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사용설명서가 없어서

2008.04.18 12:54

정성화 조회 수:722 추천:2

남편 사용설명서가 없어서



                                           정성화























아무리 다리를 뻗어도 발이 브레이크에 닿지 않았다. 온몸이 뻣뻣해지면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앞차와 충돌하기 직전 다시 힘껏 다리를 뻗었다. 그 순간 “아야!”하는 남편의 목소리. 꿈이었다.



꿈은 현실만큼 절실하다. 특히 악몽인 경우에는 극적인 상황에다 빠른 전개, 박진감 넘치는 구성으로 해서 꿈꾸는 이를 거의 초죽음의 상태로 몰고 간다. 등이 축축했다. 꿈속에서 급정거를 한 탓인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회사에 출퇴근하던 남편이 어느 날 승선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가 두고 간 차를 내가 몰게 되었다. 소심하고 겁이 많아서인지 나에게 운전은 무척 버거운 일이었다. 차를 몰고 어딜 가야한다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죄어들었고, 접촉사고가 났던 자리에 그어진 흰 페인트 선을 보면 나도 모르게 손이 떨렸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도 나에게 있어 운전은 마치 사용설명서를 잃어버린 전자제품처럼 조심스럽고 부담스럽다.



한 남자와 살아가는 일, 그것도 나에게는 또 하나의 힘든 운전이다. 마침내 그가 바다로부터 풀려나 짐을 싸들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이제 우리가 한솥밥을 먹게 되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뜨거웠다. 밥 끓는 냄새를 함께 맡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마음이 순해질 것 같았다. 나란히 꽂혀있는 그와 나의 칫솔, 빨랫줄에 걸린 어깨걸이 러닝셔츠와 사각트렁크, 읽다가 접어둔 스포츠신문 등. 그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사소한 것들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첫 한 달은 하루하루가 신바람 ‘이 박사’의 메들리 같았다.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마법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이의 코털이 눈에 거슬리기 시작하더니, 차츰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정사(家庭事)에 대한 자잘한 간섭으로 느껴졌다. 사소한 일에도 우리는 서로 각을 세웠다. 냄비 속으로 퐁당퐁당 수제비 반죽을 떼어 넣다가도 삐걱거렸다. 수제비란 원래 나풀거릴 정도로 얇아야 맛이 나는 법인데, 내가 떼어 넣은 수제비가 모두 뚱뚱하다는 것이었다. 삶은 감자를 앞에 두고도 그는 소금에 찍어 먹어야 한다고, 나는 설탕을 넣고 으깨 먹어야 한다며 말다툼을 했다. 그때 만일 ‘말을 하는 감자’가 있었더라면 둘이 씩씩거리며 그 감자에게 달려갔을 것이다.



부부 싸움을 거의 하지 않는다는 이에게 그 비결을 물어 보았다. 그녀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남편을 그저 ‘어쩌다가 한집에 살게 된 사람’ 쯤으로 생각하면 열 받을 일도 싸울 일도 없더라고 그것은 남편을 거의 의식하지 않겠다는 작정이며 남편에 대한 기대를 거두었다는 의미다.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잘 살아가는 부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기다리던 남편이 돌아왔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이젠 정말 오순도순 재미나게 살아보라고 많은 지인들이 나에게 축원해 주었다. 하루에도 몇 차례 빛과 어둠이 감아들던 때인지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남편을 위해 목숨이라도 내놓을 듯 유난을 떨던 내가 이 무슨 변덕인지.



고수 검객은 원래 눈을 감고도 바람의 결을 읽어내는 법. 나에게 일임했던 ‘가정사 작전통수권’을 그가 서서히 거두어 가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파워 게임이 시작된 것이었다. 이전에 내가 누리던 자유와 내가 지배하던 영토를 내놓기가 아까웠다. 나는 밥그릇을 빼앗긴 강아지처럼 으르렁거렸다. 선박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모든 결정권을 손에 쥐고 생활해 온 그로서도 나의 반발과 불복종을 감당하기 쉽지 않을 듯했다. 뒤집힌 서랍 속처럼 마음이 어지러웠다.



전자제품의 사용설명서는 빠짐없이 나와 있으면서 왜 ‘남편사용설명서’는 없는지, 그게 없다면 ‘부부 싸움 예상 문제집’이라도 한 권쯤 시중에 나와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어느 한 사람이 다시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야 한다면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똑같은 꿈을 자주 꾸는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듯했다. 차의 브레이크를 찾지 못해 쩔쩔매던 꿈은, 어서 브레이크를 밟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을 게다. 부부로 살아간다는 것이, 일부러 부딪쳐 가며 스릴을 만끽하는 범퍼 카 놀이가 아닌 줄 알면서도 여전히 범퍼 카 안에 앉아 있는 나. 그런 나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꿈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내 삶의 내레이터는 결국 나일 수밖에 없으니까.



바다에 묶인 한 마리 짐승처럼 살다가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해져 돌아온 그를 향해 시도 때도 없이 돌격하는 나, 전자 제품의 버튼을 함부로 눌러대는 아이처럼 그이 감정을 있는 대로 건드리고 있는 나, 나는 정말 야누스의 얼굴을 가진 사람인가. 오랜 침묵과 외로움의 끝에 서는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눈을 그윽이 들여다보게 된다던데 왜 나는 그리 못하는지. 그를 내 마음의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에 눕혀놓고 그를 억지로 침대 길이에 맞추어 재단하려 했던 것은 아닌지.



우리가 얼마 동안 갈등을 겪었던 이유를 짐작해 본다. 아무래도 우리는 서로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 같다. 말로 표현하지 못한 것들이 담겨 있는 눈빛이나 표정, 그리고 말의 뒷모습을 미처 살피지 못한 것 같다. 육지 언어에 서투른 그를, 바다 언어에 어리둥절해 하는 나를 서로 이해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였더라면…….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래서 요즘 나는 열심히 그를 ‘독학’하고 있다. 그가 반찬을 한 젓가락 먹고 난 뒤, 이거 아직 많이 남았어?"라고 했을 때는 그 반찬이 아주 맛없다는 뜻이며, “그냥 먹을 만하다.”고 했을 때는 그 반찬을 목 뒤로 넘기기가 다소 힘이 든다는 뜻임을 근래에 알게 되었다. 이제 ‘식생활 편’은 어느 정도 개념이 잡혀가는 듯하다.



다들 알콩달콩 재미있게 살아가는 걸 보면, 분명 그들은 서로에 대한 사용설명서를 손에 쥐고 있는 듯하다. 아무도 보여주지 않고 빌려주지 않는 ‘남편사용설명서’를 나는 남편 얼굴에서 조금씩 읽어가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