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얼굴

2007.01.05 09:23

김병규 조회 수:97 추천:24

아내의 얼굴
                                    행촌수필문학회  김병규


나는 가끔 유심히 아내의 얼굴을 바라본다. 거울에 보이는 나 자신의 얼굴을 보듯 찬찬히 살펴본다. 그럴 때마다 아내는 다소 면구스러운 듯 추자 껍질 같은 얼굴을 무엇 때문에 그렇게 뚫어질 듯 보느냐고 핀잔을 준다. 그 핀잔의 내면에는 아내의 속마음이 드러나는 것 같아서 나는 슬그머니 동작을 멈춘다.

사실 아내의 지금 얼굴에는 여성으로서의 매력이 쥐뿔만큼도 없다. 여성은 나이가 들수록 몸을 아름답게 가꾸려고 신경을 쓴다는데, 아내는 젊었을 때나 나이가 든 지금이나 몸단장을 할 줄 모른다. 그녀도 여성인지라, 화장을 짙게 하여 얼굴을 가꾸는 멋쟁이 할머니가 되고 싶었을 것이고, 피부에 윤기가 나고 탱글탱글 살이 붙은 부잣집 할머니의 고운 얼굴처럼 가꾸고도 싶었을 것이다. 그런 마음이면서도 그녀는 자기 몸 가꾸기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얕은 화장으로 검버섯을 지우고 피부손질이라도 정성 들여 하면 호감이 가는 얼굴로 보일 듯싶은데, 얼굴 단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몸 가꾸기에 무관심이었다기보다는 그럴만한 여유가 없이 살아왔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희끗희끗한 머리는 그냥 보아준다 하더라도, 이마에 밭고랑처럼 패어있는 주름살과 듬성듬성 솟아난 검버섯 때문에 볼품이 없다. 코를 분수령으로 양 볼 또한 매력 없이 처져있고. 입가에 잔주름이 수없이 늘어져있다. 턱 밑의 피부는 쭈글쭈글하여 쭈그러진 딴 살을 붙여놓은 것 같다. 사실 호감을 느낄만한 데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얼굴이다. 그런 아내의 얼굴을 볼 때마다 안타깝게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것은, 조그만 양심이라도 내 가슴에 남아있는 까닭이다.

43년 전, 처음 만났을 때 아내의 얼굴은 내 마음을 움켜잡을 만큼 고왔다. 까만 머리에 백옥같이 하얀 피부, 탄력 있던 얼굴에 잔잔한 미소, 두텁거나 얇지도 않아 매력이 잘잘 흐르는 입술은 누가 보아도 미인 축에 드는 얼굴이었다. 신혼 때, 우리 내외가 나들이를 할라치면
“참, 그 각시 예쁘기도 하네!”
이 같은 사람들의 말을 자주 들었었다. 내가 아내를 만나 첫눈에 반한 것은 내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곱던 아내의 얼굴이 나보기도 역겹도록 변한 이유는, 모두가 내 탓이다. 신혼 첫출발부터 나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이었고 독선적이었다. 매사에 아내와 타협을 외면하고 단독으로 결정하여 연약한 아내에게 복종만을 강요했다. 그로 인하여 시행착오를 일으켜 낭패를 보는 경우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젊은 패기만을 믿고, 도산 직전인 부실조합의 농협조합장을 맡았을 때, 집안일은 모두 외면한 채 조합 일에만 매달렸었다. 새벽에 집을 나갔다가 한밤중에 고주망태가 되어 돌아와 일이 잘 안 된다며 절규하는 날 붙잡아주는 일이 아내의 몫이었다. 대학생에서 고등학생, 중학생인 네 아이들을 모두 전주에 유학시키고서도 마음 쓸 겨를이 없던 나여서 그 뒷바라지는 몽땅 아내의 차지였다. 주말마다 자취하는 자식들의 찬거리를 싸들고 변산에서 전주까지 다니던 아내는 몹시 지쳐있었다. 농협을 일으켜 세워보겠다고 불철주야 일하던 직원들의 합숙 찬거리까지 몽땅 아내의 몫이었으니 아내는 과로에 지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과로에 쓰러진 아내는 그 뒤부터 병약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아내는 질병에 찌든 몸으로, 다리를 질질 끌며 집안일과 자식들과 부실한 남편의 뒷바라지까지 군소리 없이 감당해주었다. 특히 자식들의 뒷바라지에는 헌신적이고 희생적이었지만 자식들 입장에서 보기에는 불만족스러운 점이 많았으리라. 아내의 일은 감당하기에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을 것이다. 아내는 초인적인 모성애와 헌신적인 사랑으로 그 무거운 짐을 떠맡았던 것이다.

나는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 네 아이들의 아버지로서, 가장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한 사람이었다. 집안의 모든 일을 병약한 아내에게 넘겨주고, 사회라는 방주 안에 뛰어들어 공명심에 부풀어 허황(虛荒)된 꿈을 꾸고 있었다. 세상일에 끌려 허세를 부렸던 나의 젊은 날이 아내와 지식들에게 빈곤의 고통까지 안겨주었다. 남편으로서의 부실했던 과거가 아내의 건강까지 해치게 하였으니 죄인은 바로 나라고 자책할 수밖에 없다. 아내는 오늘의 현실에 대한 원망의 화살을 나에게 돌려야할 듯싶지만, 불평불만 한 마디 없다. 오히려 나의 처지를 위로하며 대범한 마음으로 포용하고 있다.

황혼이혼이란 말이 심심찮게 보도된다. 젊은 날 나처럼 남편의 역할을 제대로 못한 사람들이 받는 벌일 게다. 나이 들어 아내한테까지 버림받는 불행을 어디다 비길까? 나 또한 아내로부터 버림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하지만 아내는 지난날의 고통을 모두 감추고 단 한 번도 내색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날까지 건강한 몸으로 곁에 있어주어 든든하고 고맙다고 말한다.
아내 자랑은 팔불출이라 한다지만 나는 아내의 사랑에 고개가 숙여진다. 고생으로 찌들고 주름져 일그러진 아내의 얼굴에 지난날의 아픔이 모두 서려있고, 그 얼굴은 고난을 극복한 자랑스러운 승리의 금자탑으로 보여 나는 아내를 존경하고 사랑한다.

부부란, 동등한 인격의 남녀가 만나 서로 부족한 점을 채워주고,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동반자가 되어 나란히 가는 평생동지다. 상대방을 업신여기거나 인격을 무시하는 행동은 파멸을 자초할 뿐이다. 부부의 의미를 깨닫고 지켰더라면 나도 후회 없는 사람이 되었을 텐데, 때늦게 잘못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나의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나는 아내를 사랑하고 인격을 존중하며 잘 대해주고 싶다.

지난날을 회개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쓰면서 아내를 불렀다.
“우리가 이승을 마감하고 다시 태어나 만날 수 있다면, 나와 연을 맺어 부부가 될 수 있겠소?”
하고 물어 본 적이 있었다.
“인연이 되어 만났는데, 다시 태어나도 그 인연 계속해야지요.”
담담하게 말하는 아내의 주름진 얼굴이 우러러 보였다. 빙그레 미소를 짓는 아내의 주름진 얼굴이 천사처럼 보였다.
                    (2007. 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