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과 사랑 나누기 45년

2007.04.21 19:14

김학 조회 수:67 추천:9

수필과 사랑 나누기 45년

또 한 권의 책을 엮는다. <수필의 맛 수필의 멋> 10권 째다. 수필과 사랑을 나누며 세월을 보내노라니 그렇게 되었다. 앞으로 또 몇 권이나 더 책을 내게 될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꾸준히 그리고 부지런히 글을 쓰고 또 쓸 것이다.
수필을 쓴지 오래 되고, 여러 문학단체의 책임을 맡다 보니 수필집을 출간하는 이들이 발문(跋文)을 써달라고 부탁하곤 했었다. 모처럼의 청을 거절하지 못하여 써주곤 했더니 그 원고가 책 한 권의 분량으로 모였다. 그리하여 그 원고들이 흩어지기 전에 이렇게 한 권의 책으로 묶게 된 것이다.
내가 처음으로 썼던 수필은 대학 1학년 때 전북대학신문에 발표했던 <아웃사이더의 사랑이야기>다. 1962년의 일이니 벌써 4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러니 내가 수필과 사귀기 시작한지 반 백년이 가까워지고 있다. 내 나이 고희(古稀)를 맞는 해가 바로 나의 ‘수필사랑 반 백년’이 되는 해다. 이만한 나이테라면 붓만 잡았다 하면 명 수필이 술술 씌어져야할 텐데 수필 한 편을 쓸 때마다 초심자처럼 끙끙 앓는다.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오래 되었다고 좋은 글을 쓰는 것도 아니고 신출내기라고 해서 좋은 글을 쓸 수 없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며칠 전 <하늘만큼 땅만큼>이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들었다.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를 둘러보는 신혼부부의 대화에서였다. 건축을 전공한 신랑이 신부에게 돌부처에 대하여 설명하기를, 불상은 석공이 돌을 쪼아서 조각한 게 아니라 바위 속에 숨겨진 불상을 석공이 찾아낸 것이라고 했다. 멋진 표현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무릎을 쳤다.
“수필(불상)은 수필가(석공)가 소재(돌)를 찾아서(쪼아서) 문자로 표현하는(조각하는) 게 아니라 소재(바위) 속에 숨겨진 수필(불상)을 수필가(석공)가 찾아내는 것이 아닐까?”
발문이란 책 끝에 본문의 내용의 대강이나 또한 그에 관계된 사항을 간략하게 적은 글을 일컫는다. 수필집 발문을 모아 이렇게 단행본으로 엮으면서 수필 평론집이라고 해도 괜찮은지 모르겠다. 나 역시 발문을 쓰면서 수필가들이 소재에서 찾아낸 수필을 바르게 이해하고 감상할 수 있도록 독자를 위한 가이드 역할에 주력하려고 했다.
윤오영 선생은 일찍이 시를 복숭아[桃]에, 소설을 밤[栗]에, 수필을 곶감[乾柿]에 비유한 적이 있다. 곶감은 감으로 만들지만 그렇다고 감이 곧 곶감은 아니라고 했다. 감의 껍질을 벗겨서 시득시득하게 말리면 속에 있던 당분이 겉으로 나타나 하얀 시설(柹雪)이 앉는다. 그 시설이 앉은 다음 혹은 납작하게 혹은 네모지게 혹은 타원형으로 접어야 한다고 했다. 수필은 이렇게 해서 만든 곶감이라는 것이다. 곶감을 접는다는 것은 바로 수필의 형태를 말한다고 했다.
이처럼 시설이 잘 앉은 곶감인가 아닌가를 구별하는 일이 바로 올바른 수필 감정법이 아닐까 한다. 아무튼 무궁무진한 게 수필이려니 싶다. 수필을 사랑하는 이들이 날로달로 자꾸 늘어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이 책을 기꺼이 출판하여 빛을 보게 해 준 대한문학사 발행인 정주환 교수님에게 감사드린다.
                        2007년 가정의 달 5월에
                                              지은이   三溪 金 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