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말 송편과 도깨비 불
2006.10.14 01:15
서 말 송편과 도깨비 불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중) 한애근
모시 잎과 쑥을 넣어 만든 송편 한 접시와 송편 빛깔을 닮은 녹차 한 잔을 앞에 놓으니 추석 전날 밤의 일과 시숙님, 형님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그 시간이 그리워진다.
추석 전날.
아침 일찍 남편과 함께 고향집에 도착했다. 무더운 칠월 여름날 시어머님의 제사를 지내고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집을 깨우며 먼지를 닦아내고, 그릇을 씻고, 이불을 햇볕에 널며, 1박2일간의 랑데부를 시작했다. 9남매가 낳고 자란 시골집이 올 들어 네 번째 가족들을 맞이하려 기지개를 켜며 부스스 일어났다. 두 번의 명절과 시부모님 제사를 고향 시골집에서 지내는 까닭이다. 청소를 시작하니 명절증후군처럼 심난했던 마음이 고향집의 먼지와 함께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신혼 초 5년 동안이나 살면서 두 아들을 낳아 길렀던 집이니 몇 달에 한 번 찾아와도 정겹고 그 흔적들로 젊은 날의 추억에 잠기곤 한다. 봄이면 송홧가루가 날려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돌아서면 뿌옇게 분칠했던 야속하던 마루, 눈부시게 피어났던 자산 홍과 황 철쭉은 23년이 지난 지금도 화단에서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흙집 좁은 방에는 예쁜 아이를 낳게 해달라며 벽에 붙였던 예쁜 아기사진들이 변함없이 나를 향해 웃고 있다. 추억냄새를 맡으며 청소를 막 끝낼 무렵 음식을 장만할 재료들을 가득 싣고 가족들이 도착했다.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여섯 며느리가 모였으니 소도 잡는다고 하였다. 부엌일과 전 부치는 일, 생선 다루는 일들이 분담되어 착착 진행되었다. 6형제 형제분들은 술잔치가 벌어졌다. 하루 저녁에 없어지는 술은 2홉들이 스물네 병이 바닥을 비워야 끝난다. 하지만 남편은 막둥이이니 술자리에 끼기보다는 심부름에 바빴다. 그래도 형제들을 만난 기쁨인지 얼굴엔 웃음보따리가 얹혀있다. 오후부터 전 부치는 일이 시작되자 노릇노릇한 전들이 채반에 죽 늘어섰다 그래도 이번엔 전이 두 채반으로 끝났다. 다른 때는 다섯 채반이 되어야 끝나지만 음식을 조금만 준비하자고 해서 이렇게 된 것이다. 전 부치는 일이 끝나면 일의 반절은 끝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자! 이제부터는 송편 빚기다. 송편 찌는 것은 내가 담당하고 다른 가족들은 둘러앉았다. 쌀가루 반죽한 것을 풀어 놓으니 다들 입이 벌어졌다. 쌀이 서 말이니 반죽덩어리가 만만찮다. 작년 추석에 송편 만들 쌀 한 말을 갖고 가니 방앗간에서 놀라더라고 했는데, 올해는 전국 방앗간 뉴스에 톱기사로 실리지 않을까. 그래도 반죽은 방앗간에서 해오니 다행이다. ‘설마 다 만들라고?’ 은근히 기대하면서 콩과 참깨를 소로 하여 송편 빚기가 시작되었다. 여덟 명이 앉아서 세 시간이나 만들었는데도 반절도 더 남은 반죽 덩어리! 큰 형님께 만드는 것도 힘들고 찌는 것도 힘드니 덩어리로 나눠가자고 했더니 그냥 다 만들자고 하신다.
“우리 큰 형님은 못 말려!”
나이차이가 16년이니 버릇없다 하실 만도 한데 그래도 밉지 않으신지 빙그레 미소만 지으신다. 큰 형님의 미소 뒤에는 미완성품이 아닌 완성품으로 식구들 손에 들려 보내고 싶은 마음이 숨겨져 있으리라. 떡집에 가서 언제나 입맛에 맞는 떡을 사먹을 수 있는 시대지만 정이 담긴 송편엔 근처에도 못 간다는 단호함 같은 무언의 말씀을 하시는 듯했다.
모처럼 긴 시간동안 둘러앉은 가족들은 집안 이야기와 동네 이야기에서 시숙님들과 남편의 어릴 적 이야기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닭서리, 배서리하다 들켜서 도망갔던 이야기, 서리해서 감춰두었던 친구의 배를 다시 서리했던 이야기로 웃음바다가 되었다. 서리했던 이야기가 바닥이 나니 이번엔 시숙님과 남편이 서로 질세라 앞 다퉈 도깨비 이야기판을 벌였다.
옆집 아저씨는 밤에 도깨비불에 홀려 길을 따라 갔는데 깨고 보니 뒷산을 밤새 오르락내리락 하셨고, 아랫동네 아저씨는 도깨비와 밤새도록 씨름을 하였는데 아침에 보니 빗자루와 부지깽이만 있더란다. 남편은 초등학교 6학년 무렵 과외수업을 마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이가 죽으면 묻곤 했다는 인적드믄 네거리, 그 곳에서 춤을 추는 도깨비불을 보고 죽어라 달려서 집에 왔단다. 겁먹은 표정과 목소리로 한껏 분위기 잡으며 이야기를 하는데 어찌 나는 짓궂은 도깨비를 보는 듯하였다. 반딧불과 담뱃불이 도깨비불인 줄 알고 줄행랑을 놓았다는 둘째시누와 동네 친척들에게서 들었던 도깨비 이야기까지, 우리는 밤이 깊도록 도깨비와 송편과 씨름을 했다.
시댁동네의 도깨비불은 밤이면 큰 길 건너에서 춤을 추었는데 전기가 들어오면서 도깨비불은 사라졌다고 하니, 전깃불이 들어오면서 사라진 도깨비들은 지금은 어디에 모여서 재미난 이야기를 만들어갈까.
셋째 시숙님은 마루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시며 옛날에 들었는데 또 들어도 재미있다고 하며 기를 살려주셨다. 적어도 1년에 네 번은 만나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지나온 세월 이야기를 했으니 반복되는 이야기가 많겠지만 동생들의 기를 살리려 유머러스하게 넘어가 주셨다. 도깨비 이야기도 무르익어가고 하늘의 달을 닮은 둥근 송편과 반달 송편도 소쿠리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남편은 찐빵처럼 큰 송편을 만들고는,
“와! 달마대사 봐라!”
하면서 얼렁뚱땅 자리를 피하려다 억척스런 형님들에게 붙잡혀 끝까지 송편 빚는 일을 계속해야만 했다. 저녁 일곱 시 반에 시작한 송편 빚기는 새벽 두시 반이 되어서야 끝났다.
서울에서 출발하는 가족들은 고속도로가 막히니 오는 날 가는 날 힘들고, 큰 형님은 식구들 먹을 음식과 차례 상에 올릴 음식으로 몇 날 며칠 몸도 마음도 고달프시리라. 하지만 식구들이 고향 집에 모이는 시간부터 웃음꽃이 피기 시작한다. 뵐 때마다 세월이 가고 있음을 느끼지만 흐르는 정만은 끄떡없다. 만남이 즐겁고 명절 때마다 한 가지씩 추억거리를 만들기도 한다.
몇 해 전 설에는 전을 부치다 중단하고 의기투합하여 눈썰매를 타러 간 적도 있었다. 중증의 건망증으로 말이 없으셨던 시어머님께서 갑자기,
“미친것들!”
하시는 바람에 어머니 눈치를 보며 조용조용 빠져나갔던 그 사건은 가족들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거리가 되었다. 올 추석에는 송편 서 말이 추억으로 남아 가족들의 입을 통해서 전설처럼 전해갈 것이다. 고향 오는 길이 고달파도 핑계대지 않고 찾아오는 형제들의 사랑은 우리 큰형님의 큰 손이 품어주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음식을 정말 조금만 하자고 하지만 푸짐한 보따리를 가족들에게 들려 보내고 싶으신 손 큰 우리 큰형님이 그리하실지……. 긴 명절 연휴가 시작되면 해외여행으로 인천국제공항이 들썩인다지만, 어찌 여행에서 얻는 즐거움이 가족들이 모여서 나누는 정만 하랴!
남편과 결혼해서 얻은 복이 두 가지가 있다면, 두 아들을 얻은 것이 첫째 복이요, 시부모님과 형님들을 만나고 시숙님들을 만난 인연 복이 그 두 번째 복이다. 가족관계에서 위기는 있지만 조금씩 양보하고 이해하면 이만한 인연이 또 어디 있겠는가. 우리 가족 또한 문제가 있을 때 풀어나가는 바탕엔 가족애가 늘 먼저였다. 지혜롭고 따듯한 시댁식구들을 만나서 올 추석도 풍성하게 보냈으니 오늘은 특별 서비스로 남편이 좋아하는 술과 안주를 준비할까. 그리고 도깨비불을 봤던 이야기가 정말인지 넌지시 물어봐야겠다.
살아있는 정서교육의 현장에 아이들과 어린 조카들이 함께 했다면 더욱 좋았겠다. 내년에는 가족 이벤트로 ‘서 말 송편 빚기와 도깨비 이야기’를 준비하자고 해볼까, 쫀득쫀득한 송편 한 접시와 녹차로 아쉬움과 그리움을 달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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