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도 멋을 내는데
2006.11.04 09:18
허수아비도 멋을 내는데
김 학
들녘 허수아비들의 호사(豪奢)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옛날 허수아비들에 비하면 요즘 허수아비들은 여간 멋을 내는 게 아니다. 허수아비들의 차림새는 패션쇼에 출연한 일류 모델들의 옷차림을 뺨칠 정도다.
어느 날 이른 새벽에 컴퓨터를 열어 보니 K선배가 멋쟁이 허수아비들의 사진 24장을 메일로 보내주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천천히 흘러가는 영상화면(影像畵面)이었다. 허수아비라면 으레 그러려니 하는 선입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하나 살피다가 문득 새로운 사실을 깨닫고서 나는 무릎을 쳤다. 허수아비들의 옷차림이 예전과는 너무도 판이하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예전 들녘의 허수아비들은 남장(男裝)인 경우 허름한 중우적삼에 낡은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고, 여장(女裝)인 경우는 검정치마에 흰 저고리, 그리고 머리에 낡은 털수건을 둘러쓴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사진으로 보내 준 요즘 허수아비들의 차림새는 그게 아니었다.
“세계화! 세계화!”
하더니 허수아비의 앞가슴에도 커다랗게 영어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무대공연을 마치고 금방 내려온 듯한 무대복(舞臺服)차림인가 하면, 운동장에서 땀 흘리며 운동을 하다가 추리닝차림 그대로 나온 허수아비도 있고, 산행(山行) 뒤 바로 논밭으로 내려온 등산복차림의 허수아비도 있었다.
색깔로 보아도 총천연색이고 디자인으로 살펴도 역시 다양했다. 한복, 양복, 양장, 운동복, 등산복, 군복, 예비군복, 무대복 등 옷의 종류도 다채롭기 짝이 없었다. 옛날에는 질퍽한 논 가운데 띄엄띄엄 홀로 서 있는 게 허수아비였는데, 지금은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모습의 허수아비들이 나란히 마주서있기도 했다. 허수아비는 논이나 밭 가운데가 당연히 그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라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다.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길가나 자동차의 왕래가 빈번한 도로변에도 세워져 있었다. 대개는 논에 서 있는 게 허수아비였는데 지금은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핀 밭에도 세워져 있었다.
허수아비의 임무가 바뀌어서 그런 것일까?
옛날의 허수아비는 벼가 익어가는 논에서 참새를 쫓는 게 그의 임무였다. 그런데 참새도 모두 젊은이들을 따라 도시로 떠나버려서 그런지, 참새를 쫓는 허수아비의 임무는 사라지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요깃거리가 되고 말았다. 농촌 들녘의 서정적 볼거리로서 관광상품이 된 것이다. 김제의 지평선축제던가? 그 축제에서는 ‘허수아비 만들기 대회’가 열려 체험축제로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농경사회시대의 허수아비부터 산업화시대를 거쳐 정보화시대까지의 허수아비 사진들을 모아서 나란히 전시한다면 세상의 변화를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으려니 싶다. 허수아비가 입은 옷은 그 시대의 우리네 복식문화(服飾文化)의 반영일 터이니, 농촌에서 열리는 가을축제에서는 그런 행사를 시도해 보면 좋지 않을까.
오래 전 군산에서 만났던 K교장의 말씀이 떠오른다. 내가 만났던 때 K교장은 연세가 60대였다. 그 K교장은 20대부터 결혼주례를 맡아 이미 5천 쌍을 넘겼다고 자랑한 적이 있다. 그 K교장은 주례를 선 다음 신랑신부와 함께 찍은 사진을 모아서 병풍을 만들었더니 아주 소중한 사료(史料)가 되더라고 했다. 시대에 따라서 신랑신부의 머리모양이며 복장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비교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더라는 것이다. 그럴 법하였다.
사실 농촌에서 일부러 돈을 들여서 새 옷을 사거나 만들어 허수아비에게 입히는 일은 드물다. 다시 입을 수 없는 식구들의 헌옷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가 허수아비에게 입혔다. 그러나 그건 가난하던 농경사회 시절의 이야기이고 지금은 풍요를 구가하는 잘 사는 시대이기에 허수아비도 새 옷이나 다를 바 없는 다양한 옷을 얻어 입는다.
요즘 허수아비들의 사치스러운 차림새를 보노라니, 가난과 검소를 모르는 현대인들의 생활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 같아 한편으로는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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