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2007.11.13 16:10

이민숙 조회 수:37 추천:3

망 각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목요반) 이민숙

인간의 한정된 뇌 주름 속에 파노라마처럼 차곡차곡 저장되는 기억들은 한계가 있는 것일까. 과학적으로 보면 무한하다고 한다. 우리가 아무리 최대치로 활용해도 10%를 넘지 못하고 90%는 빈 방으로 남는다고 한다. 뇌는 쓰면 쓸수록 더 활용도가 높아진다는데 우린 자신의 머리를 최대한으로 활용하지 않으면서 기억이 잘 안 될 땐 머리 탓만 한다. 어쩜 우리는 자기 편리한대로 전가동도 시키지 않은 뇌를 자체치유 방법으로서 망각이란 시스템을 작동시키는지도 모르겠다.
그리스 신화에 인간이 한 번 건너면 다시는 못 돌아온다는 ‘레테(망각)의 강’이 있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가는 중간매체개념의 이 망각의 강을 건너면 과거의 모든 기억은 다 사라진다고 한다. 마지막 순간에 나쁜 기억은 다 버리고 좋은 추억만 갖고 간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늦은 밤 무심코 TV에서 오늘(11. 11)이 ‘이리역 폭발참사 30주년’이라고 했다. 당시 사건을 겪었던 가수 하춘화 씨 등이 이 추모행사에 참여했다는데, 폭발사고 후유증은 아직도 남아 있고 59명의 희생자 진혼제가 30년 만에야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동안 강산이 세 번 바뀔 정도로 세월이 흘렀다는 말인가. 나의 10대가 끝날 무렵 겪었던 엄청난 그 충격을 난 마치 역사의 한 장으로서만 묻어두고 살았다. 당시는 폭발사고란 개념조차 생소할 때였다. LNG나 LPG 등이 가정에 보급되기 전이었고 대형공사 등이 별로 없던 때였다.

11월 11일. 그 날은 대입 예비고사 다음날이어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친구와 지금은 지명이 바뀐 익산역 부근의 이리극장에 갔었다. ‘대한뉴스’가 끝나고 영화가 막 시작되었을 때, 어디선가 지축을 흔드는 폭발음과 함께 암흑이 되었다. 겨우겨우  떠밀려 밖으로 나와 보니 시가지는 폐허가 된 전쟁터 같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건물은 부서지고 상가의 깨진 유리파편들이 길을 덮고 있어 마치 ‘뽀드득뽀드득’ 유리조각 길을 걷는 것 같았다.  어쩔 줄 몰라 밖으로 나온 수많은 인파에 밀려 친구와 울면서 어디로 갈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사람, 얼굴에서 피가 흐르는 사람 등 모두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우왕좌왕 했었다. 어디선가 몰려다니는 군중 속에서 전쟁이 터졌다는 말이 나왔고, 난 이렇게 지구가 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도 했었다. 우리는 덜덜 떨며 집으로 향했다.

다음 날에야 기차 화약고가 폭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폭발 지점엔 엄청나게 큰 웅덩이가 생겼고 그 부근 건물은 대파되어 사망자가 무려 59명이었고, 만여 명의 이재민이 생긴 대형 사고였다. 그나마 그때 텔레비전에서 이란과 한국의 축구중계를 하고 있어서 인명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고 했다. 역 부근 영정통 번화가의 번성했던 일본의 잔재물인 적산가옥은 거의 다 부서지고, 당시 이리시의 종기처럼 꺼림칙했던 창인동 홍등가는 삽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고현장에서 불과 몇 십 미터밖에 안 떨어진 곳의 삼남극장에선 마침 당시 톱스타 ‘하춘화 쇼’가 열리고 있었는데 그땐 무명이었던 개그맨 고(故) 이주일 씨가 대 스타를 업고 대피했다 해서 한참 후까지 화젯거리가 되었다.

사고 다음 날 학교(이리여고)에 가니 시험이 끝났다는 해방감을 누릴 여유는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래도 시험이 끝난 뒤에 사고를 당한 것이 그래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여기저기 사고로 인한 여파가 너무 컸기에 온통 그에 관한 이야기로 며칠이 흘렀다. 아직 더 중요한 본고사가 남아 있었는데도 분위기는 쉽사리 안정되지 못했다. 학교 유리창이 남아 있는 게 하나도 없을 정도여서 비닐로 유리창을 임시로 가리고 그 추운 겨울을 지내야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입시 때만 되면 아무리 좋던 날씨라도 갑자기 쌀쌀해지거나 첫눈이 때맞춰 내리듯이 그 혹한 속에서 본고사를 대비하고 졸업을 맞아야 했던 기억이 아련하다.

막 십대를 벗어나려던 때 겪었던 큰 사건이었건만 나름대로 내 인생길을 엮어가노라 몰두하다보니 거의 망각 속에서 살았던 것 같다. 그 뒤 익산시는 역 주변이 새로이 정비되었고 철도의 중심지답게 KTX가 운행되어 수출과 물류의 종합도시로 발전했다. 시의 이름도 솜리나 이리 대신 본래의 ‘익산시’로 바뀌어 거듭 났다. 30년이나 되는 세월을 지나다보니 이렇게 역사의 한 장이나 매스미디어를 통해 접하리만치 기억은 많이 흐릿해진 것 같다. 마치 내가 직접 겪지 않았던 사건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때 같이 극장에 갔다 울먹이면서 오들오들 떨며 거리를 헤매던 그 친구는 일찍이 결혼을 하더니만 6년 전에 남편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혼자 남았다. 다감하고 성실해서 금슬 좋던 부부였는데 암으로 3년이나 투병하다 마지막엔 기도원에 매달리며 꼭 살려내겠다고 몸부림을 쳤는데 운명은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시신을 대학병원에 기증해서 두 번 장례를 치렀는데 얼마나 그간의 고통이 컸으면 통통했던 친구는 마른나무처럼 바싹 말라 버렸을까. 지금도  인상 좋던 그 친구 남편을 떠올리면 현실을 믿기 어렵다. 집이 서울이라고 대학신입생이었던 우리 큰애를 자기가 데리고 있고 싶다던 그 친구는 2년 전 딸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 남편을 잊기 어려웠던 것일까. 곳곳에 스며있는 남편의 흔적이 어찌 쉽사리 지워지고 잊혀지겠는가.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기약 없는 그 친구에게 난 마지막으로 뭔가 해주고 싶었다. 그녀가 자기가 살게 될 뉴욕에서 대서양을 바라보며 우리나라의 쪽빛 바다를 떠올리도록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떠나기 일주일 전, 친구 셋이서 여수 향일암 바닷가에서 감성돔을 먹으며 아쉬움을 나눴다. 겨울 찬바람에 깨질듯 투명한 푸른 바다를 보며 한동안 그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린 서로 어떤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까. 생활에도 별 어려움은 없었던 것 같고 만능스포츠맨인 데다가 모태신앙으로 자신을 컨트롤할 구심점도 갖고 있어서 잘 버티는 줄만 알았었다. 그런데 남편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에서 혼자서 견디기 힘들었을까. 아니면 아픈 기억을 다 잊고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태평양을 건너려는 것이었을까. 동생의 사업기반이 안정돼 있는 뉴욕으로 가기로 결정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이 번뇌했을까. 체구도 크고 성격도 화통해서 나와는 정반대인 그 친구가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내게 했던 말은,
  “난 한국남자 중에는 하나도 맘에 드는 사람이 없더라. 미국 가서 키도 크고 좋은 남자 만날 거야.”
이러면서 일부러 내 맘을 홀가분하게 풀어주며 떠나갔다.

망각이란 편리한 체계가 있기에 과거의 아픈 족쇄에서 벗어나 새롭게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좋았던 기억은 빨리 잊혀지고 아픈 기억은 오래까지 남는다. 아마도 좋은 것은 행복한 순간 발산되는 정화작용인데 비해 아픔은 가슴에 촘촘히 새겨져 있기 때문이리라. 이 망각이란 것이 반복되어 나타나면 ‘건망증’이란 병적장애로 발전한다. 뇌가 노화되어 제대로 기능을 할 수 없어 일시적으로 어느 기억이 통째로 사라지거나 드문드문 기억나는 뇌 장애자가 되는 것이다. 사소하게 끝나버릴 일도 있겠지만 엄청 큰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오늘 밤엔 뉴욕에 있는 친구에게 메일이라도 보내야겠다. 아직 그녀에게서 미국 남자를 사귄다든지 결혼을 한다든지 하는 소식은 없다. 기억을 잠재우고 과거의 흔적 속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어쩌면 친구는 아픈 상처와 외로움을 탈피하고 새로운 인생을 시도하고 싶어 떠난 그곳에서 지난날을 갈구하고 그리움 속에서 더 헤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2007.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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