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발의 소년들

2007.04.11 10:02

이종택 조회 수:46 추천:6

은발의 소년들

                                                                         행촌문학회  이  종  택







실로 오랜만에 찾아갔었다. 한 시간이면 달려갈 수 있는 모교를 지척에 두고도 그 동안 무슨 큰일을 이뤄 놓았기에 반세기 동안이나 무정하게 지나쳐버린 나의 매정함이 새삼 죄송하고 후회스러웠다. 어린 시절 세상의 전부였던 나의 모교, 그 이름도 자랑스러운 ‘북면공립국민학교!’ .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6. 25의 격동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동안 옛 학교의 모습은 많이 달라져 버렸다. 훌륭한 사람이 되라고 희망을 불어 넣어주셨던 선생님들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고 계실까. 어머니의 품속 같이 포근했던 모교의 구석구석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눈을 감으면 아련히 떠오르는 추억속의 모교, 목조 건물로 지어진 검게 칠한 교사(校舍)는 옛 그 자리에 붉은 벽돌집으로 바뀌었고, 밑을 보면 아스라하여 무서웠던 변소도 깔끔하게 새로 지어졌다. 서쪽에 있었던 교장 선생님 사택은 묵정밭으로 버려져 있고, 그 뒤 면사무소는 어디로 옮겨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정문에서 언제나 우리들을 맞이해 주었던 키 큰 사각기둥, 길 양쪽에 심어진 아름드리 벚나무는 해마다 봄이 오면  흐드러지게 꽃을 피웠었건만…… .  

교무실로 들어서려는 순간, 언뜻 현관에 걸려있었던 종의 모습이 떠올랐다. 종은 우리의 규율선생 노릇을 했고, 그 종소리는 우리에겐 지상명령이었다. 아무리 즐거운 놀이를 하다가도 종소리가 나면 얼른 교실로 뛰어가야 했으니까. 교무실 안으로 들어서니 옛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인자하셨던 선생님들의 얼굴이 떠오르고 금방이라도 어디서 나오실 것만 같았다. 나는 공부를 잘 하지 못했다. 언제나 중간쯤, 그러나 4학년 때던가, 오쓰까(大塚) 선생님이 담임을 했을 때 처음으로 3등을 했었는데 어찌나 좋던지, 며칠동안 잠을 설치기도 했었다. 그 선생님 자리가 이쯤 되지 않았을까.

맨 서쪽에 있던 5학년 때 우리 교실로 가보았다. 사방을 둘러보니 깨끗한 흑판과 게시판의 정리, 과학기자재 그리고 청소도구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특히 책상과 의자가 우리 때에 비하면 너무 고급스러웠다. 왼쪽 앞부분에는 석탄난로를 놓았던 곳, 그 옆 따뜻한 자리에 서로 앉으려 했었고, 점심때가 되면 그 이전에 양은 도시락을 서로 먼저 난로 위에 얹어 놓으려 쟁탈전을 벌였었다. 앞에 앉은 기계충이 파먹은 빡빡머리 인택이, 인규는 머릿속에서 서캐가 희끗희끗, 검정 옷 위로는 이가 기어 다니기도 했었다. 우리의 손등은 항상 까만 때가 한 두께 늘어붙어 늘 터서 피가 났고, 손톱 밑 까만 때는 늘 씻어도 그대로였다. 고무신 앞부리에 구멍이 나서 엄지발가락이 삐죽이 밖으로 나오면 여학생들이 볼까봐 창피해서 얼마나 마음 졸였던지.

운동장은 그때보다 훨씬 낮고 넓어진 것 같았다. 매일 아침 조회 때면 전 학생이 운동장에 모여 서쪽 계단위에 근엄하게 위치한 신사(神社)에 참배(參拜)를 했었는데 고다(江田) 교장선생님의 동작에 따라 참배를 했었다.. 일제가 최후의 발악을 할 즈음에는 각 가정에도 조그마한 지방함 (紙榜函)같은 신사(神社)가 배급되었는데 그 속을 열어보니 하얀 종이에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라 쓰여 있었다. 대일본은 아마도 대동아전쟁에서 승리하여 전 세계를 정복하기위한 욕망으로 날마다 하느님께 우리의 소망을 이뤄달라고 빌었으리라. 그리하여 그들 국가(國歌)처럼 천대(千代) 아니 그보다 더 팔천대(八千代)까지, 작은 돌이 커서 바위가 되어 이끼가 낄 때까지 누리고 살리라는 신념에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뭉게구름이 하늘 높이 떠오르고 오곡이 풍성한 가을이 되면 운동회가 열렸다. 가난에 찌들고 놀이문화가 부족했던 그 시절 운동회는 우리 북면의 잔칫날이었다. 온 동네 집집마다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가지고 모두 참가했었다. 정문에는 아침부터 가마솥에 고깃국물이 부글부글 끓고, 엿장수의 가위소리도 그날따라 더 구성졌다.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펄럭이고, 확성기소리도 요란했다. 날마다 운동연습을 하느라 가을 햇볕에 그을려 구릿빛으로 달궈진 우리들의 당찬 모습은 승리욕에 가득 차 있었다. 왼쪽 오른쪽 깃발 따라 몸을 흔들며 ‘히로가쓰요(백군이겨라), 아까가쓰요(홍군이겨라)' 목이 터져라 외쳤다. 본부석에는 면장님과 면유지(面有志) 그리고 주재소 순사부장이 검은 제복에 번쩍번쩍 긴 칼을 차고 유지석 윗자리에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달리기를 해서 1. 2. 3등 안에 들어 손등에 도장을 찍고 수상자 대열에 섰을 때 그 기분이 얼마나 좋았던지. 잡기장[노-트]을 타거나 연필을 탔던 장면은 그날 밤 꿈을 꾸기도 했었다. 테머리를 질끈 동여 맨 기마병놀이, 아버지와 함께 발 묶고 달리기, 하늘에 매달아 놓은 공을 오재미를 던져 터트릴 때면 그 속에서 ’대일본제국만세‘ 라 쓰인 흰 천이 주르르 꽃가루와 함께 풀리면 모두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그 날만은 우리들의 세상이었다.    

1946년 해방된 그 이듬해에 우리는 졸업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졸업하던 날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무엇이 그리도 서러웠을까. 담임선생님과 헤어지는 것이 마치 거친 들판에 버려진 한 마리 양처럼 그 처지가 스스로 비참하게 여겨져서 그랬으리라. 6학년 때 이철규 담임선생님은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신 대단한 인격자요, 실력자였다. 인자하심이 어머니 같아 우리의 우상이었다. 그분은 지금까지 내가 제일 존경해온 분이다. 졸업하던 날 그렇게도 차마 손을 놓지 못한 채 헤어졌으면서도 그 뒤 무심했던 우리는 무려 반세기 동안을 풍편에 안부만 들었을 뿐 한 번도 찾아뵙지 못했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해던가. 우리도 나이가 들자 정신이 난 것일까. 너나없이 고희를 지나고서야 그 선생님을 모시기로 입을 모았다.

날씨도 화창한 어느 가을 날, 붉게 물든 단풍나무들이 에워싼 우리 고장 내장산 관광호텔은 시끌벅적 했다. 서울에서 내려 온 임 교장, 음악선생으로 명성을 떨친 김 교장, 소를 100마리나 키운다는 형근이, 서울에서 한춤선생을 한다는 S라인의 손여사 등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이게 얼마만인가. 은발의 소년소녀들은 서로 부둥켜안았다. 그리고 모두 선생님께 큰절을 올리고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선생님은 우리들 하나하나를 안아주시며 사람 사는 게 다 그런 거라며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생의 보람을 느낀다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그 뒤로 우리는 다시 찾아뵙지 못한 채 무심한 세월만 보내고 있다. 오직 선생님의 만수무강을 빌 따름이다.                                                          (2005. 4.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