 아이들 보기에 몸도 불편한 내가 운전을 하는데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았으니 무던히 불안하였던 모양이다. 안전벨트라는 한국말을 모르는 두 아이는 벨트를 착용하라고 "seatbelt(시트 벨트)!"를 절규처럼 외쳤던 것이다. 다급하게 외치는 본토 영어발음이 내 귀엔 영락없는 상스런 욕설로 들렸으니 그때의 난감한 마음이야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온 식구가 단체로 내게 욕을 하는 줄 알았다고 친구에게 말하니 방바닥을 구르며 웃었다. 내 나라 언어도 아닌 말들을 줄줄이 알아듣는 재능이 있다면 오늘날 내가 이 자리에 앉아 있지도 않았을 터이다. 하다 못해 영어회화 강사로 나섰지.
무식을 따지자면 그 쪽이 한 수 높다. 산길을 가다보면 도로나 바위에 큼지막하게 붙어 있는 '낙석주의'라는 글자를 '낙서주의'로 읽어 이런 산 속에까지 와서 낙서를 해대는 몰상식한 사람이 있다고 화를 내던 그들이었다. 그뿐이랴? 은행에 가면 만나는 '순번 대기표'를 보고 이 친구 '순 번데기표'로 해석을 하여 "요즘 한국에서는 은행에서도 번데기를 파나?"하는 의아심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이 우리말을 못 알아듣는 것은 그다지 무식에 속하지 않고 내가 저들의 영어 몇 마디를 못 알아들어 주눅이 든다는 것은 의식에 문제가 있지 싶다.
우리는 세계화 시대에 살고 있다. 거세게 부는 세계화의 바람은 대학을 졸업한 청년들의 직장에도 영향을 끼쳐 영어회화를 어느 만큼 잘 하느냐에 따라 취업의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한다. 집 안에 들어앉아 살림이나 하며 한글 자판을 두들기는 글쟁이 주제에 대세라는 거대한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지만 뭔지 배알이 꼬이는 날이다. 여긴 분명한 내 나라 한국 땅인데 이곳에서마저 못 알아듣는 영어로 기가 죽어야 한다는 건 말이 아니다. 아이들은 잘 통하지 않는 나와는 토막대화를 나누다가 어쩌다 회화에 능통한 사람을 만나면 물 만난 고기처럼 떠들어댄다. 시끄럽기만 한 영어로.
발동한 오기는 우리나라 동화책을 구입하여 읽기를 시켰다. 제대로 된 발음이 아니면 몇 번을 지적하여 원하는 발음이 나와야 통과를 시켜 주었다. 가는데 마다 간판을 읽으라는 희한한 작업을 시키니 아이들 얼굴에 슬며시 짜증이 인다. 친구에게 읽어보라고 시켜도 흡족한 한국 발음이 아니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나고 자랐다지만 너는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온 주제에 한국말도 제대로 못 읽니?" 버럭 소리를 지르니 친구는 다시 또박또박 글자를 읽어 간다. "그래! 너만은 한국에 오면 한글로 쓰여진 글자는 미국식으로 읽지 말고 제대로 읽어야지!" 기를 쓰고 부렸던 억지가 벌써 2년 전부터다.
얼마 전 한국에 다니러 온 친구가 대형 빌딩 앞에 쓰여진 영어 문구를 한국식 발음으로 읽었다. 20년이 넘게 살아 온 미국식 발음을 접고 억지로 '콩글리쉬'를 하는 모습이 더없이 우스웠다. 그러나 어찌하랴? 그 앞에서 내 마음은 마치 미국을 이긴 듯한 승리감이 찾아 들었던 것을. (2005. 7.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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