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편지

2007.01.21 20:38

고강영 조회 수:57 추천:14

두 번째 편지

                                              전북대학교평생교육원수필창작반(야간)고 강 영




편지를 보내고나면 답장이 기다려지고, 받은 뒤에는 답장을 보내고 싶어진다. 나는 답장을 받지 못할 걸 알면서도 써본 편지가 있다.

2003년도 ‘아버지 학교’를 다니면서 아버지에게 편지를 써 오라는 숙제를 받고 내 나이 여섯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받을 주소를 하늘나라라고 하여 편지를 쓴 일이 있다. 물론 답장은 못 받았지만…….

편지에 대한 기억이 또 있다. 무척이나 받고 싶었고 기다려지던 편지가 있었다. 아들을 군에 보내고 소속은 어딘지, 잘 입대를 하였는지, 마음이 타는 것 같은 느낌으로 며칠을 기다린 일이 있었다.

아들이 겉봉을 쓰고 내용물은 활자로 인쇄가 되어 있었는데 괄호 안에 자기 이름만 본인이 적고 내용은 중대장이 보낸 가정 통신문이었다. 편지를 그렇게 반갑게 받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비록 잘 입대하였다는 부대장의 통신문이었지만 나는 그 편지를 받고 엉엉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너무나 기다려지던 편지였고, 내가 아들을 무척이나 사랑 했었던 모양이었다. 그 뒤 나는 아들이 제대할 때까지 편지를 주고받았다.

요사이 기다리던 편지가 있었다. 전화도 주고받을 수 없고 이메일을 보내도 답장이 없었다. 연락할 길이 없었기에 편지만 기다렸다. 마침내 내게 편지가 왔다. 그에게서 온 편지다. 12월 초순인데 연하엽서 안에 또박또박 써내려 마지막까지 꽉 채웠다. 그에게서 온 편지론 두 번째다.

나에게 첫 인상을 지어준 한 통의 편지 이후 11개월 만이다. 역시 주소는 전주우체국 사서함 72-1696호, 그의 수형번호다.

첫 번째 편지를 받은 뒤 6개월여 지난 어느 목요일, 나는 그를 면회하려고 아침 일찍 전주로 갔다. 전주○○○ 대기실에서 2시간을 기다려서야 면회가 허락되었다. 아침 일찍 접수하면 면회가 일찍 가능하다고 하여 8시 30분에 도착, 접수하였으나 나보다 먼저 오신 분들이 많았다.

부름을 받고 6번 면회실로 갔다. 나와 동행한 직원이 먼저 들어갔고 그가 나중에 나왔다. 훤칠한 키에 피부가 하얗고 코가 오똑하며 눈이 서글서글하게 생긴 멋진 남자가 유리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서 있었다.

나를 본 그는 인사도 하기 전에 눈시울이 빨개지더니 이내 울기 시작했다. 굵은 눈물방울이 마구 떨어지는 모습을 본 나의 눈에서도 연민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연신 눈물을 닦는 그의 가슴엔 ‘1696’이라는 숫자가 파란제복 위에 새겨져 있었다.

이○○씨, 4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그는 나에게 죄송하고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우린 첫 대면이었다. 만남 자체가 처음이니 서먹서먹하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우린 이내 형제가 마주한 것처럼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고 서로가 잘 아는 사이처럼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물었다.
"‘나를 어떻게 알았어요?"
이○○ 씨는 모범수인가 보다. 그러니 공장에 나와서 일도 한다 하였다. 그곳에서 신문에 실린 나의 기사를 읽게 되었단다.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에 기대 반, 우려 반으로 나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으나 사실은 기대하지는 않았었는데 나의 편지를 받고 너무너무 고마웠단다.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또 했다.
  "조합장 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믿음의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다짐도 해 보였다.

나는 처음 그의 편지를 받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설레는 마음으로 설과 추석명절을 기해 장수사과와 약간의 성금을 그의 어머니에게 보내 드렸었다. 그런 내용을 화상면회를 하시던 어머니가 얘기해 주신 모양이었다.

나는 그에게 용기를 주고 실망치 않도록 믿음의 편지도 보내 주었다. 믿고 희망을 가지면 미래가 있다고도 썼고, 경제부도나 사업부도는 얼마든지 회복이 가능한 것들이니 실망하지 말라고도 썼다.

우린 서로 얼굴과 마음을 확인한 뒤, 약간의 영치금을 접수하고 돌아 왔다. 그 뒤 한차례 더 면회를 다녀왔고 성경과 찬송가를 그에게 넣어 주었다. 본인이 받은 형기보다 한두 달 빨리 출감할 것 같다고도 하였다.

모범수이기에 그런 혜택이 주어지는 것 같았다. 그 뒤 인터넷을 통한 편지가 가능하다고 하기에 인터넷 편지도 보내 보았지만 답장이 없었다. 경기도 안산에 계시는 그의 어머니께서 화상면회를 하신 뒤에 알려주시는 전화에서 그의 근황을 듣곤 하였다.

그런데 두 번째 편지가 온 것이다. 이번에도 죄송합니다라는 말로 시작되었다.
"조합장님께서 먼저 마음을 열어 주셔서 제가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배려해 주신 것 잊지 않고 있습니다. (중략) 최소한 인간에 대한 신뢰가 깨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중략)

내게 믿음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몇 번이고 인간답게 살겠다는 다짐과 지켜봐 주시라는 부탁이 그 편지 속에 겹겹이 쌓여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기다리던 편지를 받았으니 내겐 기쁨이 두 배가 되는 걸 느끼면서 그 편지를 읽었다. 생명부지의 사람이 신문조각에 실린 조그만 기사 때문에 인연이 되어, 환경은 서로 다른 위치였지만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었고, 가족 이상의 관계를 만들어 주었다. 요사이 나는 그의 다짐에 믿음을 주고 있는 걸 가끔 느낀다. 이럴 때마다 나는 나 자신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하곤 한다.

안산에 계시는 그의 어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제 화상면회를 하는데 아들의 출소일이 오는 2월 2일로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나에게 전화를 하셨단다. 오는 2월 1일 손자와 같이 장수로 인사하러 오겠다는 것이다. 안산에서 장수까지 왔다가 전주로 가시겠다고 한다.

나를 찾아오신다니 고맙기도 하지만 그들이 오시면 어떻게 대접을 할까, 들뜬 마음으로 한 동안 마음을 잡지 못했다. 내가 그의 마음을 알아주고 나의 작은 정성을 투자했더니, 그는 밝은 마음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가 깨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나는 이런 기대가 꼭 지켜지리라 믿는다.

이○○ 씨, 그는 원래 착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를 만나게 된다면 이렇게 말해 주리라.
"경제부도, 사업부도는 큰 문제가 아니다. 사업은 잘 될 때도 있고 못 될 때도 있지만 사랑이 무너지는 사랑부도, 희망이 없어지는 희망부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가족들이 이○○ 씨를 사랑하고 있으니 다시 일어 설 수 있으리라고…… ."

나는 기쁨이 두 배나 되어 마음을 한 곳에 두지 못하고 2월 1일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2007. 1.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