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서른아홉 때

2006.12.07 17:09

최은경 조회 수:74 추천:6

내 나이 서른아홉 때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기) 최은경



  지금 서른아홉 살을 생각해보면 나에겐 꽃다운 나이였던 것 같다. 그런데도 우울증 비슷한 걸 심하게 앓았으니 가족은 물론 곁에서 지켜본 신랑이 꽤나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한 번도 내색조차 하지 않았으니 내가 남편과 결혼하기 잘한 모양이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얘기니 2001년 가을로 돌아가 본다. 서른아홉 살이 시작되던 봄부터 이상하리만치 맘이 싱숭생숭하고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만사가 귀찮고 머릿속은 왜 그리도 멍청이처럼 아무 생각도 하기 싫은지 정말 이러다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사태까지 되고 말았다.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면서 혼자 있으면 괜히 서글퍼지고 심하면 눈물을 하염없이 쏟으면서 이 세상을 왜 살아야 하는지 자꾸만 물음표가 던져지더니 가을로 접어들면서부터는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너무나도 정신적으로 고통이 크다보니 육체적으로도 이상이 왔다. 이 세상에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여자라면 누구나 한 달에 한 번씩 마술에 걸린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인데 그것조차 갑자기 멈춰버렸다.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은 이럴 때 사용되나 보다. 그렇지 않아도 서른의 막바지를 지나고 불혹의 나이인 사십이 되어서 여자로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게 아닌가하는 고민 때문에 심하게 앓고 있는 중이었는데 육체마저 그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고 오히려 더 가중시키니 몸이 견뎌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신랑이 마침내 정신과병원도 가고 산부인과도 가자고 마구 졸랐다. 그런 신랑이 왜 그리도 싫고 짜증만 났던지…….

  결국 한 달 넘게 정신치료와 산부인과치료를 병행하면서 깨끗하게 나았다. 돌이켜 보면 다른 부모님들도 다 그러셨겠지만 자랄 때 부모님께서 너무 나약하게 키운 탓에 의지가 약했고, 나이가 든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싫었으며, 그것이 마음속에 숨어 있다가 때가 되자 겉으로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정신과치료를 받으면서 겪은 일들이 하나둘 생각나면서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번진다. 그리 심하지는 않았기에 입원은 하지 않고 3일에 한 번씩만 병원에 다녔는데 활달한 성격과는 달리 하루 종일 집안에만 틀어박혀 먼 산만 바라보면서 울기만 했고, 심지어는 그것이 심해지면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 내리고 싶은 충동도 여러 번 느꼈었다. 아마도 당시에 더 심한 상황까지 갔더라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마다 직장에 다니던 신랑이 중간 중간 나와서 잘 있는지 확인하고, 퇴근도 평소보다 일찍 해서 맛있는 음식도 사주었고, 주말이나 휴일이 되면 집을 떠나 여행을 다니며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이제라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또 산부인과치료는 신경을 너무 쓴 탓에 한 달만 마술에 걸리지 않은 것인데 지구가 멸망이라도 할 것처럼 절망에 빠져서 허우적대니 이 검사 저 검사 다 받고 날짜가 지나니 저절로 회복되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한 달 반이었다. 서른을 마감하면서 나는 대가를 톡톡히 치른 셈이다.

  올해도 한 달 남짓 지나면 다시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된다. 그러면 내 나이도 사십 중반이 된다. 어쩌면 먼 훗날 지금의 내 나이가 꽃다운 나이였다고 되돌아 볼 것이다. 이제는 알 수 있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냥 세월만 보내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살고 있는 신랑도 나이를 먹고 소중한 내 아이들도 무럭무럭 커가고 곁에서 희로애락을 같이 하는 친구들도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려다가 호되게 혼쭐이 났었다는 걸 지금은 추억으로 여기며 담담하게 얘기 보따리를 풀어 놓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곁에서 말없이 항상 지켜봐주고 언제나 든든하게 내편이 되어 주는 신랑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