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은행나무 앞에서

2005.11.07 17:09

조종영 조회 수:84 추천:9

천년 은행나무 앞에서
전북대학교 평생대학원 수필창작과정(야) 조종영


가을이 맛깔스럽게 무르익었다. 길가에도, 마을에도, 높고 낮은 산에도 온통 단풍으로 곱게 물들었다. 성급한 떡갈나무의 낙엽은 이미 지고 겨울 준비를 먼저 끝냈다. 가을은 속 깊은 여인과 같다. 화려한 아름다움이 있는가하면 은은한 향기와 지성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외로움과 공허함이 따라 온다.
가을은 교만하지도 경망스럽지도 않다. 낙엽 진 오솔길을 걸으며 나를 다시 보는 정심(淨心)의 시간을 갖게 하는 계절이다.

매년 11월 첫째 주말은 우리집안 시제를 올리기로 정해져 있다. 올해도 두 분 형님과 가까운 일가가 모여 시제를 지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살다 가신 분들이다. 뿌리가 무엇인지 일상사(日常事)에서 조상을 기리는 일들은 오랜 세월 이어져왔다.
예전과 달리 요즘은 남의 일에는 관심 없는 세상이다. 누가 자기조상 안 모신다고 손가락질 할 사람도 없는데, 그 풍속이 계속 이어지는 것은 그만큼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어제 저녁 시제문제로 작은 형수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건강이 좋지 않으신 형님 걱정으로 마음이 착 갈아 앉아서인지 목소리가 힘이 없고 우울하게만 들렸다. 형님은 작년 말에도 에베레스트산을 6,200M까지 등정을 하셨는데, 얼마 전부터 안면신경 경련으로 고생하신다.
내게는 위로 누님들 외에 두 분의 형님이 계신다. 60대 중반을 넘으셨으니 건강에 각별한 관심이 필요한 연세들이시다. 작은 형님은 항상 건강에 자신했는데 갑작스런 병마에 그만큼 충격도 크신 것 같다. 시제가 끝난 후, 3형제 내외가 함께 하기도 쉽지 않으니 기분도 전환 할 겸 그리 멀지 않은 천태산(天台山) 영국사(寧國寺)에 가자고 제안했다.
천태산은 충북 영동군 양산면에 위치한 해발 714M되는 경관이 아름다운 작은 산이다. 묘목산지로 유명한 옥천군 이원에서 무주로 연결되는 501번 지방도로를 따라 15KM정도 가면 입구를 알리는 안내판이 서있다. 이미 낯익은 곳인데 몇 년 동안에 몰라보게 개발되었고, 토요일이라 그런지 관광버스와 승용차가 넓은 주차장을 거의 채우고 있었다.

천태산으로 들어가려면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3단 폭포를 지나 작은 고개를 하나 넘어 산길로1.4KM 정도 걸어야 한다. 양산8경의 첫 번째라는 이곳은 등산로가 길지 않으면서도 기암괴석과 암벽지역을 등반하는 재미가 있어 유명하다. 천태산은 능선 끝자락의 아늑한 곳에 영국사라는 신라시대 고찰을 품에 안고 있다. 그리고 사찰의 언덕 아래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수령 1,000년의 은행나무가 웅장한 자태로 태산같이 서있다.
영국사는 신라 문무왕 때 원각국사가 창건하여 조선의 고종 때에 중건한 1,300여 년 된 고찰이다. 신라 효소왕이 피난하였고, 고려시대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몽진했다고 한다. 절에 있는 큰 나무의 수령은 통상 사찰의 역사와 함께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 은행나무의 수령도 1,300년에서 600년까지 그 추정이 다양하다.
영국사가 보이는 고개에 올라서니 눈앞에 밝고 환한 노란 은행잎이 눈 안에 확 들어왔다. 천년 된 이 은행나무는 높이가 31M이고, 가슴둘레가 11M이며 22~25M의 가지가 사방으로 뻗은 대단한 거목이다. 이 나무는 가지 하나가 땅으로 내려와 뿌리를 내리고는 다시 위로 뻗어 올라간 기이한 부분도 있다.

노목(老木)은 아직도 무성한 가지와 잎을 피우며 변함 없는 청춘을 자랑하고 있다. 때마침 단풍이 절정을 이루어, 은행나무의 샛노란 잎은 땅을 덮고 하늘에 치솟아 온통 노란색 동산을 만들고 있었다. 가을 단풍의 아름다움을 꼽으라면 단연 은행나무와 단풍나무가 두드러지지 않던가. 단풍나무가 화려한 아름다움을 제일로 자랑한다면, 은행나무의 단풍은 우아하고도 밝은 마음을 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는 천년의 노령(老齡)에도 우아한 모습으로 가을의 멋을 한껏 부리고 있는 거목 앞에서 오직 경탄과 숙연해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저 은행나무는 그 오랜 세월을 모진 풍상과 민족의 소용돌이치는 역사를 보고 겪으며 견디어 오지 않았는가.
헐벗고 굶주리고 무참히 도륙당하고, 사람이 인육을 먹었다는 끔찍한 시대를, 그는 깊고 넓은 가슴으로 의연히 품은 채 말이 없다. 얼마나 견디기 힘든 인고(忍苦)의 세월을 말없이 살아 왔던가. 오죽하면 나라에 큰일이 있을 때는 이 나무가 운다고 할까. 아마도 그것은 더 이상 민족의 수난을 참을 수 없어 나오는 고통의 신음소리였을 게다. 은행나무는 가슴에 담아둔 그 오랜 세월의 숱한 이야기들을 노란 미소로 대신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한국인의 평균수명 연장속도가 놀랍도록 빨라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아무리 수명이 길어진다 해도, 사람은 100년도 되지 않는 인생을 살뿐이다. 누구나 오래 산다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건강하게 살아야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형님의 건강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려오고 저 은행나무 같은 건강하고 의연한 노란 웃음이 그리워진다. 그리고 오래 오래 함께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나는 은행나무 앞에서 거목이 주는 교훈을 새롭게 생각해 본다.
"천년의 젊음을 간직한 당신의 비결은 무엇인가요?"
나의 질문에 나무는 되묻는 것만 같다.
"너는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라는 의미를 아는가?"라고.
내가 버린다고 버려지지 않고 비운다고 비워지지 않으니, 버리고 비우기를 한이 없도록 계속해야 되겠다. 그리고 고통에 시달리는 형님에게도 함께 하자고 권유 드려야겠다.

(2005.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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