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들의 겨울잡

2008.04.01 16:38

신기정 조회 수:717 추천:2

나무들의 겨울잠
                            행촌수필문학회 신기정



지구온난화는 이제 곰들의 겨울잠까지 방해하는 모양이다. 생태복원을 위해 지리산에 풀어놓은 반달가슴곰 16마리가 지난 3월 중순부터 동면(冬眠)에서 깨어나더니 3월 30일엔 모두 먹이활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예년보다 평균 보름 정도 일찍 깨어난 것인데, 지난 겨울 지리산에 눈이 적게 내리고 기온이 예년보다 높았던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한 마리는 지난 2월 중순에야 마지막으로 겨울잠에 들었는데 녀석은 맨 뒤에 깨어났다고 해도 겨우 한 달 보름만 잔 셈이다. 남녘에서 밀려와 코끝을 간질이는 꽃바람의 유혹에 선잠을 깼겠지만, 포근한 겨울잠마저 설쳐야하는 곰들이 안쓰럽다.

사람을 포함한 항온동물은 섭취한 음식물로 몸에 필요한 열을 만들어 체온을 유지한다. 그런데 자연상태에선 추운 겨울에 식량을 구하기가 힘들어 일부 동물은 에너지 절약 차원에서 겨울잠에 든다. 자연환경에의 지혜로운 적응이다. 실제로 먹이걱정이 없는 동물원의 곰들은 겨울잠을 자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뱀이나 개구리 같은 변온동물은 추운 날씨에 체온저하로 얼어 죽기 때문에 먹이가 아무리 많더라도 따뜻한 땅 속에서 겨울잠을 자야 한다.

겨울잠은 동물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잎을 버리고 나목이 된 겨울나무도 비슷한 절약의 지혜가 있다. 나무에서 가장 많은 영양분을 가진 곳은 뿌리나 줄기가 아닌 잎이라고 한다. 잎의 엽록소가 햇빛을 받아 광합성작용으로 에너지를 만들어 꽃과 열매를 맺고 추운 겨울철을 버텨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무는 낙엽이 지기 전에 잎에 있는 질소(N), 칼륨(K), 인(P) 같은 필수 영양분의 반 이상을 줄기로 옮긴다. 얼어붙은 땅속에서 새봄을 꿈꾸는 다년생 식물의 싹눈이나 무서리에 생을 마감한 1년생 화초도 씨앗이 겨울잠을 자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이들은 모진 겨울을 인내로 버텨내면서 역동적인 움트기와 신록의 향연과 가을의 결실을 잉태하는 것이다.

모든 식물은 잎을 피우고 씨앗을 맺으려고 각각 특정한 온도조건과 그 지속기간을 필요로 한다. 만약 가을에 씨앗을 뿌리는 맥류(麥類)를 봄에 뿌리면 이삭이 늦게 나오거나 아예 안나온다고 한다. 이 때 정상적인 결실을 보려면 씨앗에 춘화처리[春化處理, vernalization]를 해주어야 한다. 러시아의 T.D.리센코가 개발한 이 방법은 씨앗에 적당한 수분을 주며 일정기간 저온에 보관하는 것이다. 실제 파종되어 잎으로 월동하는 조건과 비슷하게 해줌으로써 잠들어 있는 씨앗의 본능을 자극하여 순조롭게 이삭이 돋고 씨가 영글게 하는 것이다.

겨울나무와 씨앗들의 긴 기다림은 또 다른 의미의 숙성이다. 더 크게 보면 세상 만물은 모두가 결실을 맺으려면 숙성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숙성은 곰삭은 김치가 품은 참 맛과 ‘짬밥’으로 대변되는 온갖 어려움을 다 겪은 고참의 숭늉처럼 구수한 경륜이다. 새롭고 완벽한 변신을 위한 승화이며, 침묵 아닌 침묵 속의 창조적 기다림인 것이다.

긴 겨울을 털어낸 물상들이 활기찬 물길질로 해맑은 수채화를 그려내는 봄이다. 저 나무들의 물관과 체관을 나의 혈관에 연결시킨다면, 내 마음도 마냥 연초록으로 물들 것이다. 그렇게 온전히 하나되어 스치는 바람결에 손을 맡기면 맛깔스런 수필 한 개쯤 내 곳간에 채울 수 있을 것만 같다. 두터운 아스팔트를 헤집고 분연히 일어서는 여린 새싹처럼, 새봄엔 내 안에 숙성된 글감들이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신명난 굿판 한 번 벌이게 하고 싶다.

                              <2008.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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