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그 빛으로 살자
2007.03.24 09:20
영성, 그 빛으로 살자
원불교 서울 신림교당 교무 이선조(순주)
보았노라! 느꼈노라! 알았노라! 행하노라!
선을 하고 의두, 성리 의제를 화두삼아 생각의 주머니에 몰입해 보면 떠오르는 영성의 빛이다. 이런 의미가 주는 느낌의 빛은 몰두함에서 오는 선물이다.
좋은 그림을 통하여 발견되는 느낌이 있다. 그림에 빛을 받는 방향과 빛의 밝기가 잘 표현됨으로써 생명력이 한없이 빛에 반사되는 점입니다. 한참 그림의 이미지 속의 느낌과 같이 하다 보면 그림이 강조하는 포인트가 응시되면서 포인트를 중심으로 둥그런 원의 광명이 그려진다. 특히 불화나 성화를 감상하다 보면 성현을 그린 그림 뒤에 원광(圓光)이 얼마나 내 영성과 합일하게 되느냐에 따라 그림을 떠나서 성현의 내면적 빛을 찾아 영성이 맑아지고 밝아진다.
2004년 원광대 한의대 경락전공의들이 한의학박사 손흥도 교무님을 중심으로 러시아 교민들을 위한 한방 의료봉사를 하러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나도 가족처럼 동행했었다. 봉사를 마치고 이삼일 틈을 내어 동행한 봉사자 가족들과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았었다. 신권중심의 그림이긴 했지만 그림의 중심에는 둥그렇게 빛으로 특징이 강조되어 있었다.
“예수님도 옛날에는 일원상을 믿었나요?”
십자가가 없고 얼굴 뒤에 일원상이 있어요. 초등학교 3년 사내아이가 물었다.
"바보야, 이건 그림이야!"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가 대답했다.그 아이들은 내가 원불교 교무라는 것을 의식했는지 일원상처럼 둥그런 광명을 성당 그림에서 보았다고 관심을 고조시켰다.
“서울에서 화가 정승섭 교수가 단군과 그리고 노자. 공자. 석가. 예수. 대종사의 인물화를 전시한 일이 있었는데 그날 행사에 선무가가 하얀 고깔을 쓰고 춤을 추었다. 그리고 다도예절 선생들이 맑은 녹차를 사진 앞에 헌다를 했었거든. 그런데 그곳에서도 일원상처럼 빛을 보았어! 그러니까 훌륭한 사람들은 일원상 빛을 가진 사람인가?“
그 아이들의 부모들까지 들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개입되면서 은유적 관심을 끌어내는 내 목소리는 박물관 천장까지 높아지고, 기운은 상쾌하게 창밖까지 빛살처럼 퍼져나갔었다.
그해 봄, 3개월 동안을 텔레비전과 라디오, 신문까지도 단절한 채 히말라야 설산의 물고기 꼬리처럼 생긴 마차쿠챠 중앙 봉우리가 바로 보이는 포카라에서 명상의 산보와 과거 고승열전만 읽고 들으면서 지냈었다.
그 고승들이 평생 토굴 속에서 금욕정진으로 얻어낸 만법귀일의 일원상 소식을 얻고도 끝없이 잃어나는 번뇌를 자유롭게 거둬내는 경지가 그리웠다. 천배의 오체투지의 절 수행도 해보고, 티벳 명상곡에 마음을 맡겨 3-4시간씩 완전 공(空) 상태에 집중하는 시간도 가졌다.
‘그 주인공 소식이 삶의 빛이 되게 하기 위해 도전하는 정진심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무엇이 들어 저 미지의 화두세계에 도전하려고 그 생을 다하는가?’
정진할수록 그 자유 경지는 갈증을 불렀다. 법정스님. 이근후 등 순례자들의 책을 읽으며 고다마 싣달 태자의 행적을 따라 인도성지를 돌아다녔다.
그해 여름 인도에서 돌아와 원불교 4대 성지(영광. 익산. 만덕산. 성주)를 순례하며 깨달음에 대한 스승님들의 체온을 체험하였다. 그럴수록 마음속에 타오르는 영적 갈증은 가는 목젖에 이물질이 걸린 것처럼 갑갑함이 솟아올랐다.
바로 내가 내 안에서 이끌어 내고 내 안을 바라볼 수 있는 밝은 영성의 빛이 일체만물의 빛과 함께 삶 속에 비춰져야 하는 점 때문이었다. 나를 내 안에 숨겨 놓고 나를 찾아다니는 능청을 떨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속이 시원할까 하는 기대심으로 꽉 차 있었다.
보았노라, 느꼈노라, 알았노라, 행하노라! 그 영성의 빛은 나를 깨어있게 하는 통로다. 그 통로가 막히면 일마다 어둠에 가려 버린다. 오늘 아침 내 가슴 속의 하늘은 외로움에 짓눌리고 슬픈 기운으로 잿빛이 되어 있었다.
누가 이 기운을 구름처럼 가져온 것인가? 유기농 농사법으로 떡국재료를 만들어 소비를 부탁한 어느 기관을 돕기 위하여 처리하는 과정에서 선 공심을 주장한 내 의견 때문에 선정성을 주장한 그녀 마음이 상처를 입었다. 유통기간이 있으니 바로 처리하자는 내 의사와
“정성스럽게 대접하고 싶은 메뉴가 있으니.”
를 주장하는 그녀의 의견이 갑자기 불어오는 맞바람처럼 교환되면서 나는 교무이고 그녀는 교도라는 관계에서 그녀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선명히 기운 하늘에 한 점 구름은 언어의 화살에 박혀 그대로 떠 있다. 서로가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기분에는 잿빛 구름이 생겼다. 그녀는 그녀대로, 나는 나대로 정적시간이 흘렀다. 30여 분이 흐른 뒤에야 공익심과 정성심이 하나가 되면서 영성의 빛은 '행하노라! 아니, 행해야 겠구나!'로 서로 빛이 통했다. 다행이다. 그녀에게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 합니다.'란 깨끗한 마음이 전해지려면 깨끗한 영성의 빛을 통과해서 전달되어야 한다. 그때 그 합일점은 영롱한 빛을 발사한다. 날마다 구도자의 자세로 깨어나 영성! 그 빛으로 살아야한다. 하찮다고 생각하는 경계가 먹구름을 일으키는 바람이 되지 않는가? 이 하찮은 한 마음이 소중하여 육근동작을 적용할 때마다 둥근 빛이 함께해야 하지 않는가? 경계마다 멍청히 살지 말고 영성 빛으로 깨어 살고자 날마다 일원세계와 소통하는 느낌(feel)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원불교 서울 신림교당 교무 이선조(순주)
보았노라! 느꼈노라! 알았노라! 행하노라!
선을 하고 의두, 성리 의제를 화두삼아 생각의 주머니에 몰입해 보면 떠오르는 영성의 빛이다. 이런 의미가 주는 느낌의 빛은 몰두함에서 오는 선물이다.
좋은 그림을 통하여 발견되는 느낌이 있다. 그림에 빛을 받는 방향과 빛의 밝기가 잘 표현됨으로써 생명력이 한없이 빛에 반사되는 점입니다. 한참 그림의 이미지 속의 느낌과 같이 하다 보면 그림이 강조하는 포인트가 응시되면서 포인트를 중심으로 둥그런 원의 광명이 그려진다. 특히 불화나 성화를 감상하다 보면 성현을 그린 그림 뒤에 원광(圓光)이 얼마나 내 영성과 합일하게 되느냐에 따라 그림을 떠나서 성현의 내면적 빛을 찾아 영성이 맑아지고 밝아진다.
2004년 원광대 한의대 경락전공의들이 한의학박사 손흥도 교무님을 중심으로 러시아 교민들을 위한 한방 의료봉사를 하러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나도 가족처럼 동행했었다. 봉사를 마치고 이삼일 틈을 내어 동행한 봉사자 가족들과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았었다. 신권중심의 그림이긴 했지만 그림의 중심에는 둥그렇게 빛으로 특징이 강조되어 있었다.
“예수님도 옛날에는 일원상을 믿었나요?”
십자가가 없고 얼굴 뒤에 일원상이 있어요. 초등학교 3년 사내아이가 물었다.
"바보야, 이건 그림이야!"
초등학교 6학년 여자아이가 대답했다.그 아이들은 내가 원불교 교무라는 것을 의식했는지 일원상처럼 둥그런 광명을 성당 그림에서 보았다고 관심을 고조시켰다.
“서울에서 화가 정승섭 교수가 단군과 그리고 노자. 공자. 석가. 예수. 대종사의 인물화를 전시한 일이 있었는데 그날 행사에 선무가가 하얀 고깔을 쓰고 춤을 추었다. 그리고 다도예절 선생들이 맑은 녹차를 사진 앞에 헌다를 했었거든. 그런데 그곳에서도 일원상처럼 빛을 보았어! 그러니까 훌륭한 사람들은 일원상 빛을 가진 사람인가?“
그 아이들의 부모들까지 들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개입되면서 은유적 관심을 끌어내는 내 목소리는 박물관 천장까지 높아지고, 기운은 상쾌하게 창밖까지 빛살처럼 퍼져나갔었다.
그해 봄, 3개월 동안을 텔레비전과 라디오, 신문까지도 단절한 채 히말라야 설산의 물고기 꼬리처럼 생긴 마차쿠챠 중앙 봉우리가 바로 보이는 포카라에서 명상의 산보와 과거 고승열전만 읽고 들으면서 지냈었다.
그 고승들이 평생 토굴 속에서 금욕정진으로 얻어낸 만법귀일의 일원상 소식을 얻고도 끝없이 잃어나는 번뇌를 자유롭게 거둬내는 경지가 그리웠다. 천배의 오체투지의 절 수행도 해보고, 티벳 명상곡에 마음을 맡겨 3-4시간씩 완전 공(空) 상태에 집중하는 시간도 가졌다.
‘그 주인공 소식이 삶의 빛이 되게 하기 위해 도전하는 정진심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무엇이 들어 저 미지의 화두세계에 도전하려고 그 생을 다하는가?’
정진할수록 그 자유 경지는 갈증을 불렀다. 법정스님. 이근후 등 순례자들의 책을 읽으며 고다마 싣달 태자의 행적을 따라 인도성지를 돌아다녔다.
그해 여름 인도에서 돌아와 원불교 4대 성지(영광. 익산. 만덕산. 성주)를 순례하며 깨달음에 대한 스승님들의 체온을 체험하였다. 그럴수록 마음속에 타오르는 영적 갈증은 가는 목젖에 이물질이 걸린 것처럼 갑갑함이 솟아올랐다.
바로 내가 내 안에서 이끌어 내고 내 안을 바라볼 수 있는 밝은 영성의 빛이 일체만물의 빛과 함께 삶 속에 비춰져야 하는 점 때문이었다. 나를 내 안에 숨겨 놓고 나를 찾아다니는 능청을 떨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속이 시원할까 하는 기대심으로 꽉 차 있었다.
보았노라, 느꼈노라, 알았노라, 행하노라! 그 영성의 빛은 나를 깨어있게 하는 통로다. 그 통로가 막히면 일마다 어둠에 가려 버린다. 오늘 아침 내 가슴 속의 하늘은 외로움에 짓눌리고 슬픈 기운으로 잿빛이 되어 있었다.
누가 이 기운을 구름처럼 가져온 것인가? 유기농 농사법으로 떡국재료를 만들어 소비를 부탁한 어느 기관을 돕기 위하여 처리하는 과정에서 선 공심을 주장한 내 의견 때문에 선정성을 주장한 그녀 마음이 상처를 입었다. 유통기간이 있으니 바로 처리하자는 내 의사와
“정성스럽게 대접하고 싶은 메뉴가 있으니.”
를 주장하는 그녀의 의견이 갑자기 불어오는 맞바람처럼 교환되면서 나는 교무이고 그녀는 교도라는 관계에서 그녀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선명히 기운 하늘에 한 점 구름은 언어의 화살에 박혀 그대로 떠 있다. 서로가 말은 부드러웠지만 그 기분에는 잿빛 구름이 생겼다. 그녀는 그녀대로, 나는 나대로 정적시간이 흘렀다. 30여 분이 흐른 뒤에야 공익심과 정성심이 하나가 되면서 영성의 빛은 '행하노라! 아니, 행해야 겠구나!'로 서로 빛이 통했다. 다행이다. 그녀에게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 사랑 합니다.'란 깨끗한 마음이 전해지려면 깨끗한 영성의 빛을 통과해서 전달되어야 한다. 그때 그 합일점은 영롱한 빛을 발사한다. 날마다 구도자의 자세로 깨어나 영성! 그 빛으로 살아야한다. 하찮다고 생각하는 경계가 먹구름을 일으키는 바람이 되지 않는가? 이 하찮은 한 마음이 소중하여 육근동작을 적용할 때마다 둥근 빛이 함께해야 하지 않는가? 경계마다 멍청히 살지 말고 영성 빛으로 깨어 살고자 날마다 일원세계와 소통하는 느낌(feel)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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