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2007.04.17 19:07

박주호 조회 수:59 추천:25

막걸리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야) 박 주 호



전주에는 막걸리 촌이 있다. 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 삼천동이라는 곳이다. 일부러 멀리 술을 마시러 가지 않아도 되고, 막걸리 생각이 나면 금방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친구나 친지들이 오면 같이 가는 곳이기도 하다. 마시다 보면 너무 많이 마셔서 문제이지만, 나는 막걸리 그 술이 좋다.

  조그만 항아리 같은 질그릇에 누리끼한 막걸리가 담겨 나오면 조롱박으로 두 번 떠서 잔에 붓고 권한다. 더욱이 식탁 위에 즐비하게 나오는 안주의 종류가 헤아릴 수조차 없다. 꼬막을 까먹는 재미도 있고, 조기찌개를 먹는 맛도 좋다. 안주가 넘쳐 난다. 약간 텁텁하기도 하고 새콤한 맛도 나면서  트림과 함께 고유의 냄새가 약간 불쾌하게 나지만 술값부담 없이 마실 수 있어 더욱 좋다.

막걸리는 취하도록 마시려면 배가 부르다. 그러기에 허기지고 힘든 농부에게는 더 없이 시원한 음료이며 기운을 돋워준다. 막걸리는 농부가 마시면 농주(農酒)요, 스님이 마시면 곡차(穀茶)라고들 한다. 막걸리는 우리 술이고 우리 맛이다. 막걸리는 정(情)의 술이고 고향의 맛이다. 듬뿍 넘치도록 잔에 딸아 권하는 맛은 우정을 더욱 깊게 하기도 하지 않던가.

우리 아버지는 생전에 술을 좋아하셨다. 지금의 나처럼 취하도록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술을 즐기신 분이다. 그래서 술은 항상 집 어딘가에 있었다. 특히 시집간 누님들이 가져오는 정종은 벽장 속에 두시고 한 잔씩 드렸다. 어린 나도 그 술맛이 좋아 몰래 따라 마시곤 했는데 아버지는 모르는 척 눈을 감아주기도 하셨다. 어쩌면 그때부터 술을 마셨던 버릇 때문에 나는 지금처럼 술꾼이 된 게 아닐까.

  어머니는 누룩으로 발효시켜 만드는 동동주를 잘 담그셨다. 아버지는 항아리를 엎어놓고 볏짚을 태워 연기로 소독을 하셨다. 어머니는 쌀을 시루에 쪄서 발효제를 버무려 자루에 담아 따뜻한 아랫목에 이불로 덮어 놓았다. 술밥이 어느 정도 뜨면 항아리에 맑은 물을 붓고, 누룩과 버무린 술밥을 넣어 볏짚으로 엮은 항아리 뚜껑을 덮는다. 그리고는 이불을 덮어 보온을 한다. 약 일주일 정도 지나면 달콤한 술 향이 방안으로 가득 찬다. 뚜껑을 열어보면 거품이 부풀어 오르고 맑은 색의 술이 코를 자극한다. 용수를 항아리 안에 눌러 넣으면 그 안에 맑은 술은 밥풀이 동동 뜨는 동동주가  되는 것이다. 어머니는 사기주발로 술을 떠서 아버지께 드린다. 아버지가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에 따라 술이 잘 익었는지 덜 익었는지 결정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친구들을 초대하여 술을 드셨는데, 쪽지에 초대할 분들의 이름을 적어 내게 주면 나는 집집마다 찾아가서 오시라는 말을 전하곤 했다. 물론 전화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잘 익은 동동주는 맛이 참 좋았다. 달콤하면서 특유의 향이 좋아 마냥 마시다 보면 취해서 하늘이 빙빙 돌기도 하고 기분이 좋았었다.

동동주를 떠내고 고운체에 걸러낸 것이 막걸리다. 그 막걸리에다 약간의 물을 타지 않으면 무척 독하다. 한번은 품앗이로 모내기를 할 때 그 진한 막걸리를 두 대접이나 마시고는 일도 못하고 나무 그늘에 누워 자다가 혼난 적이 있었다. 특히 술 지게미는 우리 누님이 잘 먹었는데 약간의 당원을 섞어 수저로 떠먹다 보면 취해 얼굴이 붉어지고 취해서 비틀거리기도 했었다.

  흔히 마시는 막걸리는 탁주라고도 한다. 종류도 무척 많다. 찹쌀막걸리로부터 조 껍데기 막걸리, 옥수수 막걸리까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렵다. 내 친구는 막걸리를 너무 잘 마셔서 군대 내에서까지 '막걸리 한 말'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니 그 주량을 알만하지 않은가.

막걸리는 알코올 함량이 6~7%정도 된다. 독하지 않아 간에 부담을 주지 않고, 곡주이기에 영양가도 많아 피부미용에도 좋다고 한다. 그러나 기근이 심할 때 쌀로 술을 만들어 먹는 것을 막으려고 조선 영조 때는 금주령이 내려지기도 했다고 전한다. 풍요로운 요즘에 와서는 쌀로 술을 빚어 먹는다고 누가 탓할 사람은 없다. 오히려 장려하고 있다.

옛날에는 세무서에서 밀주 단속을 나오기도 했는데 술을 담가먹는 집을 귀신같이 찾아내어 벌금을 물리기도 했다. 누룩만 찾아내도 벌금을 물렸는데 우리 집 벽장에 있던 누룩 석 장을 가져가더니 거금 3만 원을 내라는 벌금고지서가 날아 온 적도 있었다.  약 30년 전의 이야기이니 당시로서는 꽤 큰 돈이었다.

전통문화가 살아 있는 전주에 온 것도 좋은 일이지만 더불어 막걸리 촌까지 있으니 더 좋다. 굳이 화학주인 소주와 양주를 마실 것이 아니라 전통주인 막걸리를 권할 일이려니 싶다.

삼천동은 시골 주막처럼 술 권하는 아낙네도 없고, 술 취한 사내의 걸쭉한 창부타령은 없지만, 서로의 막걸리 잔에 푸짐한 인정을 섞어 마시니 더 정겨워 보인다.

*용수-싸리나 대나무로 엮은 둥근 망태로 술 항아리에 눌러 넣고 맑은 술을 거르는 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