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종
2007.11.10 12:38
만 종 (晩鐘)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기) 김 동 영
삽을 밭두렁에 깊이 꽂아놓고 허리를 폈다. 얼마나 남았을까? 아직도 남은 두렁이 두 개이니 삼분의 일이 남은 셈이다. 모자를 벗고 이마의 땀을 모자 천으로 씻어 내렸다. 저 멀리 광활한 들판의 끝에서 물들어가기 시작한 늦가을의 석양을 바라보았다. 문득 학창시절 미술책에서 만난 뒤 내 마음의 고향처럼 언제나 내 머릿속에 남아있던 ‘밀레의 만종’이란 그림이 떠올랐다. ‘샤이평원’에 서서 모자를 벗어들고 삼종기도를 하는 농부부부의 모습이다.
지난 칠월 초순쯤 나는 시장에서 고구마 순을 구해서 이 농장으로 왔었다. 그 때 나는 감자농사를 이미 실패한 뒤였다. 감자를 심고 싶었던 이유는 별다른 뜻이 아니었다. 토질이 안성맞춤인데다 감자의 흰 꽃이 ‘이효석’의 봉평 메밀 꽃밭을 연상케 하여 좋기도 했지만, 땅속에서 굵은 감자가 탐스러운 얼굴을 내미는 재미를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소박한 내 꿈은 헛된 꿈으로 끝나버렸다. 아니, 오히려 내 꿈이 이루어졌다면 오늘 이렇게 고구마를 캐며 밀레의 만종을 떠올리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벌써 1년이 조금 넘었나보다. 멀리 동남쪽으로 모악산이 보이고 앞으로는 지평선 대신 나지막한 산이 늘어서 있으며 넓은 평야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이 농장이 마음에 들어 기쁜 마음으로 사들인 것이다. 게다가 바람과 물길마저 좋았다. 주변 언덕의 촘촘한 잔디는 종일 태양빛을 받아 윤기가 흘렀고, 나는 그런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노을이 지는 저 먼 들판을 평화롭게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이 언덕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 낙원이었다.
지난여름 장마가 끝날 무렵 감자를 심었던 밭을 삽으로 갈아엎어 나갔다. 고온다습한 여름 날, 지열과 햇빛으로 온 몸은 땀과 흙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흘러내린 땀으로 오히려 안경이 시야를 가렸고, 허리도 아프기 시작했다. 무릎까지 자라난 잡초는 제대로 걷어내지도 못한 채 고구마를 심을 수 있는 십여 미터가 넘는 두렁을 기어코 여섯 개나 만들고 말았다. 나로서는 성벽 쌓기만큼이나 고생을 한 셈이다.
이번엔 호미로 두렁을 파고 고구마 순을 꽂아 나갔다. 몹시 지치고 힘들었다. 내가 언제 고구마를 가꾸어 보았던가? 농부흉내를 내고 있을 뿐. ‘만종’의 화폭에 서있는 두 농부가 더욱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고구마를 캐는 날이다. 나로서는 고구마 농사에 관한 마지막 지식까지 동원해야 했다. 고구마는 첫 서리가 내리고 찬바람이 일 때 캐는 것이라고 했다. 누가 도시에서 살다가 삶에 지쳐 힘들면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 볼까하고 푸념했던가?
고구마 순을 꽂은 다음날 다행히 비가 내려서 그 순은 싱싱하게 피어났다. 감자를 심었을 때처럼 어려운 것은 지금부터다. 얼마 뒤에 보니 고구마덩굴은 무성하게 자란 잡초 속에 짓눌리고 뒤엉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또다시 감자의 재판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당연히 고구마 편을 들어 잡초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작열하는 햇볕과 찌는 듯한 더위는 잡초 편이었다. 이렇게 몇 차례 전쟁을 치렀는데도 끈질긴 잡초의 생명력 앞에 난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그때가 구월 중순쯤이었다. 나는 이미 몇 포기 심은 토마토 등 다른 농사들도 실패하고 말았다. 땅바닥에 내려놓은 바구니 속에는 달랑 씨감자 몇 개가 담겨있었다. 어둠이 드리운 그림 속 농부부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은 두 두렁에서 다시 삽질을 시작하였다. 무릇 생명력은 무서운 것인지 고구마덩굴도 잡초 속에서 탈출하고자 뿌리를 뻗어 나갔으니 원뿌리를 찾기조차도 쉽지 않았다. 나는 고구마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을 꽂는 시기도 늦은데다 시비, 제초, 관리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주지 않은 채 수확의 기쁨만 누리려고 했었다.
장갑을 벗으니 서편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는데 빨간 얼굴의 고구마는 석양빛을 받아 더욱더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준비해간 다섯 개의 종이상자 중 한 개를 겨우 채우고 나는 대지에 서서 비록 적은 수확이지만 누군가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었다.
‘제게 이 소중한 고구마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빛과 비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노력한 만큼만 수확하겠습니다. 제가 한 일만큼만 기대하겠습니다.’
나는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을 떠 올리며 한 상자의 고구마를 메고 농장에서 내려왔다.
(2007. 11. 10.)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기) 김 동 영
삽을 밭두렁에 깊이 꽂아놓고 허리를 폈다. 얼마나 남았을까? 아직도 남은 두렁이 두 개이니 삼분의 일이 남은 셈이다. 모자를 벗고 이마의 땀을 모자 천으로 씻어 내렸다. 저 멀리 광활한 들판의 끝에서 물들어가기 시작한 늦가을의 석양을 바라보았다. 문득 학창시절 미술책에서 만난 뒤 내 마음의 고향처럼 언제나 내 머릿속에 남아있던 ‘밀레의 만종’이란 그림이 떠올랐다. ‘샤이평원’에 서서 모자를 벗어들고 삼종기도를 하는 농부부부의 모습이다.
지난 칠월 초순쯤 나는 시장에서 고구마 순을 구해서 이 농장으로 왔었다. 그 때 나는 감자농사를 이미 실패한 뒤였다. 감자를 심고 싶었던 이유는 별다른 뜻이 아니었다. 토질이 안성맞춤인데다 감자의 흰 꽃이 ‘이효석’의 봉평 메밀 꽃밭을 연상케 하여 좋기도 했지만, 땅속에서 굵은 감자가 탐스러운 얼굴을 내미는 재미를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소박한 내 꿈은 헛된 꿈으로 끝나버렸다. 아니, 오히려 내 꿈이 이루어졌다면 오늘 이렇게 고구마를 캐며 밀레의 만종을 떠올리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벌써 1년이 조금 넘었나보다. 멀리 동남쪽으로 모악산이 보이고 앞으로는 지평선 대신 나지막한 산이 늘어서 있으며 넓은 평야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이 농장이 마음에 들어 기쁜 마음으로 사들인 것이다. 게다가 바람과 물길마저 좋았다. 주변 언덕의 촘촘한 잔디는 종일 태양빛을 받아 윤기가 흘렀고, 나는 그런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노을이 지는 저 먼 들판을 평화롭게 내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이 언덕은 나에게 기쁨을 주는 낙원이었다.
지난여름 장마가 끝날 무렵 감자를 심었던 밭을 삽으로 갈아엎어 나갔다. 고온다습한 여름 날, 지열과 햇빛으로 온 몸은 땀과 흙으로 뒤범벅이 되었다. 흘러내린 땀으로 오히려 안경이 시야를 가렸고, 허리도 아프기 시작했다. 무릎까지 자라난 잡초는 제대로 걷어내지도 못한 채 고구마를 심을 수 있는 십여 미터가 넘는 두렁을 기어코 여섯 개나 만들고 말았다. 나로서는 성벽 쌓기만큼이나 고생을 한 셈이다.
이번엔 호미로 두렁을 파고 고구마 순을 꽂아 나갔다. 몹시 지치고 힘들었다. 내가 언제 고구마를 가꾸어 보았던가? 농부흉내를 내고 있을 뿐. ‘만종’의 화폭에 서있는 두 농부가 더욱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고구마를 캐는 날이다. 나로서는 고구마 농사에 관한 마지막 지식까지 동원해야 했다. 고구마는 첫 서리가 내리고 찬바람이 일 때 캐는 것이라고 했다. 누가 도시에서 살다가 삶에 지쳐 힘들면 시골에 가서 농사나 지어 볼까하고 푸념했던가?
고구마 순을 꽂은 다음날 다행히 비가 내려서 그 순은 싱싱하게 피어났다. 감자를 심었을 때처럼 어려운 것은 지금부터다. 얼마 뒤에 보니 고구마덩굴은 무성하게 자란 잡초 속에 짓눌리고 뒤엉켜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또다시 감자의 재판이 시작된 것이다. 나는 당연히 고구마 편을 들어 잡초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그러나 작열하는 햇볕과 찌는 듯한 더위는 잡초 편이었다. 이렇게 몇 차례 전쟁을 치렀는데도 끈질긴 잡초의 생명력 앞에 난 그만 손을 들고 말았다. 그때가 구월 중순쯤이었다. 나는 이미 몇 포기 심은 토마토 등 다른 농사들도 실패하고 말았다. 땅바닥에 내려놓은 바구니 속에는 달랑 씨감자 몇 개가 담겨있었다. 어둠이 드리운 그림 속 농부부부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은 두 두렁에서 다시 삽질을 시작하였다. 무릇 생명력은 무서운 것인지 고구마덩굴도 잡초 속에서 탈출하고자 뿌리를 뻗어 나갔으니 원뿌리를 찾기조차도 쉽지 않았다. 나는 고구마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을 꽂는 시기도 늦은데다 시비, 제초, 관리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주지 않은 채 수확의 기쁨만 누리려고 했었다.
장갑을 벗으니 서편 하늘이 붉게 물들어가고 있는데 빨간 얼굴의 고구마는 석양빛을 받아 더욱더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준비해간 다섯 개의 종이상자 중 한 개를 겨우 채우고 나는 대지에 서서 비록 적은 수확이지만 누군가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었다.
‘제게 이 소중한 고구마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빛과 비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겠습니다. 앞으로는 제가 노력한 만큼만 수확하겠습니다. 제가 한 일만큼만 기대하겠습니다.’
나는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을 떠 올리며 한 상자의 고구마를 메고 농장에서 내려왔다.
(2007.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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