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보 유감

2008.03.08 16:58

정장영 조회 수:716 추천:2

족보 유감
전주 안골노인복지회관  수필창작반  정장영


정년퇴임을 한 뒤 한때 바쁜 시간을 보낸 적도 있었지만 지날수록 무료(無聊)하였다. 젊었을 적엔 공사(公私)간 바쁜 생활로 생각지도 못했던 종사(宗事)에 관심을 갖게 되어 대종회란 곳을 드나들며 가문의 상세한 종사(宗史)를 알게 되었다. 좀 더 일찍 눈을 떴더라면 자녀교육에도 큰 도움을 주었을 텐데 하며 후회도 했다.

대종회라고 하면 가문의 족보 이야기가 떠날 수 없다. 족보를 발간한지 30년이 가깝고 때 마침 호주제 폐지와 새로운 가족관계등록법 시행에 따라 족보편찬 문제가 새롭게 대두되었다. ‘앞으로  필요하다’는 쪽과  ‘필요 없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결국 호적이 없어진 이때에 족보마저 없어진다면 일가친척의 기록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절대 다수 찬성으로 편찬키로 결정되었고 나도 편찬위원으로 봉사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근래 민주화와 인권신장으로 남성 위주의 호주제 폐지와 새로운 가족관계등록법 시행이 사회 문제가 되면서 국내 명문거족(名門巨族)들의 족보편찬사업이 성행하여 수도권 일대 출판인쇄업소의 업무량이 급증하였다고 한다. 이는 어느 종문(宗門)이나 생각은 비슷한 모양이다.

족보를 만들려면 종인을 찾아 취지를 설명하고 동의를 얻어 수단을 수집해야만 했다. 이 사업에 동참하려면 이해도 중요하지만 경제적 부담도 상당히 컸으나 대부분의 종인들은 이해하고 90‰이상 동참할 수 있었다. 개중에는 세류(世流)에 따라 이해를 못하는 분들도 더러 있었다. 종인 거주지를 아는 분은 연락이 잘 되었다. 옛날 농경시대에는 동족부락도 있고 대개 모여 사는 경우가 많아 종사(宗事 )보기가 쉬웠다. 그러나 지금은 도시 각처로 생활 따라 흩어져 살기에 주소파악이 힘들었고 영영 연락도 못한 종인과 거부하는 분도 더러 있었다.

과연 족보가 필요한 것인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생각해 볼 일이다. 족보제도는 어느 나라든지 다 있는 것이며 없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한다. 가축도 계보가 뚜렷하면 제 값을 받고 자랑하는 세상이 아니던가? 사람으로서 성(姓)이 있으면 보(譜)가 있고, 나라가 있으면 사(史)가 있는 것은 고금(古今)의 통례이다.

보첩의 기원은 서양은 모르지만 동양은 중국 육조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북송의 대문장가 삼소(소순 소식 소철)에 의하여 만들어져 그 규모가 우수하여 소보(蘇譜)라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사대부의 집에 가승(家乘)이 전해오다가 중종(1516) 때 처음으로 족보가 인쇄된 것으로 전한다. 당시는 제도상 양반의 자손이라야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에 자기 선조의 현달(顯達)을 표현하고자 족보를 만들었다. 또 선조의 혜택을 입거나 선조의 업적을 자랑하고 싶은 것도 하나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근친혼인도 예방하고 옛날과 달리 씨족의 역사며 혈통을 실증하는 문헌으로서 같은 씨족간의 서열과 촌수 분별에 필요한 것이 바로 족보이다. 족보는 이름 없는 한낱 촌부라 할지라도 오직 이곳(정부기록과 다른 기록물이 다 없어진다 해도)에만 영원히 기록으로 남는 하나 뿐인 인간역사의 개별기록물이라 할 수 있다.

이 일을 추진하다보니 아주 상반된 생각을 갖는 분도 있었다. 아주 적극 동참하는 분이 있는가하면, 장손(長孫)이 아니니 관심이 적어 장손에게 미루는 분, 마지못해 동참하는 분, 끝내 거부하는 분 등 다양했다. 옛날에는 장손이 종사문제를 처리하고 경제적 부담도 전담하는 경향이었으나 오늘날은 같은 형제요 집안이라 할지라도 각자의 동의와 부담이 따라야 한다. 이도 민주화되어 각자가 채임 지는 사회기풍이 이루어졌다고나 할까?

한편  아주 젊은 종인인데 열성적이고 기특한 분도 있었다. 한 일가는 그간 수대(數代)를 독자로 고향을 떠돌아 누보(漏譜)가 거듭되어 호적에 기록된 본관만 알고 종파 및 세계를 알 수 없어 안타까웠다. 다행이 전해 내려온 100여 년 전(고종 때)에 발행된 족보를 보관하고 있어서 이를 참고하여 호적의 제적부를 추적 끝에 성공, 종파세계(世系)를 찾는데 도움이 되어 입보(入譜)한 기쁨도 있었다.

  일제강점 말기의 생각이 떠오른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그때 우리 가족이 일본 오사카(大阪)에 살고 있을 적에 백부님께서는 강압에 시달려 창씨제도를 받아들였지만 창씨 된 서류를 보내주시면서 비록 일본식으로 창씨는 했지만 민족과 성씨의 뿌리를 알아야 한다며 손수 가승을 만들어 보내 주셨다. 그것을 계기로 민족과 고려, 조선왕조라는 말도 어린 나이에 알게 되었다.
  
숭조(崇祖)사상은 이어질 것인가? 족보 없는 가문은 거의 없다. 이제 호주제가 폐지되고 남성 위주의 부계혈통원칙이 무너져 성(姓)이 ①혼인 신고 때는 남녀 합의에 따라 ②재혼 시의 자녀는 부모양성(兩姓)가운데 선택 ③ 친양자 입양으로 등, 성이 변경될 수 있게 되어 씨족개념이 희박해 졌다는 것이다. 이는 극소수의 문제이겠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일이다. 이런 추세로 간다면 씨족개념이 희박해지고 성씨(姓氏)의 의미가 없어질 터이니 성이 필요 없는 이름만 쓰는 사회가 다가올지 누가 아는가?

숭조사상이 약해지므로 신생아수도 급격히 줄어들고, 사회문제화 되어 정부는 출생장려정책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산아제한(産兒制限)정책이 엊그제 일 같다. 정책당국자는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 셈이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숭조사상을 고취하여 조상도 숭상(崇尙)하고 미래 지향적으로 인구도 늘릴 방도도 찾아야할 것이 아닌가?

  족보가 발간되면 의무적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비치해야 하고, 각 주요 대학교도서관에도 보내야 한다하니 좋은 일이다. 마지막 발간이 된다면 보물급 유산이 될 것인가?  
출판인쇄기술도 발전하여 컴퓨터가 활용되니 작업이 매우 간편하고 쉬워졌다고 한다. 마지막 단계에 이른 족보발간사업이 하루 빨리 종결되어 각 종인의 가정에 배송되기를 기대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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