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부 박

2008.03.27 21:50

형효순 조회 수:716 추천:2

흥부 박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금요반 형효순


박꽃을 좋아해서 뒤란에 몇 포기 심었더니 무성하게 잘 자랐다. 그 순하디 순한 하얀 미소를 밤마다 피워내어 나를 기쁘게 했다. 달이 언제 뜰지 손가락을 꼽아보았다. 달밤에 본 박꽃은 스무 살에 요절한 우리 언니의 창백한 웃음 그대로다.

박은 처음부터 내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연하고 부드러운 박을 돌돌 깎아 말간 햇빛에 곱게 말려 박고지를 볶아먹기도 하고, 조청으로 박 강정을 만들기도 한다. 여름날 김칫거리가 시원찮을 때는 쪽파를 넣고 나박김치를 담그면 그 맛이 괜찮기도 하고 우렁이나 골뱅이를 넣고 생채를 무치면 맛이 독특해서 별미가 된다. 백중날 부치는 박잎전은 그 쫄깃하고 쌉싸름한 맛이 일품이다. 바가지를 타고 파낸 속을 푹 삶아 된장이나 식초를 넣고 새콤달콤하게 무친 박속나물은 이가 시원치 않는 어른들에게도 그만이었다. 또 모양새가 곱지 않은 약간 덜 여문 박을 열서너 덩이 따다가 푹 삶는다. 물론 물도 샘물을 길어다 쓴다. 여기에다 찹쌀고두밥을 쪄서 넣어 술을 빚으면 향기롭지는 않지만 귀한 술이 된다. 멀리 있는 벗을 불러 꼭 정백이 그릇에 조롱박 술잔 하나 띄워놓고 지붕 위의 박을 보고 하늘의 달을 보며 한잔 하는 날은  천하가 내 것인 양 여유가 만만하여 시 한수쯤 읊어야 어울리는 날이었다.

올해 나는 이 모든 음식을 일제히 준비해야 했다. 음력으로 9월 9일은 남원에서 흥부제가 열리고 박으로 만든 음식시식회가 열리는데 이번에는 뜻 깊게도 한국소설가협회 작가님들에게 선을 보이게 되었다. 어머니 손에서나 먹어보던  박 음식을 대하게 된 그분들을 오랜만에 옛날로 돌아가게 한 것 같았다.

박은 음식으로서 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의 중요한 필수품인 바가지를 만들었다. 초가지붕의 여문 박을 따다가 부부가 마주앉아 가는 줄 톱으로 박을 타서 가마솥에서 넣고 삶아서 속과 껍질을 살살 긁어내면 노르스름한 연두색 바가지가 탄생된다. 크고 좋은 바가지를 만들려면 어려서부터 받침대를 세워주고 햇빛을 골고루 잘 받게 해주어야 한다. 박은 생김생김만큼이나 쓰임새도 많다.

제일 가볍고 낫낫한 크기의 박은 물바가지, 곳간에서 쓰는 됫박은 쌀이 딱 한 되 들어가는 것으로 방물장수와 주고받아도 이의가 없었다. 소여물을 주는 여물박, 물을 길어 올리는 두레박, 밭고랑을 긁어 올리는 밭골 박, 측간에서 쓰는 잿박, 동냥아치의 동냥 박, 점쟁이가 장구대신 쓰는 점쟁이 박, 각설이의 타령 박, 여름날 모래 뜸질을 가서 강물에 띄워놓고 두드리는 여인들의 물장구 박, 벽에 걸어두는 장식 박, 그리고 누군가를 저승길로 보내면서 문지방에 놓고 깨뜨리는 저승 박까지, 실로 그 쓰임새도 많고 소용되는 곳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박이 쓰일 곳이 없고 박공예나 탈을 만들 때 이용될 뿐이다.

남원은 흥부의 고장답게 시내 길가에 박을 심어 오가는 외지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박에 대한 추억과 정취를 느낄 수 있게 배려하고 있다.
박은 놀부보다 흥부를 더 많이 떠올리게 한다. 우리 아이들은 가끔 놀부와 흥부를 두고 논쟁을 벌인다. 흥부는 과연 착하고 선하기면 하느냐? 이 시대의 흥부는 무능력한 아비란다. 대책 없이 자식들만 낳아놓고 뺨에 붙은 밥알이나 떼어먹는 한심하고 능력 없는 가장이란 것이다. 반면 욕심이 지나치기는 하지만 있는 재산 더욱 아끼고 저축하는 놀부가 심술이 사납다는 이유로 꼭 나쁜 형 취급을 받아야하느냐고 반박하지만 남아도는 재물을 동생이 굶어죽어도 주지 않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데서 언제나 놀부는 할말이 없다. 그래서 흥부네 박에서 금은보화가 쏟아지는 것에 모두 대 찬성이다.

내년에도 박은 심을 것이다. 그 박에 심성고운 흥부박만 주렁주렁 열려서 힘들고 어려운 집집마다 보물이 가득 담긴 박 덩이를 하나씩 따다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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