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번째 습작
2005.12.20 22:52
100번째 습작(習作)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기) 정현창
출근길에 눈이 펑펑 내린다. 온 길이 빙판이 되었다. 서곡사거리로 가는 오르막길 때문에 롯데백화점부터 왕복8차선 넓은 도로가 아예 주차장이 되어버렸다. 나는 좀 늦게 출근하여도 별일이 없겠지만 급한 약속이 있는 사람들은 차 속에서도 마음은 뛰고 있지 않을까. 너무 안타까운 출근길이었다.
올해도 많은 약속을 했었다. 큰 약속이든 작은 약속이든 지키려고 노력했으나 얼마나 지켜졌는지는 모르겠다. 특히 코리안 타임이라고 해서 잘 지켜지지 않는 시간은 꼭 지키려고 노력했었다. 내가 시간을 지키지 않으면 시간이 돈인 시대인 요즘 상대방에게 커다란 손해를 입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아무리 지키려 해도 길이 막혀서 가끔은 지키지 못할 때도 있었다.
타인과의 약속보다도 나와의 약속은 더 지켜지지 않았다. 나에게는 관대하고 또한 아무도 약속을 어긴 것에 대하여 나무라지 않는 탓도 있다. 올 한해도 나와의 약속을 많이 했었다. 아니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나와의 약속을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해야겠다.’부터 ‘오늘만은 술을 마시지 말아야지.'까지 참 많이도 했지만 거의 지켜지지 않고 있다. 물론 모두 지키지 못할 이유가 있었다. 아니 이유를 만들었다.
내가 나와의 약속을 잘 지킨 것은 군대에서 배운 담배를 끊은 일이었다. 5년 전에 담배를 끊겠다고 나와 약속했었다. 나에겐 아들만 둘인데 아이들이 커가면서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내가 담배를 피우면서 아이들에게는 피우지 말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담배를 끊은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말도 있듯이 그렇게 어렵다는 담배를 아이들 얼굴을 생각하며 나와의 약속을 기어이 지켰었다. 그런데 시기가 늦어 큰애는 담배를 배워 버렸다. 좀더 빨리 아이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지 않았어야 했는데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다. 담배를 끊는다는 건 혼자는 힘들 것 같아서 물귀신 작전으로 같이 근무하던 직원과 함께 예수병원 담배 클리닉을 수강하려고 갔었다. 예수병원 입구에 있는 쓰레기통에 호주머니에 있던 담배와 라이터를 버리고는 그냥 끊어 버렸다. 하지만 그때 같이 갔던 직원은 지금도 담배를 피운다. 그러나 나는 5년이 지난 지금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 나와의 약속을 지킨 셈이다.
나와의 약속이 지금도 잘 지켜지지 않은 것은 술을 자제하는 문제이다. 술을 즐겨 마신다. 한꺼번에 폭주를 하기보다 자주 즐기는 편이다. 하루에 석잔 이상을 안 마시는 것이 좋다고 한다. 술자리에 갈 때는 항상 석잔 만 마시겠다고 나와 약속을 한다. 하지만 술잔이 돌기 시작하면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나와의 약속은 헌신짝 버리듯 버려진다. 저녁상에 지글지글 김치찌개라도 올라오면 슬그머니 냉장고를 열고 담가둔 매실주를 꺼낸다. 아직은 건강해서 아무 일이 없지만 술에는 장사가 없다고 하지 않는가. 막내가 암 병동에서 힘들게 투병을 하면서 면회를 간 나에게 신신당부하곤 했었다. “형, 소주 너무 많이 마시지 마. 여기에 투병하는 사람들이 소주 때문에 암에 걸린 사람들이 많아.”
2005년 나와의 약속을 확실히 지킨 건 전반기에 울트라마라톤과 삼종경기 완주, 그리고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운 것도 있지만, 하반기에 수필을 배우며 나와의 약속을 지킨 것이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마술을 배우다 마술이 폐강을 하자 6월 22일 수필창작 기초반 여름방학특강에 수강신청을 했었다. 수강을 하면서 6월 27일에 첫 습작 ‘울트라마라톤’을 썼다. 첫 습작을 쓰면서 나와의 약속을 하였다. 보통 수필 7~80편이면 수필집 한 권을 낼 수 있다는데 꼭 100편을 쓴 다음에 등단을 하자. 습작 100편을 쓴 다음에 등단하면 조금은 부끄럽지 않고 수필가라는 호칭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말이 그렇지 습작 100편이란 어느 집 애 이름이 아니었다. 보통 수필집 한 권을 내려면 3년 정도가 걸린다는데 아무리 습작이라지만 초보자로써 100편을 쓴다는 건 소재를 찾는 데도 무리였다. 주위에서 눈에 띄는 대로 글의 소재로 삼아 매일 백일장에 참가한다고 생각하고 한 편 한 편 써 나갔다. 여름특강 2개월이 끝나자 30편을 넘었다. 9월에 2학기가 되어서는 서서히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11월 중순이 되자 80편을 넘어섰다. 이대로만 열심히 쓰면 올해 안으로 100편이 써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다. 6개월에 습작 100편이라니, 내가 생각해도 놀랄만한 결실이다. 이 작품이 완성되면 내가 약속한 100번째 습작을 다 쓰게 된다. 드디어 6월 22일 수필을 배우기 시작한 뒤 꼭 6개월 만인 12월21일에 나와의 약속을 지키게 된 것이다.
100번째 습작을 쓰고 나니 이제 겨우 신병훈련소를 수료한 기분이 든다. 끝이 아니라 시작인 것이다. 이제부터 이등병 작대기 하나를 달고 정식으로 군대생활을 시작하는 것처럼 수필로 가는 첫 걸음을 내딛는 기분이다. 아무리 습작이라지만 한 편 한 편 내 생각을 최선을 다해 글에 담았다. 지난 6개월 동안엔 한시도 내 마음에서 글 쓰는 일이 떠난 적이 없었다. 운동을 할 때나 화장실에서, 심지어 밥을 먹으면서도 글을 생각했었다. 그 순간은 항상 행복했었고 글을 한 편 쓰고 나면 보람을 느꼈다. 100편을 향해 열심히 달려온 나날이었다.
이 정도 공을 들였으면 수필도 나에게 조그만 길이라도 보여주지 않을까. 다정한 눈길이라도 주지 않을까. "열 번 찍어 안 넘어갈 나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성경에도"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온 밤을 하얗게 새우면서 쉬지 않고 100km를 달려야 하는 울트라마라톤을 완주한 기분이다. 이제부터는 나와의 약속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서둘지 않고 글을 쓰게 되어서 마음이 편하다. 나와의 약속을 꼭 6개월만에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절대 나 혼자의 노력만으론 어려웠을 것이다. 너무 모자란 100편의 습작을 일일이 읽으시고 지도해주신 김학 교수님 덕에 지키게 되었다. 김 교수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창밖엔 하얀 눈꽃이 펑펑 내리고 있다. 마치 100번째 습작을 써서 나와의 약속을 지킨 일을 축하라도 하는 양 온 천지는 눈의 축제다. 라디오에선 내 100번째 수필습작을 기리는 축가인 양 크리스마스캐럴이 흥겹게 흐르고 있다.
( 2005. 1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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