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이름으로 사는 남자

2005.12.04 10:33

박정순 조회 수:62 추천:11

여자이름으로 사는 남자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기)박정순



  "주민등록증이 아니라 다른 신분증을 줘 보세요."
  "왜 그러시죠?"
  "주민 등록에 나와 있는 이름이 여자 이름이라서 다시 한 번 본인 여부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사진을 확인하면 될 텐데 면허증까지 보여줘야 됩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갑에서 면허증을 꺼내 보여주었다. 면허증과 주민등록증을 대조하고 내 얼굴을 번갈아 확인하던 직원은 무슨 신기한 거라도 발견한 것처럼 옆 동료에게
"야, 이것 봐. 남자 이름이 정순이래."
"남자 이름이 정순이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이름과 어울리지 않아서 드린 말씀인데 기분 상하셨으면 죄송합니다."

정순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사람이 따로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남자가 정순이라는 이름을 가지면 안 된다는 말인지 우체국에 볼일을 보러 갔다가 신분증을 제시하고 본인 여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남자가 정순이라는 이름으로 50년을 살았으니 이름으로 인한 사건과 우여곡절이 셀 수 없을 정도다. 자작일촌의 동네에서 태어나 '순'자 항렬을 따라 이름을 지은 것을 원망할 틈도 없이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 이름으로 인한 수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반 친구들에게 계집 애란 놀림을 받고 많이 울기도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내 운명이려니 생각했다. 고향선배가 군대에 가서 자기 선임자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나를 여자라고 했으니 편지가 가면 여자처럼 답장을 하다가 적당한 때 끊으라는 부탁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투박한 악필을 여자필체인 것처럼 속이기 위해 글씨를 옆으로 잔뜩 기울여 답장을 해 주었다.
30년 전쯤의 일이니 정말로 동네 아가씨나 자기 여동생의 주소와 이름을 알려주고 선임자 에게 편지를 하라고 했다면 그 선배는 제대하고 마을에 돌아올 생각을 아예 접어야 할 정도로 남녀가 유별한 시절이었으니 이해가 가는 일이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디에서나 이름을 말하면 얼굴을 한 번씩 더 쳐다보는 것이 일상화되어 안쳐다 보면 더 이상할 정도다. 아버지 회갑을 축하해 주기 위해서 오신 손님들께 드리려고 타월을 주문하면서 4형제 이름을 넣어 (자)상순, 정순, 희순, 오순, 4형제이름을 넣었더니 타월을 받은 사람 중 우리집안 형편을 잘 모르는 분이 이 집은 아들은 없고 전부 딸만 있느냐고 묻더라는 말을 듣고 실소를 짓기도 했었다.

광주에서 사업을 할 때에는 세무서 담당 직원이 바뀌면 많은 회사들 가운데 여자사장이 운영하는 회사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우리 회사를 제일 먼저 찾았다. 어떤 행사에 나가 이름표를 목에 걸거나 가슴에 차고 다니면 이름표를 잘못 찬 것으로 지적 받기도 하고, 어머니 대신 나온 사람인가 오해를 받기도 했다. 이름이 50년대 이전에 주로 사용되던 촌스런 정순이란 이름이기 때문에 부인대신 보다 어머니 대신 온 사람으로 오해를 받은 것이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름으로 인한 웃지 못할 일을 많이 겪었다. 교회에는 남자 성도들 모임으로 남전도회, 여자 성도들 모임으로 여전도회가 있는데 남전도회 명단에 여자 이름이 올라있으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인쇄가 잘못된 것으로 오해하여 지적하기도 한다. 소속되어 있는 교회야 몇 년을 다니면서 내가 남자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별문제는 없다.
지역 여러 교회가 모여 노회를 조직하여 남전도회는 남전도회끼리 여전도회는 여전도회끼리 연합회를 만든다. 그렇게 조직된 남전도회연합회가 한 달에 한 번씩 각 교회를 순회하면서 오후 예배순서를 맡아 예배를 주관한다.
나도 남전도회 회원이자 연합회의 임원으로 활동하는 관계로 한 달에 한 번씩 다른 교회에서 연합회 이름으로 드리는 예배에 참석하여 순서를 맡는다. 지난 11월에는 봉동 어느 교회에 갔을 때 남전도회 예배에 여자가 순서를 맡아 잘못 인쇄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하는 성도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 웃어 넘기기도 했는데 오늘은 더 큰 오해가 있었다.

오늘도 남전도회 임원의 자격으로 송천동 어느 교회에서 드리는 오후 예배에 사회를 맡게 되였다. 예배를 다 마치고 교회 담임 목사님이 광고를 하는 시간에 오늘 사회를 본 집사 이름이 박정순 씨가 맞느냐고 물어보는 게  아닌가. 모두들 무슨 의도인지 몰라 의아해 하고 있다가 목사님 하시는 말씀을 듣고 교회 안이 웃음바다가 되었다

오전예배를 마친 목사님에게 어떤 여자 집사가 찾아와
"목사님 큰일났어요."
"무슨 일인데 그러십니까?"하고 묻자 그 여 집사는
"목사님, 오늘 오후 남전도회 순회예배에 왜 저에게 사회를 보라고 순서에 올렸어요?"하며 교회 주보를 가지고 와서 항의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살펴보니 사회가 박정순이고 항의하는 집사 이름도 박정순이어서 작은 소동이 있었다는 말씀을 듣고 모두 웃음바다가 된 것이다. 얼마 전에 드라마 중에 '내 이름은 김삼순'이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인기리에 방송되었다. 그 여자도 삼순이라는 촌스럽고 모자라는 듯한 이름으로 살아가면서 놀림과 오해로 인한 마음고생이 심했으리라싶었다.

그러나 이제 어쩔 것인가? 오래 사용한 전화번호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번호라 쉽게 바꾸지 못하는데 50년을 사용해온 내 이름을 이제 와서 바꾸기는 어렵다. 아니 어쩌면 내가 정순이란 이름으로 얻어지는 이익 때문에 바꾸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여자 이름을 가진 남자이기 때문에 한 번 들은 사람들은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여 좋을 뿐 아니라 이름을 말했을 때 상대의 시선을 한 번 더 받는데 익숙해져 있는 내가 이름을 바꾸는 모험을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아내가 남편으로 인정하고 예쁘고 착한 딸과 아들이 태어남으로서 내가 남자임이 증명된 이상 정순이라는 여자이름으로 살아간다고 해서 나를 여자로 보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오래 사용했는데 이제 와서 이름을 바꾼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나는 앞으로도 영원히 내 이름 박정순으로 살아갈 것이다.
"박정순 파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