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쓸만한데

2008.03.19 19:12

이의 조회 수:722 추천:2

아직 쓸만한데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이 의

  
“나 아직 쓸만한데 주인이 버렸어요.”
생활쓰레기 처리장을 지나노라면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뜰 안에 창고라도 있다면 보관하고 싶은 물건들이 자주 눈에 띈다. 어느 집이 이사라도 하는 기척이 보이면 공연히 신경이 쓰인다. 이번엔 어떤 걸 버리려나. 어쩌다 근사한 화분이라도 눈에 띄면 누가 가져갈세라 얼른 집으로 옮긴다. 가끔 횡재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들고 와 어루만지며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며칠 전 마음에 드는 하얀 백자화분을 만났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키에 모서리를 둥글린 우아한 네모화분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3개의 둥치 끝이 메마른 꺼풀에 싸여 있었다. 베란다에 놓고 꺼풀을 제치니 파란점이 빠끔히 내다보고 있었다. 아마도 베란다에 방치되어 물도 영양도 부족해서 봄이 와도 싹을 틔울 힘이 없었나 보다. 우선 거름을 주고 물을 흠씬 뿌려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놓았다. 며칠이 지나자 메말라 죽은 것 같은 둥치에서 파란 줄기가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더니 다음날 아침에는 여린 잎이 피어나고 있었다. 생명이 소생한다는 것을 보는 것은 기쁨이고 은총이었다. 어쩌면 뿌리 채 뽑혀 생을 마감했을지도 모르는 재생의 아름다움이 내 마음을 한없이 기쁘게 했다. 아직은 알 수 없지만 화분 품위로 봐서 귀한  화초이리라 짐작할 뿐이다.

살아있는 모든 생물은 사랑을 먹고 산다. 식물도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무리 바빠도 출근하기 전에 베란다 화분을 둘러보고 ‘다녀올게.’라고 속삭이며 상태를 살피며 다녔던 정성은 어디로 갔는지 요즈음에는 물을 제때 안 주어 화초를 말려 죽이는 사건이 가끔 일어나 황당하지만 방지책을 강구하는 일이 급한데 말 뿐이다.
내 방안에는 마른 화분이 하나 있다. 작년 가을 어느 토요일 마트에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망설이다 집으로 들고 왔다. 본 바탕은 붉은 황토색이고 길이로 줄을 그어 입체감을 살려 나온 부분은 연미색이고 어찌 보면 무질서 속에 질서가 있는 것 같아 보이는  꽤나 큰 화분이었다. 50cm의 키에 중년 아줌마의 배 모양을 닮아 앞뒤는 펑퍼짐하게 조금 불룩하고 중간 양쪽은 보기 싫지 않을 만큼 두툼하다. 앞 중앙을 차지하고 있는 격자문 두 짝은 문을 열면 조선시대의 정경이 펼쳐 질 것 같은 창살문이 있다. 아마도 조화나 마른 나무를 이용해 설치화분 용도로 쓰이지 않았나 싶다. 마침 숯으로 된 장식품이 눈에 거슬려서 숯을 용기 안에 넣고 자잘한 조화 몇 송이를 꽂으니 훌륭한 장식품으로 살아났다. 탁자 위에 놓고 보니 넉넉한 마음을 가진 마음씨 좋은 아저씨가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물건의 진가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드러나기 마련이지만 이 화병을 바라볼 때마다 버린 이에게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다.

새 것과 더 큰 것만 좋아하는 주부들 덕에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도 있다. 가진 것 없이 새 살림을 시작하더라도 돈 한 푼 안 들이고 마련이 가능할 만큼 버리는 문화가 만연돼 있는 것이 우리네 현실이다.  한 달만 아파트 단지를 눈여겨본다면 멀쩡한 살림살이 한두 점 줍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다.
일본인 유학생이 주어다 살림살이를 갖추고 사는 걸 본 일이 있다. 그 학생 왈 이렇게 멀쩡한 냉장고와 세탁기를 버릴 수 있느냐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라마다 겨레마다 생김새도 다르고 생활습관이 다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새 것과 조금 더 큰 것을 좋아해서 멀쩡한 가구를 버리는 것은 한 번 더 생각해 봐야 되지 않을까! 내가 필요 없다고 버리기보다는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은 없을까?
미국의 ‘가라지 세일’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도 시행해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불필요한 물건을 저렴한 값에 수요자에게 전달할 뿐 아니라 이웃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행사로 생각되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왕래가 많은 길목에 광고전단지 몇 개를 붙이고 장을 열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두세 시간이면 물건이 동이 난다. 이러한 방법을 우리 실정에 맞게 활용해 본다면 어떨까?
토요일이나 일요일 새벽에 차고에서 열리는 장은 하류층이나 임시 거주자들에게 매우 필요한 장소였다. 아이들이 자라 필요 없는 장난감도 깨끗이 보관했다가 내 놓고 필요 없는 각종 살림살이를 몇 푼 받고 파는 것을 보며 합리적인 실용주의의 현장을 목도할 수 있었다.
딸네 가족이 2년 동안 머무르는데 필요한 생활 용품을 가라지 세일에서 적은 비용으로 마련하여 살다가 귀국할 때 인터넷을 통해 매매했다고 한다. 수명이 다할 때까지 제 몫을 다하고 생을 마치는 물건들도 고마워하리라.

  TV 진품명품코너에서 보면 심사위원들이 조그만 골동품 하나에 몇 백만 원씩 평가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안타까운 일들이 생각난다. 당장 필요 없다고, 더 좋은 새 것이 생겼다고 1950년도 전후에 엿가락이나 강냉이와 바꿔 먹은 옛날 그릇들이 눈앞에 삼삼하게 떠오른다. 투박한 그릇 모양에 파란 거친 그림이 있는 깔끔해 보이지 않는다고 개 밥그릇으로도 사용했던 조선시대 생활자기를 미련도 없이 내쳤던 일들이 우리의 다음다음 세대에서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잖은가. 옛 것을 소중히 알고 조금은 불편하더라도 두고두고 오래 사용하는 검소한 풍토가 아쉽다. 사들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버리는 것 또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야 할 일이려니 싶다.
          (200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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