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밤

2007.10.24 08:50

최정순 조회 수:46 추천:17

첫날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최정순


만나는 사람마다 이사 온 첫날밤이 어떠했냐며 짓궂게들 물었다. 돼지꿈을 꾸었느냐, 혹시 태몽은 꾸지 않았느냐며 깔깔 웃기도 했다. 모두 이사 온 것을 축하해주는 덕담이어서 고마웠다. 태몽은커녕 삼복더위에 이사하느라 지쳐서 첫날밤을 어떻게 맞았는지 모르겠다. 아파트 8층이라서 모기에 물리지 않고 단잠을 잔 기억밖엔 없다.

첫날밤이라니 감회가 새롭다. 시댁 문지방을 넘어온 지도 벌써 마지막 달력을 39번이나 넘겼건만 시집온 첫날밤이 엊그제 일만 같다.
짝꿍을 만난 것은 내 담임선생님의 소개였다. 같은 직장에서 3년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했다. 그 당시 짝꿍은 혼기가 차 집안에서 점지한 처자와 결혼을 시키려고 서둘렀건만 마다하고 나와 결혼한 것을 보면 인연이란 따로 있나보다. 이성의 눈이 빨리 뜨인 편은 아니지만 여자나이 열아홉이면 지나가던 원님도 쳐다본다던데, 아침햇살에 영롱한 이슬을 머금고 꽃잎 한 장 살포시 펴보려 할 때가 아닌가? 짝꿍역시 패기와 박력이 넘치는 올곧고 과묵한 성격의 청년이었으니,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고 했다. 내세울만한 것이라곤 한 가지도 없는 나였다. 그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다고나 할까. 서무과에 취직한지 일주일도 안 되는 나에게 엉뚱한 불똥이 떨어졌다. 3월 4일 입학식 날 교가반주를 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이력서에 취미를 노래 부르기라 표기한 덕에 고역을 치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밤 12시가 넘도록 교가를 연습해서 입학식 때 더듬더듬 큰일을 해냈다. 회식파티에서 노래를 부를 기회가 왔다. 입학식 때 창피했던 일을 만회하기에 알맞은 분위기였다. 아일랜드 민요 ‘한 떨기 장미꽃’이란 노래를 하이소프라노로 잘 불렀다. 그 노래에 짝꿍이 홀딱 반했다고나 할까. 이때부터 나의 첫사랑 로맨스는 시작되었다.
드디어 1969년 1월 13일 머리를 올린 새댁은 안방 아랫목에 앉혀졌다. 집안 어른들께 큰절을 올리느라 이마엔 땀이 송알송알 맺히고 고개가 빠지는 것 같았다. 꼭 낀 버선으로 엄지발가락은 멍멍, 가슴을 동여맨 치마끈까지 왜 그리도 답답했던지. 마냥 수줍어 눈 한 번 위로 못 뜨고 손끝만 바라보고 앉아있었던 그때가 그립다. 하품은 몰래 어찌했으며, 내 심부름은 어떻게 해결했는지. 그때 일을 물어보고 싶은데 손위 동서는 벌써 저승으로 가셨다. 동지섣달 짧은 해는 낯선 순창고을에 나만 남겨두고 떠나버린 오라버니처럼 넘어가 버렸고, 친정은 잊으라는 듯 두려운 어둠만이 어린 내 가슴팍을 쓸어내렸다. 신방 윗목엔 물 주전자와 요강이 정갈하게 놓여있었고, 5촉짜리 꼬마전등이 세평 남짓한 방안을 은은히 밝히고 있었다. 옥양목에 푸새를 빳빳하게 먹여 꿰맨 이불 호청은 긴긴밤 내내 바스락 거려 단잠을 못 이루고 새벽을 맞았던 첫날밤이 내 인생의 1막 1장이었던가.
학창시절 마지막 수학여행을 잊을 수 없다. 터널을 지날 때면 여학생들은 립스틱과 바늘로 선생님 입술에 바르기도 하고, 옷섶까지 꿰매기도 했으며, 어느 선생님은 견디다 못해 열차 선반위로 올라가기도 했었다. 그때 얄궂게 장난치며 조잘대던 여학생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어느새 백발을 뒤집어 쓴 할머니로 변신했을 것이니 말처럼 세월 이길 장사가 있겠는가.
구례화엄사에서 맞은 첫날밤, 중천에 뜬 열이레 달은 사춘기적 소녀의 마음들을 속속들이 비춰내고 있었다. 맑고 청순한 그 차갑고 외로운 달은 나의 넋이런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며 울던 조카딸의 첫날밤 심정은 어떠했을까. 일곱 형제 중 맏딸인 나 역시 어머니를 저승으로 보내드리고 어린 동생들을 보며 한없이 울었던 그 착잡했던 첫날밤 심정이 되살아나 자판기의 글씨가 흐려져 오타를 치고 있다. 남편의 시신을 항아리에 담아 고향산천에 묻고 돌아온 여인의 첫날밤은 어떠했을 것이며,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의 첫날밤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우리는 수없이 많은 첫날밤을 맞으며 살고 있다. 하루하루가 다 첫날밤이다. 어느 날은 가슴 벅찬 환희의 첫날밤이어서 그대로 꽃이 되고 싶은 첫날밤도 있고, 또 어느 때는 고통과 슬픔으로 한밤을 뒤척이며 눈물로 지새는  첫날밤도 있다. 나이 들어 이런저런 첫날밤을 생각해보니 인생 하루하루가 다 첫날밤이란 것을 새삼 깨닫는다. 모든 날이 오늘의 첫날밤이자 내일을 열어가는 첫날밤이 아닌가. 이제라도 금쪽같은 첫날밤을 만들어 가야겠다. 어떤 처지의 첫날밤이 동행할지라도 끌어안고 값지게 맞아야겠다. 그러기에 나는 날마다 신방을 꾸미고 정갈하게 첫날밤을 맞으련다.  


                                        (2007.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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