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와 할아버지

2007.03.21 08:56

김종승 조회 수:44 추천:6

돼지와 할아버지
                                                                                        월담 김종승




우리는 살면서 만남과 이별을 계속한다. 내가 만난 이 사람은 만남도 이별도 없다. 그냥, 머문 사람이다. 신은 그에게 명했다. 할아버지는 눈과 귀를 막고 따랐다. 하늘의 뜻을.

1.만남

작년 나는 중국을 방문했었다. 그곳은 대련(大蓮)이라는 곳이며 친구가 그곳에서 1,000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의류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공장 숙소 옆 후미진 곳에 축사가 있고, 식당의 잔밥으로 돼지를 키우며 가끔 직원들이 그 돼지들을 잡아 회식을 한다고 했다.
도시에서 낳고 자란 나는 그들이 신기하게만 보였다. 그들은 식탁에서 자주 본 돼지가 아니었다. 나를 닮아 더 귀여운 작은 눈의 쌍꺼풀. 그 안쪽으로 마치 술집아가씨가 멋을 내느라 붙인 것 같은 긴 속눈썹. 쫑긋이 올려 붙은 귀, 부드럽고 꼬불거리는 은빛 털. 중국에 와서 새로 발견한 돼지의 아름다움이다.
그 돼지들은 정말 나에게 신비 이상이었다. 어떤 놈은 엉덩이가 ‘마릴린 몬로’ 보다 더 크고, 더 씰룩거렸다. 그런 놈들이 매력적인 궁둥이를 흔들고 꿀꿀대며 낯선 방문자를 가리지도 않고 먹이를 달라며 따라다녔다. 나는 손에 먹을거리가 없는 것이 아쉬웠다. 재미있기도 하고 장난기가 발동하여 돼지들과 발로 둘 만의 놀이를 즐겼다.
친구는 재밌어하는 나의 기분을 깨기라도 하듯, 중국 방문을 환영하는 뜻에서 이 돼지 중 하나를 잡을 것이니 골라 보라 했다. 나는 놀라며 무슨 말이냐 했다. 평소 좋아하던 돼지 삼겹살은 잊어버린 채 이렇게 귀여운 돼지를 어떻게 먹느냐며 극구 사양했다. 인근 중국식당에서 해산물로 식사를 할 것이니 돼지를 잡지 말라고 친구에게 사정을 했다. 그는 말없이 웃으며 나를 비아냥거리는 듯했다.
그때 어떤 할아버지가 나타났다. 키가 작고 주름이 많으며 얼굴은 검은 편이고 몸이 말랐어도 팔뚝은 굵었다. 그 팔에는 강하게 보이는 핏줄이 도드라졌다. 입술이 두터워 말수가 없을 것 같은 그는 큰 검은 가방을 당차게 내려놓으며 친구에게 눈짓을 했다. 그리고는 때가 꼬질하게 묻고 피로 얼룩져 있으며 경력을 한눈에 알 수 있을 것 같은 번질번질한 비닐 앞치마를 목에 걸었다. 돼지들은 방문자들이 많아 좋은 듯, 여기저기 이 사람 저 사람을 따라 다녔고 마치 어렸을 때 손님이 오면 무작정 좋아하며 따르는 아이들 같았다.
우리 안으로 영감이 선뜻 들어섰다. 들어온 할아버지를 본 돼지들은 큰 덩치답지 않게 놀라며 심하게 몸을 움츠리고 구석진 곳으로 모여들었다.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돼지들은 일시에 고개를 숙이며 한 곳에 코를 박고는 뒷다리를 심하게 떨었다. 너무 놀란 듯 소리도 내지 못했다. 영감은 손에 침을 뱉으며 아무 놈이나 장갑 낀 손에 잡히는 대로 돼지의 꼬리를 잡아 끌어내려 했다. 큰 궁둥이에 동그랗게 감아 올려진 짧은 꼬리가 노인의 손에 닿기라도 하면 그 돼지는 그야말로 돼지 멱따는 소리를 질렀다. 워낙 완강히 반항하고 버티니 영감은 돼지꼬리를 놓치기 일쑤였다. 그 돼지들은 필사적이었다.
그중 한 마리가 완벽하게 영감의 손에 걸렸다. 그 놈은 마치 자기는 안 된다며, 자세히 보라며, 실수하는 거라고 말하는 듯 눈을 있는 대로 크게 뜨고 소리소리 질러댔다. 노인은 돼지소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오히려 괜찮다는 듯 돼지의 궁둥이를 두드리며 안심을 시켰다. 인근 야산까지 돼지의 큰 소리는 울려 퍼졌고 메아리를 냈다. 간혹 돼지의 큰 소리에 공장 사람 몇은 건물 밖으로 몸을 내밀며 박수를 치기도 했다.
다음날 아침 식탁에는 그 돼지는 요리로 변형되어 우리 앞에 놓여졌다. 우리는 조용히 식사를 했다. 누구도 어제의 귀여운 돼지에 대한 얘기를 하지 않았다. 나의 귓전에는 그놈의 소리가 쟁쟁하고, 맑은 눈과 긴 속눈썹의 여운이 남아 있었지만 입은 달콤했다. 확실히 집돼지를 막 잡아 숙성시켜 먹으니 친구의 말대로 맛은 좋았다. 그리고 또 다음날 아침 그놈은 간다 온다 말도 없이 나의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시간이 흘렀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와 바쁜 중에도 문득 문득 생각이 나며 긴 속눈썹과 두려워하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었다. 1년여 동안, 그렇게 나를 스쳐간 돼지들과 할아버지의 모습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돼지가 어떻게 그 할아버지를 알아볼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사람이 생각하는 죽음이라는 것을 돼지들도 알고 있으며 그래서 무서워했을까? 돼지는 죽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아니, 그런 하등동물이 과연 생각이나 있을까?
30년 이상이나 그 일을 해왔다는 그 할아버지는 거의 매일 동물들의 생명을 거두면서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 그도 보통사람들과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하며 자식들을 키울까? 영감은 틀림없이 전생에 동물과의 악연으로 그 일을 할 것이며 지금 업(業)풀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일을 그는 왜, 어떻게 자신이 떠맡게 되었을까? 의문의 꼬리는 끊이질 않았다. 산 독수리의 눈으로 지렁이의 고뇌는 헤아리지 말라했는데, 그래도 나는 알고 싶었다. 어쩌면 할아버지의 입에서 나오는 얘기는 나의 상상을 초월한 얘기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도 들었다. 뚱딴지같은 소리 하지말라는 아내의 잔소리를 등에 업고 매력적인 돼지와 의문의 할아버지를 만나러 다시 중국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