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글맞다
2007.03.02 08:36
징글맞다
鄭 木 日
‘징글맞다’라는 말을 하면, 딸 순실의 어린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은 결혼해서 살지만, 초등학생일 적에는 유독 벌레를 싫어해서 바퀴벌레 한 마리만 나타나도 비명을 지르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기겁을 했다. 벌레를 보면 “징글맞다”고 꽁무니를 뺐다. 등산을 하다가 뱀을 만나게 되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울면서 도망질을 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몸서리를 쳤다. 간신히 달래어 안심을 시키고, 얼굴을 쳐다보면 눈물이 맺혀있다. 풍뎅이, 방아제비, 메뚜기, 매미 등 곤충들을 보면 뒤로 물러선다.
나는 이런 딸에게 하루는 메뚜기 한 마리 잡아서 “눈을 감고 손을 내봐라. 좋은 것을 선물하겠다.”며 쥐어주었다.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었으리라. 야릇한 촉감에 눈을 뜨고 손바닥 안의 메뚜기를 확인한 딸은 “악-”하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그 자리에 덜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놀래 달려온 아내가 나의 엉뚱한 짓을 책망하고는 딸을 달래 방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얼떨떨하고 무안했다. 예견은 했지만 과민한 반응 자체가 엉뚱하다 싶었다. 곤충을 한 생명체로 보지 않고 징그럽게만 여긴다는 것은 고정 관념일 수밖에 없다. 나는 딸에게 벌레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생명체임을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징글맞다’는 말로써 간단히 툇자를 맞은 것이다.
내 소년기의 여름은 곤충과 숨바꼭질하던 시절이었다. ‘곤충채집’이란 여름 방학 숙제가 있었고, 들판으로 나가면 아이들은 영락없이 한 마리씩의 곤충이나 다름없었다. 매미 한 마리, 나비 한 마리를 잡기 위하여 숨을 죽이고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매미가 우는 나무 아래선 애가 타고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다. 뜨거운 뙤약볕에 온 몸에서 땀이 흘려 내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매미 소리에 미루나무 잎새들이 새파랗게 흔들렸다. 어쩌면 가지와 잎새들도 매미를 따라 합창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나무에 배를 찰싹 붙이고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나도 나무에 붙은 한 마리 매미나 다름없었다. 가지에 붙은 매미와의 간격이 가까워질수록 숨 막히는 초조함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터질 듯했다. 매미가 갑자기 울음을 멈추었다. 눈치를 채고 날아갈 채비를 하는 것일까. 오르던 동작을 멈춘 채 매미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뭉게구름이 유유히 떠 흘러가고 있었다.
“맴엠~쓰르르~”
유난히 큰 매미의 겹눈에 들키지 않을까. 뽀쪽한 촉각에 미세한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을까…. 가까스로 매미를 잡을 수 있는 거리만큼 접근하였다. 숨을 멈추고 손을 부채살처럼 펴 들었다. 잽싸게 덮쳐야 한다. 그림자를 보인다거나 이상한 기미를 보이면 재빨리 날아가고 말 것이다. 이 때의 허탈감을 한두 번 맛본 게 아니다.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매미가 울음을 뚝 멈췄다. 도망하려고 생각하는 순간일 듯했다. 순식간에 손으로 덮쳤다. 손바닥에 가득 차는 매미의 촉감, 온 몸에 희열감이 넘쳐났다. 손바닥에 보물을 쥔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이 세상을 손아귀에 쥔 것 같았다. 손으로 만져지는 까칠까칠한 촉감, 꿈틀대는 매미의 몸매가 여간 간지럽지 않았다. 온 몸이 근질근질 하고 웃음이 솟구칠 듯했다. 행여 날아갈 새라 살그머니 손을 펴서 보곤, 도로 쥐고만 있었다. 매미는 움켜쥔 손속에서도 힘차게 소리를 내질렀다.
‘맴엠~ 쓰르르~“
손가락 사이로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손바닥이 더욱 간질간질 했고, 우렁찬 소리가 손바닥을 열어제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잡은 매미를 자랑스럽게 보여줄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지금의 기분을 누구에게라도 알리고 싶었다. 숨 가쁘게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를 찾았다.
“옴마- 옴마-”
엄마는 집에 계시지 않았다. 신명이 나지 않았다. 날이 저물도록 매미소리를 들었다. 노래가 아니었다. 손바닥으로 눌러도 멈추지 않는 소리의 분수였다. 손바닥이 파르르 떨리고 심장이 떨리고 세상이 떨리는 듯했다. 손바닥으로 움켜쥔다고 하여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한 생명이 소리의 분수가 되어 뿜어 올라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어린 순실에게 곤충들의 촉감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징글맞다”란 말로 무안을 당하곤 했다. 만약에 사마귀를 불쑥 보여준다면 어떤 표정일까, 그 끔찍스런 장면을 상상해보며 웃음을 참지 못한다.
중학생이었을 때 어머니는 곧잘 나에게 쑥물을 마시게 했다. 인정쑥을 찧어서 사발에 담아 주셨다. 나는 여러 번에 재촉과 권유에 못 이겨 마시고 나서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다시곤 했다.
“얘야, 입에 쓴 것이 약이 된다는 구나. 맛이 어떠니?”
“징글맞다”
나는 어머니의 정성에도 아랑곳없이 입가에 묻은 쑥물을 손으로 쓱 닦으며 대답했던 것이다. 이 때 ‘징글맞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인지 알 수 없지만, 어째서 불쑥 이런 말이 불거져 나왔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그저 만족한 웃음을 띠시기만 했다.
어느 날, 찻집에서 20대 여인 세 명이 대화를 나누고 걸 들었다.
“얘, 숙자 있지? 따라다니는 사람과 결혼한대. 말끝마다 ‘징글맞다’더니...”
“속으로 좋으면서 한 소리일 테지... 앙큼하게!”
“그럼, ‘징글맞다’는 게 ‘좋다’는 소리니?”
“그렇지 뭐....”
“호호호....”
‘징글맞다’는 ‘몹시 보기 싫다’는 뜻인데, 곧잘 반어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감을 먼저 보낸 한 할머니가 살아온 삶을 회고하면서 ‘징글맞다’고 진저리를 치는 시늉을 하다가도, 영감을 못 잊어하며 “그래도 그 때가 좋았제...”하고 눈물을 적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징글맞다’는 갑작스러이 닥친 일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지만, 오래오래 음미하여 느낀 감탄사와 같은 말이 되기도 한다. 미운 정 고운 정의 미묘한 감정이 얽혀 삶의 한 순간을 되살려 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아름답고 황홀한 순간과 느낌이 있다면, 추하고 징글맞은 순간과 느낌도 있을 것이다.
아름답고 달콤하고 고운 말만이 삶을 즐겁게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따금씩 “징글맞다‘는 말이 그리워진다. 이젠 어른이 된 딸에게서 ”징글맞다“는 말을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정성스러이 쑥물을 만들어 주시는 어머니도 돌아가셨으니 ”징글맞다“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됐다. 예쁘다거나 밉다거나 하는 작은 표현보다 ‘징글맞다’란 말은 온 육감과 신경으로 느껴 쏟아내는 큰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가끔 ‘인생이 징글맞다’고 하는 속뜻을 이제야 알 듯하다. 상기하고 싶지 않은 일들 속에 아련하고 끈끈한 인생의 맛과 온기가 우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징글맞다’는 바퀴벌레를 볼 때의 기분이나 쑥물 맛 같은 것일 수도 있으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말속에 외면과 싫음만이 아닌, 온기와 미소도 있음도 알게 되고, 은연중 그 말이 그리워진다.
鄭 木 日
‘징글맞다’라는 말을 하면, 딸 순실의 어린 모습이 떠오른다. 지금은 결혼해서 살지만, 초등학생일 적에는 유독 벌레를 싫어해서 바퀴벌레 한 마리만 나타나도 비명을 지르고 오만상을 찌푸리며 기겁을 했다. 벌레를 보면 “징글맞다”고 꽁무니를 뺐다. 등산을 하다가 뱀을 만나게 되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울면서 도망질을 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몸서리를 쳤다. 간신히 달래어 안심을 시키고, 얼굴을 쳐다보면 눈물이 맺혀있다. 풍뎅이, 방아제비, 메뚜기, 매미 등 곤충들을 보면 뒤로 물러선다.
나는 이런 딸에게 하루는 메뚜기 한 마리 잡아서 “눈을 감고 손을 내봐라. 좋은 것을 선물하겠다.”며 쥐어주었다.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 때쯤이었으리라. 야릇한 촉감에 눈을 뜨고 손바닥 안의 메뚜기를 확인한 딸은 “악-”하며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그 자리에 덜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놀래 달려온 아내가 나의 엉뚱한 짓을 책망하고는 딸을 달래 방으로 데리고 갔다.
나는 얼떨떨하고 무안했다. 예견은 했지만 과민한 반응 자체가 엉뚱하다 싶었다. 곤충을 한 생명체로 보지 않고 징그럽게만 여긴다는 것은 고정 관념일 수밖에 없다. 나는 딸에게 벌레도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생명체임을 알리고 싶었다. 그런데 ‘징글맞다’는 말로써 간단히 툇자를 맞은 것이다.
내 소년기의 여름은 곤충과 숨바꼭질하던 시절이었다. ‘곤충채집’이란 여름 방학 숙제가 있었고, 들판으로 나가면 아이들은 영락없이 한 마리씩의 곤충이나 다름없었다. 매미 한 마리, 나비 한 마리를 잡기 위하여 숨을 죽이고 신경을 곤두세우곤 했다.
매미가 우는 나무 아래선 애가 타고 가슴이 방망이질을 했다. 뜨거운 뙤약볕에 온 몸에서 땀이 흘려 내려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매미 소리에 미루나무 잎새들이 새파랗게 흔들렸다. 어쩌면 가지와 잎새들도 매미를 따라 합창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나는 나무에 배를 찰싹 붙이고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나도 나무에 붙은 한 마리 매미나 다름없었다. 가지에 붙은 매미와의 간격이 가까워질수록 숨 막히는 초조함과 안타까움에 가슴이 터질 듯했다. 매미가 갑자기 울음을 멈추었다. 눈치를 채고 날아갈 채비를 하는 것일까. 오르던 동작을 멈춘 채 매미를 응시하고 있었다.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미루나무 가지 사이로 뭉게구름이 유유히 떠 흘러가고 있었다.
“맴엠~쓰르르~”
유난히 큰 매미의 겹눈에 들키지 않을까. 뽀쪽한 촉각에 미세한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을까…. 가까스로 매미를 잡을 수 있는 거리만큼 접근하였다. 숨을 멈추고 손을 부채살처럼 펴 들었다. 잽싸게 덮쳐야 한다. 그림자를 보인다거나 이상한 기미를 보이면 재빨리 날아가고 말 것이다. 이 때의 허탈감을 한두 번 맛본 게 아니다.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걸까. 매미가 울음을 뚝 멈췄다. 도망하려고 생각하는 순간일 듯했다. 순식간에 손으로 덮쳤다. 손바닥에 가득 차는 매미의 촉감, 온 몸에 희열감이 넘쳐났다. 손바닥에 보물을 쥔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이 세상을 손아귀에 쥔 것 같았다. 손으로 만져지는 까칠까칠한 촉감, 꿈틀대는 매미의 몸매가 여간 간지럽지 않았다. 온 몸이 근질근질 하고 웃음이 솟구칠 듯했다. 행여 날아갈 새라 살그머니 손을 펴서 보곤, 도로 쥐고만 있었다. 매미는 움켜쥔 손속에서도 힘차게 소리를 내질렀다.
‘맴엠~ 쓰르르~“
손가락 사이로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손바닥이 더욱 간질간질 했고, 우렁찬 소리가 손바닥을 열어제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잡은 매미를 자랑스럽게 보여줄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지금의 기분을 누구에게라도 알리고 싶었다. 숨 가쁘게 집으로 돌아와서 엄마를 찾았다.
“옴마- 옴마-”
엄마는 집에 계시지 않았다. 신명이 나지 않았다. 날이 저물도록 매미소리를 들었다. 노래가 아니었다. 손바닥으로 눌러도 멈추지 않는 소리의 분수였다. 손바닥이 파르르 떨리고 심장이 떨리고 세상이 떨리는 듯했다. 손바닥으로 움켜쥔다고 하여도 도저히 막을 수 없었다. 한 생명이 소리의 분수가 되어 뿜어 올라 세상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어린 순실에게 곤충들의 촉감을 알려주고 싶었지만, “징글맞다”란 말로 무안을 당하곤 했다. 만약에 사마귀를 불쑥 보여준다면 어떤 표정일까, 그 끔찍스런 장면을 상상해보며 웃음을 참지 못한다.
중학생이었을 때 어머니는 곧잘 나에게 쑥물을 마시게 했다. 인정쑥을 찧어서 사발에 담아 주셨다. 나는 여러 번에 재촉과 권유에 못 이겨 마시고 나서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다시곤 했다.
“얘야, 입에 쓴 것이 약이 된다는 구나. 맛이 어떠니?”
“징글맞다”
나는 어머니의 정성에도 아랑곳없이 입가에 묻은 쑥물을 손으로 쓱 닦으며 대답했던 것이다. 이 때 ‘징글맞다’는 말이 적절한 표현인지 알 수 없지만, 어째서 불쑥 이런 말이 불거져 나왔는지 모른다. 어머니는 그저 만족한 웃음을 띠시기만 했다.
어느 날, 찻집에서 20대 여인 세 명이 대화를 나누고 걸 들었다.
“얘, 숙자 있지? 따라다니는 사람과 결혼한대. 말끝마다 ‘징글맞다’더니...”
“속으로 좋으면서 한 소리일 테지... 앙큼하게!”
“그럼, ‘징글맞다’는 게 ‘좋다’는 소리니?”
“그렇지 뭐....”
“호호호....”
‘징글맞다’는 ‘몹시 보기 싫다’는 뜻인데, 곧잘 반어법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영감을 먼저 보낸 한 할머니가 살아온 삶을 회고하면서 ‘징글맞다’고 진저리를 치는 시늉을 하다가도, 영감을 못 잊어하며 “그래도 그 때가 좋았제...”하고 눈물을 적시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징글맞다’는 갑작스러이 닥친 일에 대한 반응일 수도 있지만, 오래오래 음미하여 느낀 감탄사와 같은 말이 되기도 한다. 미운 정 고운 정의 미묘한 감정이 얽혀 삶의 한 순간을 되살려 주는 힘을 지니고 있다. 아름답고 황홀한 순간과 느낌이 있다면, 추하고 징글맞은 순간과 느낌도 있을 것이다.
아름답고 달콤하고 고운 말만이 삶을 즐겁게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니다. 이따금씩 “징글맞다‘는 말이 그리워진다. 이젠 어른이 된 딸에게서 ”징글맞다“는 말을 다시는 들을 수 없을 것이다. 정성스러이 쑥물을 만들어 주시는 어머니도 돌아가셨으니 ”징글맞다“는 말을 할 수가 없게 됐다. 예쁘다거나 밉다거나 하는 작은 표현보다 ‘징글맞다’란 말은 온 육감과 신경으로 느껴 쏟아내는 큰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가끔 ‘인생이 징글맞다’고 하는 속뜻을 이제야 알 듯하다. 상기하고 싶지 않은 일들 속에 아련하고 끈끈한 인생의 맛과 온기가 우러나기 때문일 것이다. ‘징글맞다’는 바퀴벌레를 볼 때의 기분이나 쑥물 맛 같은 것일 수도 있으나, 세월이 지나고 보니 말속에 외면과 싫음만이 아닌, 온기와 미소도 있음도 알게 되고, 은연중 그 말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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