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막걸리를 마시고
2007.05.24 00:11
전주 막걸리를 마시고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기) 이수홍
막걸리를 탁주 또는 농주라고도 한다. 농주는 일하는 농민들이 피로를 풀고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마시는 술이다. 지금은 소주나 맥주도 농사일을 하며 마시지만 그 술들을 농주라고는 하지 않는다.
내가 막걸리를 처음 마신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함께 자취를 했던 여드름 쟁이 친구C와 함께 마셨다. 성화에 못 이겨 여드름을 짜주면 그가 막걸리를 사주어서 함께 마셨다.
보리 베기와 모심기, 벼 베기, 보리갈이 등 들일을 하면서도 마셨다. 땀을 흘리면서 힘들게 일하고 있을 때 새참을 머리에 이고 논두렁길을 걸어온 형수님을 보기만 해도 입에서는 군침이 돌았다. 하얀 사기대접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 엄지손가락에 묻은 흙이 술에 번지는 것을 걷어낼 새도 없이 단숨에 들이키면 갈증이 해소되고 피로가 싹 가셨다. 일의 능률이 오르기 마련이었다.
전주시는 전주막걸리를 전주비빔밥, 전주콩나물국밥 등과 함께 전주 대표음식으로 키우려고 상품개발과 전국체인화하여 우리나라의 대표 명품으로 특화시킬 계획이라고 했다. 냄새도 안 나고 머리도 아프지 않은 막걸리를 만든 것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 보도를 보신 서울 형님이 전주 막걸리 집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형님 내외분을 초청하여 우리 내외와 4명이 전주대사습 판소리 명창부 예선을 관람하고 봉동에 가서 오리 주물럭으로 빈 배를 단단히 채웠다. 우리가 관객이 아니고 출연할 무대는 전주막걸리 집이었다.
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직을 하시고 시를 쓰시는 형님의 초등학교 동창 친구 L형님과 셋이서 무작정 삼천동으로 갔다. 기왕이면 소문난 집으로 가려고 하니 아는 집이 없었다. 4월에 막걸리축제가 있었는데 현지답사를 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L형님이 그림과 시가 걸려있는 분위기 좋은 집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그 집을 찾기로 했다. 탐라, 사랑채, 두 여인 등 세 집 간판이 동시에 보였다. 이름은 두 여인이 좋았지만 시가 걸려있는 것이 보인 사랑채로 갔다. 서울서 오신 손님이 계시니 사랑채가 이름도 어울리는 것 같았다.
입구에 들어서니 전라북도 문인협회 회장, 나의 수필 교수님 등의 사진이 크게 걸려있었다. 제대로 찾아왔다 싶었다. 벽에 시와 수필과 그림이 빼곡히 걸려있었다. 우선 막걸리 한 주전자가 나왔다. 안주는 신선한 야채와 먹음직스런 산 낙지, 소라 등 해물이었다. 막걸리 한 주전자를 비우는 데는 10분도 안 걸렸다. 한 주전자를 더 불렀다. 추가로 홍어삼합, 은행, 마가 나왔다. 전국적으로 소문이 날만큼 푸짐한 안주가 무려 27가지나 나왔다. 막걸리가 밀가루로 만들 때와 같이 탁하지 않아서 마시기 좋았다. 안주도 모양새만 갖춘 게 아니라 실속이 있었다.
우리 형제는 고향이 전남 구례여서 악몽 같은 여순 반란사건을 몸소 겪은 사람들이다. 그 시절 추억담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전주막걸리는 내 고향 산수유 꽃을 피게 하는 마력이 있는 것일까? 나는 주로 듣기만 했다. 또 한주전자를 불렀다. 두 분이 입술에 묻은 막걸리를 닦아낼 줄도 모르고 신바람 나게 얘기를 하는 사이 나는 벽에 걸린 작품을 훑어보았다. 입구 사진에는 진동규 회장, 김학 교수님이 여사장과 폼을 잡고
“옛 정취에 취하고~ 맛과 멋에 취하고~ ”
라고 웨치고 있었다. 수필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고 나의 옛날 경찰동료의 시 ‘가을밤 그리고 별’ 고향후배의 시 ‘채송화 별무리’ 등 13점이 있어 마치 문학작품 전시회장에서 칵텔파티를 여는 것 같았다. 옆방에도 시 ‘해바라기’
“시드는 일은 씨[種]든 일인가 씨 드는 일은 시[詩]드는 일인가 여름 내내 잉걸불처럼 끓어오르던 해바라기 저만큼 조용히 시들고 있다.”
등 15점이 걸려있었다. 문학 작품들은 고급스런 안주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주전자를 더 청했다. 우리가 처음 들어갔을 때는 두 방에 손님이 한 팀씩 뿐이었다. 술시가 되자 주당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손님도 각층이었다. 사무실에서 퇴근하고 온 사람, 현장에서 노동을 하고 온 사람, 집에 있다가 출출해서 나온 사람 등 다양했다. 주모는 한 사람뿐이라서 일손이 모자라 좀 아쉬웠다. 비록 우리가 최고령자였지만 제일 멋진 손님이라고 느낀 건 술을 마셔서 나의 왕자 병이 도진 탓일 게다.
각 한 주전자씩을 마시자고 했는데 4주전자를 비운 것은 여사장이 오가며 한 잔씩 마셔서 4명으로 계산해서 4주전자를 마셨던 것이다. 막걸리가 마실수록 좋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생방송의 볼륨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두 형님의 말소리가 커지니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한 사람도 불쾌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막걸리는 또 점수를 얻는다. ‘늙으면 양기가 입으로 오른다더니~’ 라는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두 형님들의 말씀 중 1/3은 일본말이었다. 딴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는 젊은 시절의 러브 스토리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갈 길을 가야한다. 우리가 갈 길은 행복의 카펫이 깔려있는 길이다.”
라는 말을 입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걸리 집은 보통사람들의 안식처요 살맛나게 하는 현장이었다. 술이 들어가면 노래가 나오는 것은 우리집안의 내림이다. 집으로 와서 같은 고향 내 친구 한 사람을 더 불러 또 한 잔씩 하면서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고 ‘꿈에 본 내 고향’을 합창으로 목청껏 불렀다.
[2007.5.14.월]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기) 이수홍
막걸리를 탁주 또는 농주라고도 한다. 농주는 일하는 농민들이 피로를 풀고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 마시는 술이다. 지금은 소주나 맥주도 농사일을 하며 마시지만 그 술들을 농주라고는 하지 않는다.
내가 막걸리를 처음 마신 것은 고등학교 때였다. 함께 자취를 했던 여드름 쟁이 친구C와 함께 마셨다. 성화에 못 이겨 여드름을 짜주면 그가 막걸리를 사주어서 함께 마셨다.
보리 베기와 모심기, 벼 베기, 보리갈이 등 들일을 하면서도 마셨다. 땀을 흘리면서 힘들게 일하고 있을 때 새참을 머리에 이고 논두렁길을 걸어온 형수님을 보기만 해도 입에서는 군침이 돌았다. 하얀 사기대접에 막걸리를 가득 부어 엄지손가락에 묻은 흙이 술에 번지는 것을 걷어낼 새도 없이 단숨에 들이키면 갈증이 해소되고 피로가 싹 가셨다. 일의 능률이 오르기 마련이었다.
전주시는 전주막걸리를 전주비빔밥, 전주콩나물국밥 등과 함께 전주 대표음식으로 키우려고 상품개발과 전국체인화하여 우리나라의 대표 명품으로 특화시킬 계획이라고 했다. 냄새도 안 나고 머리도 아프지 않은 막걸리를 만든 것이 나의 관심을 끌었다. 이 보도를 보신 서울 형님이 전주 막걸리 집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하셨다.
형님 내외분을 초청하여 우리 내외와 4명이 전주대사습 판소리 명창부 예선을 관람하고 봉동에 가서 오리 주물럭으로 빈 배를 단단히 채웠다. 우리가 관객이 아니고 출연할 무대는 전주막걸리 집이었다.
중학교 교장선생님으로 정년퇴직을 하시고 시를 쓰시는 형님의 초등학교 동창 친구 L형님과 셋이서 무작정 삼천동으로 갔다. 기왕이면 소문난 집으로 가려고 하니 아는 집이 없었다. 4월에 막걸리축제가 있었는데 현지답사를 하지 않은 것이 후회가 되었다. L형님이 그림과 시가 걸려있는 분위기 좋은 집이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해서 그 집을 찾기로 했다. 탐라, 사랑채, 두 여인 등 세 집 간판이 동시에 보였다. 이름은 두 여인이 좋았지만 시가 걸려있는 것이 보인 사랑채로 갔다. 서울서 오신 손님이 계시니 사랑채가 이름도 어울리는 것 같았다.
입구에 들어서니 전라북도 문인협회 회장, 나의 수필 교수님 등의 사진이 크게 걸려있었다. 제대로 찾아왔다 싶었다. 벽에 시와 수필과 그림이 빼곡히 걸려있었다. 우선 막걸리 한 주전자가 나왔다. 안주는 신선한 야채와 먹음직스런 산 낙지, 소라 등 해물이었다. 막걸리 한 주전자를 비우는 데는 10분도 안 걸렸다. 한 주전자를 더 불렀다. 추가로 홍어삼합, 은행, 마가 나왔다. 전국적으로 소문이 날만큼 푸짐한 안주가 무려 27가지나 나왔다. 막걸리가 밀가루로 만들 때와 같이 탁하지 않아서 마시기 좋았다. 안주도 모양새만 갖춘 게 아니라 실속이 있었다.
우리 형제는 고향이 전남 구례여서 악몽 같은 여순 반란사건을 몸소 겪은 사람들이다. 그 시절 추억담이 술술 나오기 시작했다. 전주막걸리는 내 고향 산수유 꽃을 피게 하는 마력이 있는 것일까? 나는 주로 듣기만 했다. 또 한주전자를 불렀다. 두 분이 입술에 묻은 막걸리를 닦아낼 줄도 모르고 신바람 나게 얘기를 하는 사이 나는 벽에 걸린 작품을 훑어보았다. 입구 사진에는 진동규 회장, 김학 교수님이 여사장과 폼을 잡고
“옛 정취에 취하고~ 맛과 멋에 취하고~ ”
라고 웨치고 있었다. 수필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고 나의 옛날 경찰동료의 시 ‘가을밤 그리고 별’ 고향후배의 시 ‘채송화 별무리’ 등 13점이 있어 마치 문학작품 전시회장에서 칵텔파티를 여는 것 같았다. 옆방에도 시 ‘해바라기’
“시드는 일은 씨[種]든 일인가 씨 드는 일은 시[詩]드는 일인가 여름 내내 잉걸불처럼 끓어오르던 해바라기 저만큼 조용히 시들고 있다.”
등 15점이 걸려있었다. 문학 작품들은 고급스런 안주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한 주전자를 더 청했다. 우리가 처음 들어갔을 때는 두 방에 손님이 한 팀씩 뿐이었다. 술시가 되자 주당들이 꾸역꾸역 몰려들었다. 손님도 각층이었다. 사무실에서 퇴근하고 온 사람, 현장에서 노동을 하고 온 사람, 집에 있다가 출출해서 나온 사람 등 다양했다. 주모는 한 사람뿐이라서 일손이 모자라 좀 아쉬웠다. 비록 우리가 최고령자였지만 제일 멋진 손님이라고 느낀 건 술을 마셔서 나의 왕자 병이 도진 탓일 게다.
각 한 주전자씩을 마시자고 했는데 4주전자를 비운 것은 여사장이 오가며 한 잔씩 마셔서 4명으로 계산해서 4주전자를 마셨던 것이다. 막걸리가 마실수록 좋은 또 한 가지 이유는 생방송의 볼륨을 높여주었기 때문이다. 두 형님의 말소리가 커지니 사람들이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러나 한 사람도 불쾌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막걸리는 또 점수를 얻는다. ‘늙으면 양기가 입으로 오른다더니~’ 라는 생각들을 했을 것이다. 두 형님들의 말씀 중 1/3은 일본말이었다. 딴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게 하려는 젊은 시절의 러브 스토리라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갈 길을 가야한다. 우리가 갈 길은 행복의 카펫이 깔려있는 길이다.”
라는 말을 입으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걸리 집은 보통사람들의 안식처요 살맛나게 하는 현장이었다. 술이 들어가면 노래가 나오는 것은 우리집안의 내림이다. 집으로 와서 같은 고향 내 친구 한 사람을 더 불러 또 한 잔씩 하면서 노래방 기계를 틀어놓고 ‘꿈에 본 내 고향’을 합창으로 목청껏 불렀다.
[2007.5.1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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