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2008.02.26 18:18
막걸리
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창작반: 수필가 윤석조
“막걸리라도 한 사발 드시고 하시오 잉?”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이었다. 뚝뚝 떨어지는 얼굴의 땀을 옷소매로 닦으며, 허리를 펴고 뒤를 돌아보았다. 빈 손수레를 지팡이 삼아 길모퉁이를 돌아 나오다, 서서 웃고 있는 우리 누님 같은 가게 할머니였다.
내가 막걸리를 처음 마셔본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학교 갔다 오는 길에 한 동네 사는 아저씨의 빈 소달구지를 만나 타고 왔었다. 부용을 지날 때 길가에 소를 매어 두고, 주조장으로 들어가며 따라오라 하였다. 아저씨는 소달구지를 끌고 다니다가 가끔 들리는 것 같았다. 종업원과 몇 마디 하시고는 항아리를 열고, 바가지로 막걸리를 뜨시더니 서서 꿀꺽꿀꺽 물마시듯 마셨다. 그리고 또 술을 떠서 나에게 마시라고 주셨다. 나도 배고프고 목이 말랐던 참이라, 한 쪽으로 돌아서서 잘 마셨는데 안주는 소금이었다. 그 뒤 청소년기를 술과 담을 쌓고 살았으나, 그 맛은 지금도 내 혀끝에 남아 잊혀지지 않는다.
아버지가 늘 술에 취하여 다른 사람 등에 업혀 오시거나, 길거리에 쓰러져 있다는 소식이 오면 온 식구가 동원되어 모셔 와야 했었다. 술 때문에 가정불화가 잦아서 아버지를 미워했다. 나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자신과 굳은 약속을 하였다. 서른이 가깝도록 내 친구나 동네 사람들, 친척들, 직장동료들까지도 나는 술을 못하는 사람으로 알았다.
어느 날 나와의 약속을 깨버린 큰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전교생 중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우리 반 학생의 어머니가, 초여름에 찹쌀막걸리를 만들어 놓고 토요일 오후 선생님들을 집으로 초청하였다. 맨 먼저 술잔이 돌아가려는데 선생님들은 담임 먼저 들어야한다며 술잔을 나에게 계속 미루었다. 학부모도 담임이 먼저 마셔야 한다며 술잔을 들고 계셨다. 늘 술자리를 피하는 나로서는 어려운 자리가 되었다. 반잔만 받으라는 게 학부형님과 선생님들의 끈질긴 권유였다. 내 마음도 막걸리라면 이길 것 같았다. 못 이기는 척 반잔을 받아 마셨다. 이때부터 술자리를 기피한 보복(?)이라도 하듯 술잔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나도 서너 잔을 마시고 취한 몸으로 하숙집까지 잘 왔는데, 다른 선생님들은 길가에서 쓰러지거나 보리밭에서 자고 온 일이 일어났다. 그 뒤부터는 나도 술집에 끌려 다녀야 했고, 나는 아버지를 닮아 술을 잘 마실 수 있다는 못된 자신감 같은 것이 내 안에 자리하게 되었다.
명절이나 방학 때 집에 가면 동네 어른들이나 친구들에게, 즐거운 술자리를 만들었다. 아버지를 닮아 술을 잘 마신다는 칭찬(?)이 싫지는 않았다. 그 말을 은근히 좋아하였고 자랑으로 여겼지만,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어 만취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술이라면 청탁을 가리지 않고 많이 마셨으니, 제자들이 ‘금복주’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 별명도 싫지 않았다.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니 주의성도 없어져서 술자리와 마시는 양이 많아졌다. 가족은 물론 멀리 사는 형제들에게도 걱정을 끼쳤다. 느닷없는 위암 수술로 3년 동안 술을 뚝 끊어야 했다.
옛날 살았던 고향 집터에 고추를 심고 난 뒤에는 고향에 자주 다녀왔다. 옛날 아버지가 고추농사를 지을 때, 옆에서 도와드린 적이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어느새 고추가지에는 조팝나무 꽃 같은 하얀 꽃이 핀 것도 있어 재미가 있었다. 비료주기와 농약하기, 시설관리가 문제였다. 새로운 농사법을 배우려고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가게를 찾아갔다. 그때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농민들은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다. 반가워하며 나에게도 술잔을 내밀면 사양하다 막걸리를 한 잔 받는다. 막걸리는 대대로 내려온 농사와 함께 한 농주(農酒)였다. 농사 이야기와 동네소식을 주고받으며 인정이 오간다. 피곤을 잊고 기분 좋은 얼굴로 시내버스를 타고 온 일이 몇 번 있었다.
울타리의 나무 그림자가 고샅길을 덮을 때, 집에 갈 준비를 하고 가게에 들렀다. 동네 사람들과 낯익은 후배들이 한 잔씩 마시고 있었다. 반가워하는 후배가 맥주잔을 내밀었지만 나는 막걸리를 찾았다. 시원한 막걸리가 목구멍에 꿀컥꿀컥 넘어가고, 구수한 옛 이야기들로 얼른 일어설 수도 없었다.
거울에 비친 불콰한 내 얼굴에서 돌아가신 아버님의 모습이 보인다. 막걸리는 그렇게 나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2006. 9. 1.)
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창작반: 수필가 윤석조
“막걸리라도 한 사발 드시고 하시오 잉?”
등 뒤에서 들려오는 말이었다. 뚝뚝 떨어지는 얼굴의 땀을 옷소매로 닦으며, 허리를 펴고 뒤를 돌아보았다. 빈 손수레를 지팡이 삼아 길모퉁이를 돌아 나오다, 서서 웃고 있는 우리 누님 같은 가게 할머니였다.
내가 막걸리를 처음 마셔본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학교 갔다 오는 길에 한 동네 사는 아저씨의 빈 소달구지를 만나 타고 왔었다. 부용을 지날 때 길가에 소를 매어 두고, 주조장으로 들어가며 따라오라 하였다. 아저씨는 소달구지를 끌고 다니다가 가끔 들리는 것 같았다. 종업원과 몇 마디 하시고는 항아리를 열고, 바가지로 막걸리를 뜨시더니 서서 꿀꺽꿀꺽 물마시듯 마셨다. 그리고 또 술을 떠서 나에게 마시라고 주셨다. 나도 배고프고 목이 말랐던 참이라, 한 쪽으로 돌아서서 잘 마셨는데 안주는 소금이었다. 그 뒤 청소년기를 술과 담을 쌓고 살았으나, 그 맛은 지금도 내 혀끝에 남아 잊혀지지 않는다.
아버지가 늘 술에 취하여 다른 사람 등에 업혀 오시거나, 길거리에 쓰러져 있다는 소식이 오면 온 식구가 동원되어 모셔 와야 했었다. 술 때문에 가정불화가 잦아서 아버지를 미워했다. 나는 절대로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자신과 굳은 약속을 하였다. 서른이 가깝도록 내 친구나 동네 사람들, 친척들, 직장동료들까지도 나는 술을 못하는 사람으로 알았다.
어느 날 나와의 약속을 깨버린 큰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전교생 중에서 공부를 제일 잘하는 우리 반 학생의 어머니가, 초여름에 찹쌀막걸리를 만들어 놓고 토요일 오후 선생님들을 집으로 초청하였다. 맨 먼저 술잔이 돌아가려는데 선생님들은 담임 먼저 들어야한다며 술잔을 나에게 계속 미루었다. 학부모도 담임이 먼저 마셔야 한다며 술잔을 들고 계셨다. 늘 술자리를 피하는 나로서는 어려운 자리가 되었다. 반잔만 받으라는 게 학부형님과 선생님들의 끈질긴 권유였다. 내 마음도 막걸리라면 이길 것 같았다. 못 이기는 척 반잔을 받아 마셨다. 이때부터 술자리를 기피한 보복(?)이라도 하듯 술잔이 나에게 집중되었다. 나도 서너 잔을 마시고 취한 몸으로 하숙집까지 잘 왔는데, 다른 선생님들은 길가에서 쓰러지거나 보리밭에서 자고 온 일이 일어났다. 그 뒤부터는 나도 술집에 끌려 다녀야 했고, 나는 아버지를 닮아 술을 잘 마실 수 있다는 못된 자신감 같은 것이 내 안에 자리하게 되었다.
명절이나 방학 때 집에 가면 동네 어른들이나 친구들에게, 즐거운 술자리를 만들었다. 아버지를 닮아 술을 잘 마신다는 칭찬(?)이 싫지는 않았다. 그 말을 은근히 좋아하였고 자랑으로 여겼지만,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어 만취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하였다. 나이가 들면서 술이라면 청탁을 가리지 않고 많이 마셨으니, 제자들이 ‘금복주’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 별명도 싫지 않았다.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니 주의성도 없어져서 술자리와 마시는 양이 많아졌다. 가족은 물론 멀리 사는 형제들에게도 걱정을 끼쳤다. 느닷없는 위암 수술로 3년 동안 술을 뚝 끊어야 했다.
옛날 살았던 고향 집터에 고추를 심고 난 뒤에는 고향에 자주 다녀왔다. 옛날 아버지가 고추농사를 지을 때, 옆에서 도와드린 적이 있어 큰 도움이 되었다. 어느새 고추가지에는 조팝나무 꽃 같은 하얀 꽃이 핀 것도 있어 재미가 있었다. 비료주기와 농약하기, 시설관리가 문제였다. 새로운 농사법을 배우려고 동네 사람들이 모이는 가게를 찾아갔다. 그때쯤 일을 마치고 돌아온 농민들은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다. 반가워하며 나에게도 술잔을 내밀면 사양하다 막걸리를 한 잔 받는다. 막걸리는 대대로 내려온 농사와 함께 한 농주(農酒)였다. 농사 이야기와 동네소식을 주고받으며 인정이 오간다. 피곤을 잊고 기분 좋은 얼굴로 시내버스를 타고 온 일이 몇 번 있었다.
울타리의 나무 그림자가 고샅길을 덮을 때, 집에 갈 준비를 하고 가게에 들렀다. 동네 사람들과 낯익은 후배들이 한 잔씩 마시고 있었다. 반가워하는 후배가 맥주잔을 내밀었지만 나는 막걸리를 찾았다. 시원한 막걸리가 목구멍에 꿀컥꿀컥 넘어가고, 구수한 옛 이야기들로 얼른 일어설 수도 없었다.
거울에 비친 불콰한 내 얼굴에서 돌아가신 아버님의 모습이 보인다. 막걸리는 그렇게 나와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2006. 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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