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시인의 고향을 찾아서
2006.09.16 13:40
정지용 시인의 고향을 찾아서
-정지용의 『향수』
행촌수필문학회 이은재
고향은 생生의 뿌리이고 영혼의 안식처다. 세월이 흐를수록 고향이 그리워지는 건 가난하였지만 행복했었기 때문이다.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은 연인처럼 고향은 언제나 그리운 곳이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후략)
'향수'란 노래를 부르고 있노라면 어느새 고향에 대한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진다. 노래 속엔 고향을 생각하게 하는 감각적인 시어가 탄력 있게 들어있어 그리움을 자아낸다. ‘향수’는 정지용 시인이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1923년 4월(22세)에 쓴 작품이다. 정지용은 북으로 간 시인이라는 이념적 굴레 때문에 1988년 해금되기까지는 철저히 망각되었던 시인이다. 그런 그를 대중에게 알린 것은 평론가들의 조명이나 詩가 아니라 노래였다.
김희갑 작곡 ‘향수’는 정지용 시인의 존재를 부활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이 노래는 성악가 박인수와 가수 이동원이 듀엣으로 열창하여 화제가 되었다. 성악가와 가수가 함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세계적인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와 미국의 컨트리 가수 ‘존 덴버’가 ‘Perhaps Love’를 듀엣으로 불러 큰 반향을 일으켰던 것과 같은 맥락이랄까. 월북 작가들이 해금되던 해에 가수 이동원씨는 우연히 여의도의 한 책방에 들렀다가 향수를 접하고 시가 너무도 마음에 들어 성악가 박인수를 찾아가 함께 노래 부를 것을 협의하였다. 작곡가 김희갑 선생이 1년 동안의 씨름 끝에 노래가 만들어져 1989년 10월 3일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정지용 흉상제막식 기념공연에서 첫 선을 보였다.
여고시절, 졸음이 쏟아지던 5교시 국어시간에 선생님 몰래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려 보냈던 친구의 편지 속에 한 편의 시가 적혀 있었다.
『얼굴 하나야 / 손바닥 둘로 /폭 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 호수만 하니 / 눈 감을밖에』(『호수』전문)
종이비행기를 통해 처음 접했던 이 짧은 시는 너무도 아름다워서 곧바로 나의 애송시가 되었다. 누구의 詩인지도 모른 채 애송했던 시가 정지용 시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뒤 해금작가들이 소개되며 국민가요로 등장한 ‘향수’ 때문이었다. 학창시절에 그토록 애송했던 ‘호수’가 정지용의 詩였음에 나는 얼마나 놀랐던지.
해방 후 어수선하던 이데올로기 대립의 와중에서 한 편의 시도 집필하지 못하였던 정지용은 1950년 7월 서울에 다녀온다며 모시적삼 차림으로 나갔다가 영영 사라져버렸다. 항간엔 월북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평양감옥으로 이감 중 사망했다는 등 무성한 소문만 난무한 채 시인의 행보를 알 수 없는 역사는 그를 월북시인으로 묶어놓고 향수를 포함한 그의 문학작품은 읽을 수도 출판할 수도 없게 되었다. 사실 그도 피해자였지만 역사는 그를 3번이나 짓밟았다. 일제강점기, 6.25 전쟁, 북으로 간 시인이라는 월북자로….
어찌된 일인지 이광수도 북으로 함께 끌려간 작가였지만 그의 문학은 교과서에 엄연히 자리를 잡았다. 더구나 친일문학가라는 오명까지 있었지만 그의 행적은 납북으로 윤색되었다. 월북과 납북은 극명하게 달랐던 것일까.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옥천을 그리며 ‘향수’를 썼던 그는 고향에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철저히 희생되었던 불운한 시인, 그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끊임없는 기원에도 그의 시집 출판은 번번이 무산되었다. 詩가 노래로 조명된 ‘향수’의 무대가 된 곳, 이제는 돌아올 수 있는 고향이 마련되었는데도 다시는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고 처참하게 유린된 시인의 생애가 너무도 애틋하여 그 시인의 고향에 가보고 싶었다.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초롬이 적시며 달렸을 시인의 고향이 어떤 곳인지 보고 싶어 벼르다가 팔월의 염천에 찾아간 시인의 고향 충청북도 ‘옥천 (沃川)’….
옥천에 이르자 『명시 ‘향수’의 시인 정지용의 고향 옥천』이라는 대형 입간판이 시인의 고향임을 안내하고 있었다. 시인의 생가는 1996년에 원형대로 복원되어 관리하고 있었다. 생가 앞에는 향수를 적은 시비와 ‘시인 정지용 생가터, 1902년 5월 15일 출생, 옥천군 옥천읍 하계리 40’이라고 새겨진 돌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새로 단장한 초가집 생가는 본채와 행랑채가 있고 우물과 장독대가 돌담과 어우러져 정갈했다. 사립문 밖에는 일제강점기에 망국을 노래한 홍난파의 울밑에 선 봉숭아처럼 봉숭아꽃이 서럽도록 붉게 피었고, 담장에 줄지어 선 해바라기는 여물어 가는 갈색의 씨를 입에 물고 있었다. 사립문 옆 물레방아는 시인의 못 다한 시성을 얘기하고, 정지용 문학관 앞에 우뚝 선 정지용 동상은 마을을 굽어보고 있었다. 생가 방안은 부친이 한약방을 하였음을 가구(家具)로 알리고, 시선 가는 곳마다 시가 걸려 있었다.
“흐릿한 불빛에 둘러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이라는 시어에 따라 질화로와 등잔의 소품이 배치되어 있는 모습은 그 시절의 ‘향수’를 음미하게 했다.
‘정지용 문학관’에 들어서자 향수가 울려 퍼졌다. 전시관 앞에는 두루마기를 입은 시인이 실물크기의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시인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촬영장소 표시까지 친절하게 써 놓았다. 벽에 걸려있는 여러 詩 중 ‘호수’를 보자 종이비행기에 ‘호수’를 곱게 적어 날려 보냈던 친구생각이 와락 났다. 멀리 미국에 있는 그녀와 나의 그리움은 손바닥으론 가려지지 않는 호수만한 그리움이었을까. 시인이 없는 생가의 쓸쓸함만큼이나 지금은 곁에 없는 친구의 빈자리가 너무도 컸다.
산자락 아래 고요한 작은 마을, 해설피 무렵에 얼룩백이 황소가 게으른 울음을 울었다던 마을엔 황소울음 대신 늦여름을 아쉬워하는 매미가 울고 있었다.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갔을 냇가는 그대로 남아있는데 청석교 아래 냇물은 말라버리고 잡초만 무성히 자랐다. 차마 꿈에도 잊히지 않는 시인의 고향이 내겐 낯선 풍경으로 다가왔지만 고향은 어떤 형상이 아닌 마음으로 느끼는 곳이기에 시인이 그려낸 고향을 그려볼 수 있었다. 그 옛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와 함께 정답게 살았던 시인의 고향은 가난했어도 행복했을 것 같다.
높은 학력과 서정적 시성을 지닌 순박한 시인은 일제강점기에 고향을 잃더니 6.25 전쟁에선 죽음을 맞고, 풍비박산이 된 가족들의 슬픔을 외면한 채 그의 작품마저 꽁꽁 묶여 숨죽여 지내야 했던 인고의 세월이었다. 인민군에게 잡혀간 아버지를 찾겠다고 집을 나섰다가 역시 북한으로 끌려간 작은 아들 정구인(양강도 풍서방송국 책임기자)씨가 아버지를 찾겠다고 남북이산가족 상봉 때 서울에 왔었지만 남에도 북에도 정지용의 자취는 없었다. 나라를 빼앗긴 굴욕적인 설움과 전쟁의 참상으로 생이별을 해야 했던 가족의 이별은 그 당시 흔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유독 시인의 생애가 마음을 시리게 한 것은 그에게 월북시인이라는 멍에로 그를 또 한 번 죽였기 때문이다. 한국 근대사의 시에서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하여 새로운 시적 경지를 열어 보인 시인이라는 상찬을 들으며 48세를 사는 동안 120여 편의 주옥같은 시를 남겼던 시인의 생애는 가혹하기만 하다.
정지용 시인은 옥천보통공립학교와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교비 유학생으로 일본 동지사 대학에 입학하여 영문과를 졸업했다. 천재로 소문난 그는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하였고, 교지를 만드는 등 일찍이 뛰어난 시성을 발휘했다. 귀국 후엔 휘문고보 교사를 거쳐 이화여전 교수, 경향신문 주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6.25전쟁을 만나 납북되었다. 그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순수 시인이었으나, 광복 후 좌익 문학단체에 관계하다가 전향하였다. 이것이 그를 북으로 간 시인으로 오해하게 한 것은 아닐까.
살아남은 가족들은 슬프다는 표현도 하지 못한 채 얼마나 긴 통한의 세월을 보냈을까. 납북된 지 33년만에야 해금된 시인의 장남은 오랜 망각에서 깨어난 아버지의 새 시집 서문에 이렇게 썼다.
『혹여나 아버님이 돌아오실까 하여 그 숱한 세월을 가슴 조이시다가 가신 어머님의 눈시울에는 이슬이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망연히 먼 산을 지키시다가 떠나가는 구름을 따라 어머님은 손을 저으며 가셨습니다. 이렇게 애절히 기다리는 어머님의 마음을 저야 어찌 그 반분인들 알 수가 있었겠습니까.』
국토는 잃었어도 민족의 정신만은 빼앗기지 않으려고 일제의 채찍을 맞으면서도 우리의 모국어를 지켜나간 시인들은 진정한 언어의 파수꾼이며 독립군이다. 정지용시인이야말로 그 대열에 앞장선 시인이 아닐까. 그는 결코 북녘을 선택할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는 문단, 학계, 언론계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그 옛날의 영광을 되찾게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이다. 매년 옥천에서는 시인의 생일인 5월 15일을 전후하여 '지용제'가 열리고, 백일장, 군민 합창제를 통해 시인을 기리고 있다.
유년의 아련한 고향풍경을 한 폭의 시로 담아낸 ‘향수’는 점점 고향을 상실해 가는 우리에게 그 시절을 되돌아보게 한다. 예전엔 가난과 전쟁이 고향을 등지게 하였지만 지금은 산업사회, 정보화사회가 고향을 외면하게 한다. 아니 점점 황폐해져 가는 우리의 감성이 고향을 멀리하게 하는 지도 모른다. 시인이 다녔던 옥천공립보통학교(현 죽향초등학교)를 바라보며 돌아서노라니 하늘에서는 이슬비가 내리며 흐느끼고 있었다. 시인의 생애와 암울했던 그 당시의 역사를 생각하다가 나도 이슬비처럼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짓밟히고 동강났던 민족의 통곡처럼 빗줄기는 점점 거세게 울었다.
<2006.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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