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곰소항

2005.09.27 16:56

송기옥 조회 수:65 추천:9

추억의 곰소항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고) 송기옥


내 고향 변산반도는 아름다운 산과 쪽빛바다가 어우러져 바라만 보아도 시심(詩心)이 절로 솟는다. 줄포만 입구에 있는 곰소(熊沼=곰 웅덩이=깊다는 뜻)항은 칠산 바다로 통하는 고슴도치 섬 위도의 중간 기착지였다. 하루에도 수십 척의 통통배와 중선배가 드나들어 조기며 삼치, 박대, 갈치, 우럭 등 온갖 생선이 흔전만전하였고, 싱싱한 그 생선들을 인근 도시까지 트럭으로 실어 나르던 항구였다. 어디 그뿐인가? 수십만 평이나 되는 곰소염전에는 눈 같은 하얀 소금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젓갈 담글 때와 갓 잡아온 생선을 얼간할 때 쓰이는 천일염 생산지이기도 했다. 아담하고 정겨운 포구이며 맛좋은 젓갈 생산지로 전국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난생 처음 가을 수학여행으로 변산의 명승지인 내소사와 직소폭포, 월명암 낙조대, 말만 들었던 곰소항을 처음 가봤다. 넘실거리는 바다와 그 물결위에 떠있는 집채만큼 큰 중선 배의 돛대가 어찌나 높던지 고개를 젖혀 바라보며 감탄했던 적이 있었다. 수많은 갈매기는 끼룩끼룩 내 머리 위를 훌훌 날아다녀 손을 내밀면 금방이라도 잡힐 것만 같았다. 바다 한 가운데에 떠있는 등대도 처음 보았고, 파도에 잠길 듯 말 듯한 작은 통통배가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고기를 싣고 곰소 항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너무도 아슬아슬 했다.
배에서 금방 내린 펄펄 뛰는 생선을 한 가운데에 놓고 삐-잉 둘러선 어판장 아저씨들은 알아듣지도 못할 콧소리 나는 벙어리 흉내와 손가락 신호 등 볼거리가 많아 넋을 잃었다. 친구들이 안보여 한참 헤매다가 뒤늦게 합류하는 통에 선생님한테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새롭다.  
곰소항은 부안읍내 어물전보다 우리 집에서 배나 더 먼 곳이지만 싱싱한 생선과 바다, 갈매기와 비릿한 생선냄새의 매력에 빠질 수 있어서 좋은 곳이다. 나는 바닷바람을 쏘이며 40여 년 전 나만의 추억을 회상하고자 가끔 곰소항을 찾는다.
젊어서부터 여섯 딸과 함께 장사를 하는 김씨 할머니는 40여 년 전만 하여도 새벽 버스가 드물어 곰소에서 40리길 머나먼 부안읍내 생선전까지 생선 한 광주리를 이고 걸어 다니며 장사를 했던 분이다.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터라 단골이 되어 갈치 몇 마리를 사면 싱싱한 오징어 한 마리를 덤으로 담아주는 후한 인심의 소유자다.


  기철이 형님은 30여 년 전 전라남도 고흥을 떠나 곰소항에 정착하더니 부둣가에서 작은 선구점을 차려 돈을 벌었다. 그리하여 정읍에다 집도 사고 남매를 곱게 키워 제2의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가까운 일가친척이 없어 외로웠는데 종씨인 나를 만나게 되었다. 지난봄에는 인사차 들렀더니만 형수님이 알 밴 주꾸미를 몇 묶음 사서 들려주기도 했다. 기철이 형님과 나는 형제처럼 지내는 터라 부둣가를 한 바퀴 돌다가 인사차 꼭 들르곤 한다.



위도와 연락선이 오 갈 때는 외지손님이 빈번하게 드나드는 곰소에서 돈 자랑 말라는 말까지 유행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연락선의 뱃고동소리마저 끊겼다. 요즘 같은 여름철이면 비브리오균 때문에 생선회가 안 팔려 횟집마다 코를 골고 있어 예전의 곰소항이 아니다. 찬바람이 불면 부둣가에 야외 탁자와 의자도 몇 개 놓고 파도와 갈매기를 벗 삼는 즉석 횟집을  차린다면 곰소항의 새로운 명물이 되지 않을까? 텅 빈 부둣가 널빤지위에 장대, 서대, 박대가 배를 벌리고 누워서 일광욕을 즐기고 있다. 통통한 기름진 갯장어도 3복 염천의 태양열기에 쭈그러진 통나무가 되어버렸다. 시끌벅적하던 예전 어판장의 경매광경도 볼 수 없고 썰렁한 어판장 한쪽에 좌판을 벌여놓고 조개도 까고 개불에게 새 물을 갈아주는 60쯤 되어 보이는 여인네와 외간 남정네들 사이에 거친 농담만 오간다. 아마도 저 여인의 남편은 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칠산 바다의 거친 풍랑에 먼저 떠나보내고 홀로 사는 과부 생선장수가 아닐까 싶다. 멍하니 선창가 빈 배와 간간이 떠다니는 갈매기, 바다건너 희미한 선운산을 바라보고 지나간 추억에 잠겨 있는데  아내는 어서 가자고 재촉한다. 아내의 양손에는 생선 꾸러미가 들려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한낮의 이글거리는 태양도 석양이 되니 식어 간다. 저녁노을이 하도 아름다워 바닷길 드라이브 코스를 달렸다. 내소사 입구를 지나 까치등이 고갯마루 소나무 가지 사이로 스쳐가는 경관은 오늘따라 더 환상적이다. 차창을 여니 짭조롬한 바닷바람이 시원스럽게도 파고든다. 수평선 가까이에 붉은 보석 같은 둥그런 태양이 선명하게도 걸려 있다. 저 멀리 위도군도가 한눈에 들어온다. 서해 페리호의 참사로 죽어간 원혼들이 저 붉은 태양과 함께 매일 저녁 무렵이면 바닷물 속으로 지고 또 지리라.
나는 지금 타임머신을 타고 40여 년 전 어린 소년시절의 추억 속에 묻혀있다. 하늘과 바다가 온통 붉게 물든 저녁노을에 취해 흐느적거리는 것 같다. (99.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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