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의 겨울

2007.03.07 09:58

이은재 조회 수:57 추천:5

금강산의 겨울
                                                        행촌수필문학회 이은재



“금강산 찾아가자 일만 이천 봉, 볼수록 아름답고 신기하구나….”
유년시절 동요를 부를 때마다 갈 수 없는 금강산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끝없는 동경이 일었었다. 갈 수 없는 곳에 대한 집착이었을까. 어떤 날 밤엔 도깨비감투를 쓰고 몰래 금강산으로 훨훨 날아가는 꿈을 꾸기도 했었다.

   그리운 금강산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 이천 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 만민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더럽힌 지 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비로봉 그 봉오리 짓밟힌 자리 흰 구름 솔바람도 무심히 가나
  발 아래 산해 만리 보이지 마라 우리 다 맺힌 원한 풀릴 때까지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더럽힌 지 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1961년 KBS는 조국의 산하를 예찬하고 6.25 11주년을 맞아 멀리 중국, 러시아, 북한 등지에 살고 있는 동포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곡으로 조국강산을 주제로 한 노래의 제작을 기획했다. 그때 인천여고 음악교사였던 최영섭은 작곡 의뢰를 받고 밤낮 강과 산, 바다에 관한 詩를 써 온 서정시인 한상억을 찾아가 작사를 의뢰했다. 1주일 후 「그리운 금강산」을 받아 든 최영섭은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그는 막힘없이 선율이 떠올라 하룻밤 만에 피아노 반주곡, 관현악 반주까지 작곡을 끝냈다. 수없이 퇴고를 거듭하던 최영섭이 하룻밤에 모든 작곡을 끝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리운 금강산' 만큼은 단 한 번의 가필도 없었다. 신들린 듯 긁었다.”

시인 한상억은 평생 산과 강, 바다를 주제로 한 자연을 미치게 사랑했던 서정시인이었다. 그는 이미 광복 전에 금강산을 여러 번 다녀왔기에 금강산에 대한 기억이 생생했다. 한상억과 최영섭의 만남은 6.25 전쟁의 상흔이 절절하던 1953년 경 문화계 인사 모임에서 조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같은 고향이라는 동질감으로 특별히 가까워졌다. 은행원 출신으로 정미소까지 가지고 있던 부자 한상억 시인은 교사로 어렵게 사는 최영섭을 물심양면 도와주었다. 이런 시인과 작곡가의 특별한 만남으로 불멸의 노래로 남을「그리운 금강산」이 탄생된 것이다.

그리운 금강산은 방송이 나가자마자 해외 동포들로부터 고국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울었다는 팬레터가 수없이 왔고 성악가들은 앞 다투어 자기의 레퍼토리로 삼으려 하였다. 이러한 범국민적 열기에 힘입어 1972년 남북적십자회담이 개최될 때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을 위한 곡으로 채택되어 연일 그리운 금강산을 틀어주며 ‘통일 주제가’라는 명칭과 함께 국민가곡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리운 금강산은 1985년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이산가족 고향방문 예술단 교환 공연'의 레퍼토리로 채택되었다. 당시 북한 주민들은 다른 곡에 대해서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는데 소프라노 이규도가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자 전 관중이 기립 박수를 하는 등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고 한다.

공연이 끝난 후 다른 곡들에 대해서는 '남조선 음악은 국적불명의 퇴폐적인 음악'
이라고 비난을 했지만 ‘그리운 금강산’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이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공개적인 찬사를 보낼 수 없어 묵시적으로나마 동조를 한 것이라는 설에서부터, 공연당시에는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분노를 하였다는 설, 북조선 체제를 그리워하는 남조선 인민들의 열망을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금강산을 빌어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역 선전에 이용했다는 설 등 다양하다.

금강산의 가사는 종종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다. 민족화합을 조성하는 데에 적합하지 않다는 표현이다. 이를테면 '더럽힌 지 몇 해'와 '우리 다 맺힌 원한'이라는 표현이다. 그래서 '더럽힌 지 몇 해'는 '못 가본 지 몇 해'로, '우리 다 맺힌 원한'은 '우리 다 맺힌 슬픔'으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금강산은 계절별로 부르는 이름도 다르다. 금강산의 봄을 금강산(金剛山), 금강산의 여름을 봉래산(蓬萊山), 금강산의 가을을 풍악산(楓岳山), 금강산의 겨울을 개골산(皆骨山)이라 부른다. 나는 겨울의 금강산인 개골산을 보고 싶었다.

금강산으로 가는 여정은 지척에 있으면서도 너무 멀었다. 대전역에서 KTX 서울행 첫 기차를 타고 7시 20분에 서울역에 도착하여 관광버스를 타고 서울 - 홍천 - 인제 - 원통 - 진부령 - 고성까지 긴 시간을 달렸다. 최북단 '대진항'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고, 아산 화진포에 집결했다. 남측출입사무소에서 검색을 받고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측출입사무소에서 또 한 번의 검색을 받은 뒤 북한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연두색 울타리 안의 도로만 밟을 수 있는 곳이었다. 달리는 버스 옆으로 양양에서 원산까지 이어진다는 '동해북부선' 철로가 길게 뻗어있다. 녹슨 철로엔 겨울바람만 쓸쓸히 달리고 있었다. 통일이 되면 다시 달려보고 싶은 염원이었을까. 반세기를 넘는 오랜 세월 속에서도 제 모습을 지키려고 애쓰는 동해북부선 철로는 온갖 풍상을 견디며 꿋꿋하게 버텨내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곳인 줄만 알았던 155마일 군사분계선은 갈대밭 사이로 1,290개의 나무 말뚝으로 표시하고 있었다. 군사분계선을 지나 북한 땅에 초입을 떼면 금강산의 마지막 봉우리 '낙타봉'이 있고 그 아래 거울처럼 맑은 호수라는 '감호'가 있다. 낙타봉은 온통 바위산이며 저마다 기이한 형상을 한 황량한 얼굴로 남측 방문객을 맞는다. 저토록 나무 한 포기조차 자라지 못하도록 황폐한 것은 6.25때 금강산을 차지하려고 치열한 격전을 치른 후유증이라는 가이드의 설명이었다. 결국 인간의 욕심이 자연을 재기불능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산기슭에서 삼삼오오 떼 지어 붉은 기를 들고 우릴 지켜보고 있는 북한 군인들은 사진촬영 등을 막기 위해 감시하기 위해서라니 안타깝기만 하다.

처음 만난 북한의 '온정리' 마을은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민둥산 아래 초라한 농가들이 옹기종기 오롯이 모여 저녁밥 짓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경은 참 정겨웠다. 자전거를 탄 북한 주민들이 간간이 거리를 오가는 한적하고 조용한 풍경은 유년시절의 고향풍경을 보는 듯했다. 아이들은 썰매를 타고 얼음을 지치며 놀고 있는데 남루한 옷차림과 퇴색한 집들이 가난을 묵시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2박3일간 머물렀던 해금강 호텔 창문을 열면 너무도 아름다운 풍경에 압도된다. 장전항(고성항)은 활 시위를 당기고 있는 모양이라서 '장전'이라고 이름 지어졌고, 이곳 항구는 고래잡이배들이 많이 몰렸던 곳이다. 내항 깊숙이 들어온 장전항은 호수처럼 잔잔하며 비경을 뽐낸다. 해금강호텔은 장전항에 정박한 배 위에 지은 선상호텔로 파도가 출렁이면 호텔도 슬며시 출렁인다. 해상으로 금강산관광이 처음 열리던 때 장전항으로 배들이 입항하였고, 한꺼번에 밀려드는 관광객을 수용하기 위해 급하게 필리핀에서 배를 수입해 배 위에 호텔을 지었다고 한다. 장전항을 굽어보고 있는 산은 천불산으로 봉우리들이 불상을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북한 땅을 밟으며 함께 달렸던 '동해북부선' 철로는 장전항을 지나 원산항까지 이어진다. 그 철로를 볼 때마다 마음이 시렸다. 동강난 국토의 분단으로 달리기를 멈추어버린, 잃어버린 세월을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정적에 싸여 있는 밤, 연말연시를 맞은 남한에선 취객들의 고성방가와 음주단속, 경찰관의 호르라기 소리로 시끌벅적할 텐데 이곳 장전항 주변 거리는 사람의 흔적은 없고 하얀 눈과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이 정적에 싸여 쓸쓸하기만 하다.

금강산은 휴전선 바로 지척에 있었다. 북한의 해금강은 북한의 민통선 안에 있는 구역으로 남한의 통일전망대가 보이는 곳이다. 우리나라가 북쪽으로 조금만 더 넓었어도 금강산은 남한 땅이 되었을 거라는 아쉬운 생각에 안타깝기만 했다. 내가 자꾸만 아쉬워하자 아들녀석이 한마디 일침을 가했다.
"못 사는 북한이 그거라도(금강산) 갖고 있어야 먹고 살지."
제법 성숙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금강산은 내금강, 외금강, 신금강, 해금강 4개 지역으로 구분된다. 최고봉인 비로봉이 솟아 있는 중앙 연봉을 경계로 서쪽은 내금강, 동쪽은 외금강, 외금강의 남쪽 계곡은 신금강, 동단의 해안부는 해금강이다. 나는 외금강과 해금강을 섭렵했다. 계절별로 금강산을 가보려고 한다. 사계절을 본 후에야 금강산을 제대로 말 할 수 있을 것 같고, 기행수필을 쓸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다음에 찾아갈 금강산의 봄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부터 몹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