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2005.09.15 16:00

권영숙 조회 수:50 추천:3

벌초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야간) 권영숙


아버님! 시원하시죠?
벌초를 마친 남편이 소주 한 잔을 부어놓고 절을 하며 한 마디 했다. 우리 부부말고도 벌초를 하기 위해 산을 찾은 사람들이 많은지 이 산 저 산에서 요란한 기계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의 그림자조차 구경하기 힘들었던 깊은 산 속에서 오랜만에 사람 냄새가 물씬 풍겼다.

친정아버지는 내가 대학졸업을 앞둔 해에 돌아가셨다. 약주 즐겨하시고 운동 좋아하셨던 분인데 어느 날 암 선고를 받으시고 6개월 동안 병마와 싸우다 끝내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러니 남편은 장인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새로 맞이하게 될 사위들은 술 한 잔씩 나눌 줄 알아야 딸 준다고 농담반 진담반 하셨는데 막내 사위의 술 한 잔 받지 못하고 그리 가셨다. 그래서인지 벌초 뒤에는 꼭 약주를 따라 드렸다.

매년 이 때쯤이 되면 남편은 친정아버님 산소에 들른다. 남들이 벌초를 시작하기 전에 그 근방에선 제일 먼저 해 드린다. 물론 친정아버님에게도 아들이 둘씩이나 있긴 하지만 멀리 있어 오가는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남편이 도맡아 하게 된 지 벌써 여러 해째다.

아버님 산소에 벌초하러 간다며 혼자 나가는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강한 햇빛이 쏟아지는 이런 날, 선뜻 따라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침저녁 시계추 마냥 바쁘게 생활하다보니 좀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하지만 얼굴도 모르는 장인어른을 만나러 간다니 나도 그냥 있을 수 없었다. 얼린 물과 이 것 저 것 간식거리를 챙겨들고 따라 나섰다. 조상 님들의 묘를 손질하기 위한 행렬인지 어딘가에서 달려오고 있을 가을을 맞이하기 위함인지 도로에는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따라나서는 마음은 심란했으나 차를 몰고 또 다른 공간을 향해 달리다보니 가벼운 설렘이 일었다. 놀러 가는 것도 아닌데…….
  
남편은 기계를 닦고 여기 저기 손질을 하더니 풀을 깎기 시작했다. 영글어 가는 곡식에게는 더 없이 고마운 햇빛이겠지만 나는 그를 피할 나무 그늘부터 찾았다. 적당한 나무를 찾아 몸을 기댔다. 어디에서 벌 한 마리가 날아와 아직 준비하지 못한 먹이를 찾아 바쁘게 움직였다. 여름 내내 불렀어도 못 다 부른 노래가 있는지 매미가 아쉬움을 담아 마지막 목청을 돋우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파란 하늘에 눈길이 머물렀다.

명절이 다가오면 나는 아버지를 따라 이발소에 갔다. 키가 작은 나는 어른들이 앉는 의자에 나무판 의자를 올려놓고 앉았다. 이발소 아저씨는 내 어깨에 흰 무명 헝겊을 둘러주고는 이내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지금처럼 머리모양을 내 맘대로 개성 있게 선택하는 게 아니었다. 물어 볼 것도 없이 가위질부터 시작했다. 그 때 아이들은 어디에서 머리를 깎든 붕어빵 틀에서 붕어빵이 나오듯 똑같은 머리 모양이었다. 이마를 살짝 덮고 반듯하게 자른 짧은 앞머리에 뒷머리는 뒤 꼭지의 반 정도만 내려올 정도로 바짝 치켜올린 상고머리였다. 지금 사진을 보면 영 촌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지만 옆에서 지켜보시던 아버지는 우리 막내 딸 참 야무지고 예쁘다라는 말씀을 빼놓지 않으셨다.

풀을 깎는 일에 정신 없는 남편을 보며 나도 거들어야겠다 싶어 갈퀴를 들었다. 머리가 반  정도 벗겨지신 아버지는 몇 안 되는 머리칼을 항상 깔끔하게 빗어 넘기고 이발도 자주 하셨다. 지금은 고작해야 1년에 한두 번 이발을 시켜드리니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남편이 베어놓은 풀을 갈퀴로 긁어모으며 내 어깨에 내려앉던 머리카락을 쓸어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귀, 목둘레, 옷 속까지 파고들었던 머리카락을 꼼꼼하게 털어 주시던 아버지의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무성하던 풀이 칼날에 힘없이 쓰러지며 풍기는 풀 냄새는 고향의 냄새였다. 햇빛은 여름을 닮았지만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은 가을을 담고 있었다.

요즘은 손수 벌초를 다니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한다. 생활반경이 달라진 이유도 있고, 바쁜 일상이기에 시간내기가 어렵단다. 그래서 지금은 벌초대행업체가 대목을 맞았다고들 한다. 몇 만 원만 주면 전문가의 손놀림으로 뚝딱 끝내버리니 여간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추석을 앞두고 꼬박 2주 동안 벌초를 했다. 사촌들이 함께 하자고 날짜를 잡았지만 멀리서 오기 번거롭다며 남편 혼자 다하는 모습이 안쓰럽다. 우리도 내년에는 벌초 대행업체에 맡겨 보자고 넌지시 꺼내봤다. 물론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지만 힘들어 보이는 남편을 위해 해본 소리임을 알 것이다. 몸은 뻐근하지만 노동이 아니라 즐거워서 하는 일이라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하다니 더는 말리고 싶지 않다.

석양이 뉘엿뉘엿해서야 짐을 챙겨 들고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던 길에 잠시 돌아서서 바라보니 말끔하게 단장된 아버지산소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어두운 길 조심해서 가라고 손짓이라도 하시는 듯하였다.
  
돌아가신 분의 산소에 와서 이렇게 정성껏 이발을 시켜드리고 묘를 보살피듯 살아생전에 지금의 반만 했어도 후회스럽지 않을 텐데……. 오늘은 곁에 계신 것만으로도 행복한 살아 계신 부모님들께 따스한 사랑의 말 한 마디라도 전해 드려야겠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154 천년 은행나무 앞에서 조종영 2005.11.07 84
153 널뛰기 권영숙 2005.11.06 66
152 사선대 가는 길 김인순 2005.10.27 78
151 세월의 강 김영옥 2005.10.26 74
150 씨와 밭 김영옥 2005.10.08 69
149 조손친교 2박3일 김학 2005.10.05 83
148 아주 잘 지냄 이금주 2005.10.02 90
147 이 가을에는 서순원 2005.09.29 61
146 추억의 곰소항 송기옥 2005.09.27 65
145 별 헤는 밤 정현창 2005.09.26 97
144 숟가락 방랑기 정현창 2005.09.23 65
143 보따리 사랑 한경선 2005.09.23 69
142 이목구비 정현창 2005.09.20 70
141 융수현에서의 3박4일 박선배 2005.09.19 65
140 시간여행 이양기 2005.09.17 60
139 옛날 추석 요즘 추석 김학 2005.09.16 133
» 벌초 권영숙 2005.09.15 50
137 코뚜레 정현창 2005.09.14 69
136 대전법원의 가을편지 이은재 2005.09.12 239
135 우리 집 공 씨들 이금주 2005.09.12 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