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나의 집

2007.01.30 08:03

이은재 조회 수:70 추천:13

즐거운 나의 집
                                                                                            행촌수필문학회 이은재




중, 고교시절 성모성월의 밤과 어머니날이 있는 5월이면 해마다 전교생 학급대항 합창경연 대회가 있었다. 지정곡, 자유곡 2곡을 불렀다. 중학교 2학년 때 지정곡으로 선정되었던 노래는 '즐거운 나의 집'이었다. 그 당시 읍내에서 자취하고 있었던 나는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집 생각이 나서 눈물이 주르르 흐르곤 했었다. 방과 후에 노래를 연습할 때쯤이면 해가 기울어 더욱 마음이 서러웠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내 나라 내 기쁨 길이 쉴 곳도 / 꽃 피고 새 우는 집 내 집 뿐이리/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내 집 뿐이리// 고요한 밤 달빛도 창 앞에 흐르면/ 내 푸른 꿈길도 내 잊지 못하리/ 저 맑은 바람아 가을이 어디뇨/ 벌레 우는 곳에 아기별 눈뜨네/ 오 사랑 나의 집 즐거운 나의 벗 내 집 뿐이리』


세계인의 애창곡 ‘즐거운 나의 집(Home sweet Home)’은 1823년 영국의 ‘헨리 비숍’이 작곡한 노래이다. 비숍의 오페라 중에 나오는 노래로 시칠리아 민요에서 따온 노래인데 유독 이 노래만이 사랑을 받았다. 후에 미국의 극작가이며 기자, 문인으로 활동했던 ‘존 하워드 패인’이 가사를 붙여 작곡가의 조국인 영국에서 보다 미국에서 더 유명해진 노래가 되었다.


미국 남북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북부 연합군 1만 2천 명, 남부동맹군 5천 명의 사상자를 낸 1862년 버지니아의 레파하녹크 리버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양쪽 진영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다. 이들은 낮에는 전투를 하고 밤에는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매일 밤 음악회를 열었는데, 어느 날 밤 북군의 군악대는 “Home Sweet home"이라는 아주 특별한 곡을 연주했다. 그 멜로디는 바람을 타고 전장의 진영으로 울려 퍼졌다. 그 순간 그리운 가족, 연인에게 편지를 쓰고 있던 군인들은 사무친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텐트 밖으로 뛰쳐나와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
이 멜로디는 강 건너편에 주둔하고 있던 남부군 진영에도 울려 퍼졌다. 그러자 남부군 군악대도 덩달아서 이 노래를 연주하고 남부군 병사들도 다 함께 합창을 했다. 그들은 상대방이 적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강가로 뛰어나와 서로 얼싸안고 모자를 하늘 높이 던져 올리며 환호했다. 이 장면을 취재했던 ‘프랭크 막심’은 한마디로 이렇게 표현했다.
“다들 미쳤다.”
라고. 서로 적이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저렇듯 환호를 하니 더는 전쟁을 할 수 없어서 24시간 휴전을 선언하였고 그동안 서로 고향의 가족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즐거운 나의 집’이란 노래 앞에선 아군과 적군도 하나가 되었다. 멀리 고향을 떠나 지친 여정에 가장 힘이 나는 말은 따뜻한 가정이었다. ‘고향, 가정’은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최후엔 누구나 돌아가고 싶어 하는 본향이 아닐까. 긴장이 감도는 적지에서 서로에 대한 적대감을 따뜻하게 녹여준 노래, ‘즐거운 나의 집’은 그런 사연 때문에 더욱 감동을 주며 유명해진 노래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홈 스위트 홈’의 작사자 ‘존 하워드 패인’은 정작 집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 노랫말은 그가 프랑스 파리에서 무일푼으로 비참하게 거리를 배회할 때 쓴 것이다. 그는 1851년 3월 3일 C. E 클락에게 보냈던 편지에서 이렇게 심경을 토로하였다.

“한 번도 내 집을 가져본 적이 없을뿐더러 그런 바람도 없었던 내가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집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 되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야”
그는 이 편지를 쓴지 1년 뒤 1852년 4월 10일 북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가정을 그리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존 하워드 패인은 오랜 방랑생활을 하면서 편안히 쉴 수 있는 달콤한 가정을 희구하였지만 끝내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즐거운 나의 집이란 노랫말로 많은 이들에게 가정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비록 그 자신은 꿈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그의 노래를 듣고 거리를 헤매던 방랑자들이 가정으로 돌아왔다면 결국, 그의 꿈은 이룬 것이리라.


미국 뉴욕 항에 대통령과 국무위원을 포함한 수많은 인파가 도열하여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군함이 도착하였고 군악대의 국가 연주와 예포가 울려 퍼졌다.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은 모자를 벗고 애도의 뜻을 표했다. 군함에서 내린 것은 한 유해였다. 그는 위대한 정치가도 아니고, 전쟁터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군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한 시민의 유해였다. 그 유해는 "홈 스위트 홈(Home Sweet home)"의 작사자 존 하워드 패인(John Howard Pain)이었다. 먼 이국 땅에서 죽은 한 시민의 유해를 영접하는 자리에서 대통령은
“그는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 일인지, 우리가 지내는 일 가운데 무엇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인지를 가르쳐 주었다.”
라고 했다. 그토록 가정을 그리워하다가 먼 타국 아프리카에 묻혀있던 '홈 스위트 홈'의 집 없는 작가는 미국정부의 배려로 워싱턴의 오크 언덕 공동묘지에 그의 영원한 집을 갖게 되었다.


존 하워드 패인은 지구 방방곡곡을 떠돌아다닌 방랑자였기에 가정의 소중함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아마도 방랑생활을 그만 끝내고 따뜻한 가정으로 돌아가고픈 염원으로 이 노래를 썼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가사에는 가정의 그리움이 진하게 배여 있다. 그의 노래는 그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자취하던 나를 눈물짓게 하였고, 남북전쟁 때 병사들의 마음에 적대감을 없애주고 고향을 그리워하게 하였다. 또한, 집을 떠나 방황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와 따뜻한 가정으로 귀환하도록 속삭여 주었다. 어떤 훈계보다도, 어떤 종용보다도 더 마음을 움직여 주며 심금을 울린 노래였다.


세상엔 수많은 노래가 있지만 ‘Home Sweet home’의 노래처럼 가슴 따뜻한 노래는 집을 떠나 방황하는 사람들을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도록 인도한다.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이 노래를 들으면서도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특히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이 노래를 배워 부르면서도 가정이 얼마나 고맙고 소중한지를 잘 느끼지 못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가난이 방문으로 들어오면 사랑은 창문으로 나간다고 한다. 돈이면 모든 만사가 해결되는 요즘 세상에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꼭 풍요한 물질만이 행복은 아닐 것이다. 가정을 이루는 것은 값비싼 가구나 소파가 아니라 그 소파에 앉은 어머니의 따뜻한 미소이며, 가정의 행복은 멋지게 꾸민 저택의 푸른 잔디가 아니라 그 잔디에서 터져 나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일 것이다. 가정은 부모가 존경받고 아이들이 존중받으며 왕궁도 부럽지 않은 곳이기에 돈도 그다지 위세를 부리지 못하는 곳이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서 불멸의 노래로 남을 노래,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작은 집 내 집 뿐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