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조선선비, 김동필 선생의 명복을 빌며

2007.09.22 17:35

김학 조회 수:63 추천:8

21세기 조선선비, 金東必 선생의 명복을 빌며
김 학



내가 수필가 김동필과 교분을 갖게 된 것은 70년대 중반부터다. 그 무렵 그는 이미 ‘하얀대화’라는 처녀 수필집을 상재(上梓)한 바 있는 수필가였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이름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자기를 내세우려 하지 않는 겸손한 그의 미덕과 성품 탓이었다.

외롭게 순수수필을 빚어내는 김동필, 나는 그를 서해방송의 ‘밤의 여로’란 수필 프로그램의 고정 집필자로 초대하였고, 그의 작품은 방송의 음향을 타고 계속 번져 기대 이상의 높은 청취율을 확보했었다. 그는 열심히 글을 썼고 그가 노력한 만큼 애청자의 반응 또한 빗발쳤다. 그때부터 나는 그의 열렬한 독자가 되어 버렸다.

김동필이 빚어내는 수필은 고소한 숭늉 맛이었다. 그가 짜내는 수필은 올이 가는 모시의 멋이었다. 비단처럼 현란하지도 않고 화학섬유처럼 천박스럽지도 않았다. 김동필이 엮어내는 수필에는 여름하늘을 수놓은 뭉게구름의 한가로움이 담겨 있었다. 금방 소나기를 뿌릴 듯한 먹구름도 아니요, 안개구름도 아니었다. 그의 수필에는 전통적인 가락과 맥박과 정서가 엉겨 있었다. 그의 수필에는 조선선비의 고결한 기개가 담겨 있고 포근한 고향의 인정이 살아 숨쉬고 있었다.
수필가이자 시인이었던 김동필, 그는 시처럼 수필처럼 삶을 꾸리다 우리 곁을 떠난 분이다. 울안에 진기한 화초와 나무를 가꾸며 자연과의 대화를 즐기고, 겨울이면 대나무 분재를 서재에 옮겨 놓고 서걱거리는 댓잎의 율동에서 사랑과 인생의 수필을 낚아 올린 글쟁이였다. 맥주 한 병도 채 마실 줄 모르는 주량임에도 집안에는 항상 향기로운 가용주(家用酒)를 빚어 두고 내방객을 반가이 맞았던 멋쟁이였다.


김동필은 글씨 또한 명필이었다. 그의 글이나 글씨는 그의 인품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어쩌면 그의 재능은 한학자(漢學者)로서 명성을 떨쳤던 그의 선고로부터의 내림인 듯하다. 보통 키에 알맞은 체격, 중후하고 고결한 멋을 풍겨주는 백발의 헤어스타일, 그의 외모에서 교육자의 참 멋을 느꼈다. 김동필은 서해바다의 해풍을 벗 삼고 자란 부안(扶安)출신이다. 그런 그가 풍광(風光) 좋은 내장산(內藏山)의 품에 안겨 영재를 기르고 시와 수필을 쓰며 인생을 풍요롭게 갈무리하더니 언젠가 홀연히 교단을 떠났고 오래지 않아 또 작별의 인사도 없이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뒤늦게 들은 그의 부음에 한 때 나는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천성대로 살다 갔다. 길을 걷다 소나기를 만나도 종종 걸음을 하지 않던 조선 선비마냥 그런 자세로 살다 갔다. 지면(紙, 誌面)을 얻으려고 헤픈 웃음을 흘리지도 않았고, 더구나 사고의 범위를 넓히려고 안간힘을 하지도 않았다.


김동필은 참으로 가정적이었던 분이다. 아내와 자녀를 사랑과 신뢰의 끈으로 칭칭 묶어 두고, 그 테두리 안에서 웃음꽃을 일구며 화목을 다졌던 분이다.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다정다감하고 그의 표정에는 언제나 온화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의 품성대로 가정의 분위기도 닮아가게 마련이었나 보다. 나는 지금껏 그의 성난 표정, 화난 목소리, 남을 헐뜯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다. 한마디로 도인(道人)다운 풍모를 느꼈을 따름이다. 그런 그가 그처럼 빨리 하늘나라로 간 것은 그곳에서도 그 같은 인재가 필요했기 때문인 것 같다.


김동필은 진실한 불교신자였다. 사월 초파일이면 해마다 가족끼리 손에 손을 잡고 절을 찾는다고 했었다. 이제 그가 남기고 떠난 유족들은 누구랑 함께 절을 찾아야 할 것인가? 그의 가슴속에는 넉넉한 불심(佛心)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교적인 인(仁)과 불교적인 자비(慈悲)가 씨줄과 날줄이 되어 직조된 비단-. 그것이 곧 인간 김동필이라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그러한 자질을 모태로 삼아 태어난 옥동자가 바로 그의 시요, 수필이다. 그의 수필의 배경이 그러하니 그의 수필이 진솔하지 않을 수 없고 높은 품격을 동반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수필가 김동필은 여러 권의 수필집과 시집을 남기고 떠났다. 비록 그의 육신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의 넋은 그가 남긴 시와 수필의 작품 속에 남아 있다. 그는 비록 세상을 떠났어도 결코 그는 죽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남긴 작품 속에서 언제라도 그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삼가 김동필 선생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