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름밤의 음악분수 쇼

2005.08.01 10:08

장병선 조회 수:42 추천:8

한 여름밤의 음악 분수 쇼

                                    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야) 장 병 선


  30도가 넘는 찜통 더위다. 해가 서산에 넘어가도 무더위는 지칠 줄 모르고 대낮의 열기를 열대야에게 바통을 넘긴다. 저녁 식사 후 더위를 피해 덕진공원을 찾았다. 울창한 숲이 시원하게 맞아주었다. 덕진연못은 만 평이 넘는다. 연못 중심부를 가르는 긴 현수교는 조금씩 출렁거려 걷기에 재미가 있다. 연꽃은 은은한 향기를 바람에 실어 사방으로 나른다. 주인과 같이 산책 나온 강아지에게도 향기를 나눠준다. 커다란 연잎은 엊그제 장맛비에 놀라 아직도 접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노르스름하게 익어 가는 연밥은 두툼한 지갑으로 보였다. 가을이 오면 할아버지가 더위를 견딘 손자들에게 용돈으로 줄 쌈지로도 보였다.


"야 신난다, oo아 사랑해!" 다리기둥의 공간에는 삐뚤삐뚤 쓰여진 낙서가 수줍게 누워있다. 좋아한다는 말을 용기가 없어 직접 못하고 기둥에 낙서로 하소연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데 언제 썼을까. 그런 용기라면 정성들여 핑크색 노트에 편지로 써 보내면 어떨까. 아니면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보내도 좋았을 텐데……. 어쩌면 즉흥적으로 낙서를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공원의 불빛이 하나 둘씩 밝아질 때 분수대 주변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둡던 호수 저편 물 위에는 불빛들이 서로 어울려 청사초롱이 되어 흔들리고 있었다. 갑자기 ‘야아!’ 하는 환호성에 연못을 바라보니 음악분수 쇼가 시작되었다. 밤 9시, 빨강 색과 초록색의 조명을 받으며 하늘로 쏘아대는 분수 쇼는 우리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올망졸망 걸어가는 아이들의 발걸음도 분수대를 향해 모여들었다. 우리일행은 분수대 가까이 다가가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았다. 분수는 찾아온 시민에게 글자를 써 보였다. V, X, Y, O, J자를 하얀 물줄기에 조명으로 색채를 입혀서 순식간에 썼다가 서서히 지우며 보는 이에게 알파벳 공부를 시키는 것 같았다.


분수대의 물줄기는 점점 힘을 받아 높아지며 각종운동경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분수의 가운데에서는 힘차게 권투 선수의 글러브가 공중을 향해 펀치를 뻗고 있었다. ‘나비처럼 날아와 벌처럼 쏜다’는 권투의 영웅 알리의 주먹처럼 보였다. 스트레이트와 더블펀치를 번갈아 가며 어느 때는 어퍼컷을 구사하는 모습이다. 한 시대의 권투 영웅도 세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얼마 전 TV에 비친 알리의 모습은  파킨슨씨병과 싸우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고 있었다.  알리의 딸이 프로복싱에 뛰어들어 여성 챔피언이 될 때 관람석에서 엷은 미소를 띠고 응원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스포츠에서 영원한 승자는 있을 수 없다. 개개인의 평가도 시간이 지나면 달라진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어떠한 일이든 주어진 여건에서 얼마나 최선을 다했느냐가 중요하다. 세월이 흐르면 지나간 추억을 더듬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기에 젊어서부터 다양한 추억을 많이 만들어야 훗날 늙어지면 회상거리가 많아질 것이다.


분수는 물줄기에게 달리기 경주를 시키고 있었다. 육상경기의 기본은 스타트에 있다. ‘땅’ 소리와 동시에 총알처럼 튀어 나가는 물줄기는 100m세계 신기록 보유자 모리스 그린의 9초79의 스타트와 같아 보였다.



분수대에서는 여러 가지 육상경기가 벌어지고 있다. 멀리뛰기 경기도 잘한다. 그랑프리 육상대회에서 미국의 필립스가 8.14m로 멀리뛰기에서 우승했는데 이곳 분수는 10m도 넘게 뛰겠다. 새처럼 나르는 장대높이뛰기는 순간 하늘로 치솟아 포물선을 짧게 그으며 잘도 넘는다. 장대 짚고 가장 높이뛰기를 잘하는 러시아 보브카의 6m 기록도 거뜬히 넘을 듯싶다. 올림픽에서 은메달에 머물었던 뜀틀의 여홍철도 덕진 연못의 분수대를 진작 보았더라면 잠자리처럼 살포시 착지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았을까.



분수대에서 하는 경기는 빨강 색과 초록색의 조명을 받으며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무더위에 지친 관객을 시원하게 해준다. 물줄기는 금메달에 연연하지 않는다. 출전한 모든 선수가 매너 상을 받아야할 것 같다. 우리 일상생활도 작은 이해관계에 따라 다투지 않고 선의의 경쟁을 하는 분수대의 물줄기와 같았으면 좋겠다. 한 여름 밤의 무더위 속에서 하늘을 향한 20여분의 분수 쇼는 더위를 잊는데 안성맞춤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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