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미팅

2006.10.22 12:54

김학 조회 수:177 추천:26

목소리 미팅
                                        김 학


‘TV는 사랑을 싣고’는 내가 즐겨 시청하는 프로그램이다. 매주 한 번씩 방송하는 이 프로그램은 인기 또한 높다. 대개 연예인이나 유명세를 지닌 저명인사들이 출연하여 오래 전의 기억을 더듬어 만나고 싶은 사람을 제시하면 TV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찾아서 만나게  해 준다. 나는 이 프로그램을 볼 때마다 내가 만일 출연하게 된다면 누구를 찾아달라고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곤 한다. 또, 누군가가 나를 찾아달라고 하지나 않을까 실낱같은 기대를 걸어 보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 실현가능성은 거의 없다.

하늘은 높푸르고 햇살은 따사롭다. 바람 또한 삽상하다. 전형적인 이 땅의 초가을 날씨다. 계절 탓인지 오늘따라 나의 출근이 좀 빨랐다.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을 뽑아들고 사무실 내 자리에서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언제나 하던 버릇 그대로였다. 갑자기 사무실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감사합니다. 김학입니다.”
“안녕하세요? 저 장석환입니다.”
“아니, 지금 어디야?”
“캐나다에서 전화 드리는 겁니다. 보내주신 책을 오전에 받고 지금쯤 출근하셨을 것 같아서 전화를 한 겁니다.”
국제전화인데도 마치 옆방에서 걸려온 전화처럼 또렷또렷하게 들렸다. 궁금한 게 많은 만큼 묻고 싶은 사연도 많았다. 어떻게 전화를 끝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올 가을에 귀국할 계획이고 그때 전주까지 오겠노라는 이야기만 이명(耳鳴)으로 남아 있을 뿐.  

장석환 씨와 나는 오늘 30년 만에 목소리로 만난 것이다. 30년이면 한 세대라는 긴 세월이다. 아버지가 할아버지로 변하는 기간이다. 그 긴 세월의 강을 건너 만남의 다리, 오작교를 놓게 되었다.

얼마 전 이목윤 시인이 나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주었다. 장석환 씨의 명함이었다. 순간 30여 년이란 세월을 건너뛰어 강원도 인제에서 군대생활을 하던 시절이 회상되었다. 그때 나는 육군 17연대 1대대 작전장교였고, 장석환 씨는 신병이었다. 키는 전봇대처럼 컸지만 홀쭉한 편이었고, 얼굴은 갸름한 홍안의 미남사병이었다. 서울 말씨의 붙임성 좋은 사나이였다. 그는 나를 잘 따랐고, 나도 그를 귀여워했었다. 어쩐 일인지 장석환 씨를 생각하면 철모차림의 미소 띤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그러다가 내가 먼저 제대를 하는 바람에 소식이 끊겼었다. 그것이 우리들의 인연의 끝이었다. 그런데 뜻밖에 30년 만에 다시 전화통화를 하게 되다니……. 분명 꿈은 아니었다. 끊긴 인연이 30년 만에 다시 이어지는 일, 이것이 사나이들의 전우애(戰友愛)가 아닐까?

이목윤 시인은 지난여름, 한국문인협회가 마련한 해외동포문학 심포지엄 참석차 캐나다 밴쿠버에 다녀 온 적이 있었다. 그곳에서 동포시인으로 참석한 장석환 씨를 만나게 되었고, 그 자리에서 장석환 씨는 전주 출신인 이목윤 시인에게 내 안부를 물으면서 자기 명함을 내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다.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온 겨레의 눈물샘을 마르게 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펼쳐졌다. 오랜 세월 헤어져 있으면 피붙이끼리도 이름을 잊게 되고, 얼굴 생김새마저 망각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지 않던가? 끊어질 듯 이어지고 이어질 듯 끊어지던 그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서 기억의 부스러기를 소중히 부여잡고 우짖던 그 사연들이 눈에 선히 잡힌다. 그런데 장석환 씨는 30년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낯설고 물선 만리타국에 살면서도 내 이름을 잊지 않고 찾다니……. 장석환 씨는 20여 년 전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뿌리를 내리기까지 온갖 고초를 겪었을 터인데도 나를 잊지 않고 있다니…….

  이목윤 시인이 전해준 장석환 씨의 명함을 내 집 책상 위에 놓고서 제주도에 다녀왔더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었다. 30년 만에 가까스로 이어진 인연의 끈이 이렇게 허무하게 끊어지다니 싶어 안타까웠다. 몇 날 며칠 고민하다가 이목윤 시인에게 연락을 했다. 다행이 이목윤 시인이 장석환 씨의 명함을 한 장 더 갖고 있었다. 휴!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명함의 주소로 나의 수필집을 우송했더니 오늘에야 받고 국제전화를 걸어 준 것이다.

군대시절엔, 짧은 기간이지만 많은 전우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이름을 기억할 수 있는 전우(戰友)는 손가락으로 헤아릴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하다. 게나마 세월이 흐르면서 자꾸 잊혀져 간다. 어렴풋이 얼굴을 기억할 수 있는 전우는 그보다 약간 웃도는 편이지만.

얼마 전 같은 중대에서 소대장으로 근무했던 선배 장교 한 분을 찾은 적이 있다. 17연대 4중대 3소대장이었던 장규섭 소위다. ROTC 1년 선배인 장 소위는 충남대 농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제는 당시 1소대장이었던 강원도 양양 출신 이명언 소위를 찾고 싶다. 자그마한 키에 둥글넓적한 얼굴의 이명언 소위는 월남전에 참전하였고, 대령으로 전역했다는 소식을 풍편에 들었다. 이 소위의 모교인 양양고등학교에 아는 선생님이 있어서 서울에 산다는 이 소위의 집 전화번호를 알고 몇 번 전화를 걸었던 적이 있다. 이 소위의 아내가 처음에는 시골에 갔다고 하더니 그 다음에 전화를 거니 전화번호가 바뀌었다고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 소위와는 연락이 되지 않아 안타깝다. 이 소위는 지금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남성사회에서 군대시절 이야기는 영원한 화두(話頭)다. 군대에 다녀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화에 끼어들 수 있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가 있다. 초면이냐 구면이냐 구애받지도 않는다. 군대시절 이야기라면 천일야화(千一夜話)라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장석환 씨의 귀국이 기다려진다. 그가 전주에 오면 어느 곳을 보여주고, 어떤 음식을 대접줄까? 아니 무슨 이야기부터 대화의 실타래를 풀어나갈까? 장석환 씨를 생각하면 나는 40년을 껑충 건너뛰어 20대의 청년시절로 돌아갈 수가 있다. 타임머신이 거꾸로 돌아간다.

첫사랑 연인을 만나기로 약속한 것처럼 가슴이 설렌다. 남녀관계가 아니라 남남관계(男男關係)에서도 이처럼 가슴속의 물레방아가 돌아가게 되는 것인가 보다. 만남이란 이렇게 소중한 인연임을 새삼 느끼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