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코스와 아이들
2005.09.04 17:34
코스모스와 아이들
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야) 권영숙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한낮의 더위는 물론이고 열대야에 시달리며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여름날의 기억은 벌써 잊혀진지 오래다. 가을을 재촉하듯 밤새 내린 비 때문일까. 둘레의 산들이 뿌연 안개에 휩싸여 한 폭의 동양화가 되어 다가온다. 길 양옆에 피어있는 가느다란 코스모스들이 성큼 다가온 가을을 느끼게 하는 아침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인적이 끊겨 기억조차 희미한 길을 따라 학교에 다녔다. 가깝고도 편한 큰길이 있었지만 멀리 돌아서 다니는 방천 둑 좁은 길은 우리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봄이면 둑 언덕에 엎드려 살며시 고개 내민 쑥을 뜯으며 다녔다. 달짝지근한 물을 머금고 막 올라온 삐비(띠 풀)를 한 움큼씩 뽑아 하나 하나 까먹으며 집으로 오곤 하였다. 여름이면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냇가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고 다이빙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해야 내팽개쳐졌던 가방을 들고 귀가를 서둘렀다. 끝없이 이어진 코스모스 길을 따라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을 하늘을 맴돌며 자유로운 비행을 즐기는 고추잠자리만큼이나 행복했다.
해마다 초여름이면 반 별로 배정된 방천 둑길에 코스모스를 심었다. 학교에 가고 오면서 다른 반 코스모스 보다 잘 자라도록 물도 주고 풀을 뽑아주며 열심히 가꾸었다. 긴 여름방학을 지내고 처음 학교에 나오던 날에는 우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던 코스모스가 제일 먼저 반겼다. 오늘처럼 안개가 짙게 낀 날 아침이면 함초롬히 이슬 머금고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던 코스모스였다.
코스모스는 색깔에 따라 꽃말도 다 다르다.
'흰색은 사랑을 아시나요, 분홍색은 사랑을 찾았어요, 검붉은 색은 사랑에 빠졌어요.'란다.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넣어 만들었겠지만 수줍은 듯 가냘픈 코스모스에 참 잘 어울리는 말이구나 싶다.
어릴 적 가을이 다가 오면 코스모스 꽃은 우리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지금의 꽃말처럼 사랑이야기가 아니었다. 가을 운동회를 앞두고 청군과 백군이 이기고 지는 것을 점치는 아주 중요한 꽃이었다. 코스모스 꽃 색에 따라 그 해의 청군 백군 승패가 좌우된다고 믿었던 때였으니까. 흰색 코스모스가 많이 피는 해는 백군이 이기고 분홍이나 검붉은 색 코스모스가 많이 피면 청군이 이긴다고 믿었다. 그 일 때문에 가을이 시작되는 길목에서 우리들은 항상 작은 다툼이 있었다. 흰색 꽃이 많다거나 분홍 꽃이 많다는 둥 항상 자기편 꽃이 많다고 목소리들을 높였다.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길을 따라 꽃송이를 세다보면 어느새 학교가 보이곤 하였다.
먼 이국 땅에서 와서 그럴까. 코스모스는 늘 먼 곳을 발돋움하며 그리움에 목말라 한다. 가느다란 목과 작은 바람결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은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에 더 잘 어울린다. 우리말로 '살사리꽃'이라고 부른다는데 코스모스는 역시 코스모스라는 이름이 더욱 어울린다. 신(神)이 가장 먼저 습작으로 만든 꽃이 바로 코스모스라 했던가. 그래서인지 연약한 여인처럼 가냘프고 안쓰럽다. 하지만 그 연약함 때문에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나부끼며 군무를 추는 코스모스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그리움을 하나씩 안겨 준다.
누군가가 정성 들여 가꿔놓은 꽃길은 많은 사람들에게 환한 미소를 짓게 한다.
어느 깊은 산중에서 생활하던 시인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시인에게 배달되는 한 통의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 몇 시간씩 걸어 가야하는 우편배달부가 불만을 터뜨렸다. 시인은 그걸 눈치 채고 배달부가 편지를 전해주고 갈 때마다 몇 알의 씨앗을 손에 들려주었다. 가는 길에 뿌리고 가라고. 아무 생각 없이 길에 뿌렸던 씨앗이 갖가지의 꽃으로 활짝 피어났다. 이젠 편지 한 통을 주기 위해 몇 시간 씩 걷는 그 길이 힘들고 지루한 게 아니라 아름다운 꽃을 보는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었다. 아름다운 꽃길이 그의 마음을 예쁘게 변화시킨 것이다.
요즘에는 잘 가꾸어진 꽃길을 만나기가 어렵다.
대문만 나서면 무딘 가슴을 설레게 하고 감상에 빠지게 했던 가을의 꽃 코스모스가 언제부터인지 우리 주변에서 차츰 사라지고 있다. 그나마 좁은 자리를 비집고 생명을 부지하고 있던 코스모스들이 잦은 비로 인해 잘 자라지를 못하고 이가 빠진 아이들 입 속처럼 듬성듬성 서 있었다. 잘 가꾸어 놓은 꽃길을 지나며 누군가가 행복한 미소를 짓겠지 하는 생각에 꽃길을 가꾸던 예쁜 마음씨들이 조금씩 사라져 버리지 않았나 싶다. 내년에는 우리아이들과 아름다운 꽃길을 가꿔봐야겠다. 씨앗을 뿌리는 즐거움과 기다림, 환한 꽃이 안겨주는 행복을 느끼게 하고 싶다.
코스모스는 잊혀져 가는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을바람에 실어 나른다.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의 파란 잎줄기 속에는 뙤약볕에 더위를 잊은 채 운동회 연습을 하던 까무잡잡한 아이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예쁜 코스모스 꽃송이 속에서는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넓은 운동장을 누비던 올망졸망한 아이들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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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대평생교육원 수필창작(야) 권영숙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다.
한낮의 더위는 물론이고 열대야에 시달리며 쉽게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여름날의 기억은 벌써 잊혀진지 오래다. 가을을 재촉하듯 밤새 내린 비 때문일까. 둘레의 산들이 뿌연 안개에 휩싸여 한 폭의 동양화가 되어 다가온다. 길 양옆에 피어있는 가느다란 코스모스들이 성큼 다가온 가을을 느끼게 하는 아침이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는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인적이 끊겨 기억조차 희미한 길을 따라 학교에 다녔다. 가깝고도 편한 큰길이 있었지만 멀리 돌아서 다니는 방천 둑 좁은 길은 우리들에게 많은 즐거움을 안겨 주었다. 봄이면 둑 언덕에 엎드려 살며시 고개 내민 쑥을 뜯으며 다녔다. 달짝지근한 물을 머금고 막 올라온 삐비(띠 풀)를 한 움큼씩 뽑아 하나 하나 까먹으며 집으로 오곤 하였다. 여름이면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냇가에 들어가 물장구를 치고 다이빙을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해야 내팽개쳐졌던 가방을 들고 귀가를 서둘렀다. 끝없이 이어진 코스모스 길을 따라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을 하늘을 맴돌며 자유로운 비행을 즐기는 고추잠자리만큼이나 행복했다.
해마다 초여름이면 반 별로 배정된 방천 둑길에 코스모스를 심었다. 학교에 가고 오면서 다른 반 코스모스 보다 잘 자라도록 물도 주고 풀을 뽑아주며 열심히 가꾸었다. 긴 여름방학을 지내고 처음 학교에 나오던 날에는 우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던 코스모스가 제일 먼저 반겼다. 오늘처럼 안개가 짙게 낀 날 아침이면 함초롬히 이슬 머금고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던 코스모스였다.
코스모스는 색깔에 따라 꽃말도 다 다르다.
'흰색은 사랑을 아시나요, 분홍색은 사랑을 찾았어요, 검붉은 색은 사랑에 빠졌어요.'란다. 사람들이 자신의 감정을 넣어 만들었겠지만 수줍은 듯 가냘픈 코스모스에 참 잘 어울리는 말이구나 싶다.
어릴 적 가을이 다가 오면 코스모스 꽃은 우리들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지금의 꽃말처럼 사랑이야기가 아니었다. 가을 운동회를 앞두고 청군과 백군이 이기고 지는 것을 점치는 아주 중요한 꽃이었다. 코스모스 꽃 색에 따라 그 해의 청군 백군 승패가 좌우된다고 믿었던 때였으니까. 흰색 코스모스가 많이 피는 해는 백군이 이기고 분홍이나 검붉은 색 코스모스가 많이 피면 청군이 이긴다고 믿었다. 그 일 때문에 가을이 시작되는 길목에서 우리들은 항상 작은 다툼이 있었다. 흰색 꽃이 많다거나 분홍 꽃이 많다는 둥 항상 자기편 꽃이 많다고 목소리들을 높였다.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길을 따라 꽃송이를 세다보면 어느새 학교가 보이곤 하였다.
먼 이국 땅에서 와서 그럴까. 코스모스는 늘 먼 곳을 발돋움하며 그리움에 목말라 한다. 가느다란 목과 작은 바람결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은 스산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에 더 잘 어울린다. 우리말로 '살사리꽃'이라고 부른다는데 코스모스는 역시 코스모스라는 이름이 더욱 어울린다. 신(神)이 가장 먼저 습작으로 만든 꽃이 바로 코스모스라 했던가. 그래서인지 연약한 여인처럼 가냘프고 안쓰럽다. 하지만 그 연약함 때문에 바람 부는 대로 이리저리 나부끼며 군무를 추는 코스모스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에 그리움을 하나씩 안겨 준다.
누군가가 정성 들여 가꿔놓은 꽃길은 많은 사람들에게 환한 미소를 짓게 한다.
어느 깊은 산중에서 생활하던 시인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시인에게 배달되는 한 통의 편지를 전해주기 위해 몇 시간씩 걸어 가야하는 우편배달부가 불만을 터뜨렸다. 시인은 그걸 눈치 채고 배달부가 편지를 전해주고 갈 때마다 몇 알의 씨앗을 손에 들려주었다. 가는 길에 뿌리고 가라고. 아무 생각 없이 길에 뿌렸던 씨앗이 갖가지의 꽃으로 활짝 피어났다. 이젠 편지 한 통을 주기 위해 몇 시간 씩 걷는 그 길이 힘들고 지루한 게 아니라 아름다운 꽃을 보는 즐거움으로 바뀌게 되었다. 아름다운 꽃길이 그의 마음을 예쁘게 변화시킨 것이다.
요즘에는 잘 가꾸어진 꽃길을 만나기가 어렵다.
대문만 나서면 무딘 가슴을 설레게 하고 감상에 빠지게 했던 가을의 꽃 코스모스가 언제부터인지 우리 주변에서 차츰 사라지고 있다. 그나마 좁은 자리를 비집고 생명을 부지하고 있던 코스모스들이 잦은 비로 인해 잘 자라지를 못하고 이가 빠진 아이들 입 속처럼 듬성듬성 서 있었다. 잘 가꾸어 놓은 꽃길을 지나며 누군가가 행복한 미소를 짓겠지 하는 생각에 꽃길을 가꾸던 예쁜 마음씨들이 조금씩 사라져 버리지 않았나 싶다. 내년에는 우리아이들과 아름다운 꽃길을 가꿔봐야겠다. 씨앗을 뿌리는 즐거움과 기다림, 환한 꽃이 안겨주는 행복을 느끼게 하고 싶다.
코스모스는 잊혀져 가는 내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가을바람에 실어 나른다.
하늘거리는 코스모스의 파란 잎줄기 속에는 뙤약볕에 더위를 잊은 채 운동회 연습을 하던 까무잡잡한 아이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있고, 예쁜 코스모스 꽃송이 속에서는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넓은 운동장을 누비던 올망졸망한 아이들의 함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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