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왕이로소이다
2008.07.04 10:53
나는 여왕이로소이다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최정순
참으로 서먹서먹했다. 아파트로 이사 온지도 어언 금년 8월이면 1년이다. 그런데 아직도 익숙하지 못한 점이 많다. 몸에 밴 습관을 고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빨리 적응되지 않아 집에서나 밖에서나 많이 헷갈렸다.
누가 현관 벨을 누르면 나는 집안에서 인터폰 경비실버튼을 누르고는 ‘누구세요?’를 연발하니 경비원이 무슨 일인가하여 8층까지 달려오게 하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내릴 때 작동키를 누르지 않고 우두커니 서있다가는 ‘아참!’ 하며 그제야 8이란 숫자를 누른다든지, 어느 땐 15층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때도 더러 있다. 단독주택 아랫목에서 태어나 여기까지 흘러온 세월이 무릇 얼마인가?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더니 이렇듯 한 번 든 버릇은 무의식적 행동으로 나타나면서 예순네 살까지의 내 버릇을 하나하나 고쳐가는 중이다.
백수 아줌마는 거의 아침마다 화려한 외출을 한다. 그러다보니 가끔 경비실 아저씨 보기 민망할 때가 있다. 물론 이사 와서 인사야 했지만 자세한 얘기를 나눈 적은 없다. 그렇다고 외출할 때마다 먼저 인사를 할 수도 없고, 궁리 끝에 하루는 타월 2장과 식혜를 병에 담아 경비실 문을 두드렸다. 그 뒤부터는 훨씬 더 다정해졌다.
오늘은 경비실 아저씨가 아파트 화단 잡초제거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시원한 식혜 한 병을 갖다드렸더니 무척 고마워하며 얼굴에 함박꽃 같은 웃음이 피었다. 이렇게 주고받는 인사는 마음의 벽까지도 무너뜨려 준다.
사람들은 아파트를 성냥갑이나 닭장에 비유하곤 한다. 사람이 땅을 밟고 살아야한다느니, 답답하다느니, 이웃과의 단절 등등 이유야 들추면 얼마든지 많다. 나도 역시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러나 아파트에 살아보니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 달렸다고들 하지 않던가. 이 순간부터 나는 여왕이 된 것이다.
나는 승용차 앞 조수석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선 벨트 매는 게 싫고 햇볕 받는 것이 싫어서다. 그래서 항상 뒷좌석을 고집한다. 그러나 버스는 좀 다르다. 맨 앞좌석은 앞이 훤히 보여서 좋고, 맨 뒷좌석은 승차한 모든 사람들을 다 볼 수 있어서 좋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숨은 뜻이 있다. 승용차 조수석 뒷좌석은 귀빈석이기 때문이다. 귀빈은 바로 나요, 내가 곧 여왕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버킹검궁전을 나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여왕이 살고 있는 영국의 왕궁이라는 것 정도만 안다. 지금부터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바로 버킹검궁전으로 생각하련다. 아파트 입구에는 근위병이 궁을 지키고 있으며 차를 타고 아파트 문을 지날 때면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건네주고, 또 돌아올 때는 잘 다녀오셨느냐며 인사를 나누니 이 또한 여왕이 된 기분이다.
그뿐인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면 CCTV가 작동중이어서 나를 잘 지켜 주고 있으니 이만하면 여왕으로서의 대접을 아파트 말고 또 어디 가서 누려볼 수가 있으리오. 내가 거처하는 방 창문을 열면 정갈하고 깨끗하게 정돈된 궁전의 뜰이 보인다. 뜰 안에서는 왕자와 공주들이 자전거를 타며 놀고 있다. 정원사가 뜰의 나무들을 관리하기도 한다. 보랏빛 드레스가 노을에 젖어 황금빛 파도를 친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감사할 뿐이다. 여왕이 되게 해주신 주님께…….
남 앞에 군림하고 싶어서는 결코 아니다. 그만큼 소중한 나를 존중해서다. 내가 나를 존중해 주지 않을 때 그 누가 나를 존중해 줄 것인가. 같은 일이라도 생각하기에 따라 기쁠 수도, 슬플 수도 있다. 같은 값이면 밝은 쪽을 보고 살자는 것이다.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지 않던가.
대접 받으려면 먼저 상대방을 존중하고 대접해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쓰레기 속의 왕이면 그게 무슨 왕이겠는가. 깨끗하고 잘 차려입은 황족들 사이에 있는 왕일 때 어울리는 춤도 노래도 나오지 않겠는가. 까마귀 떼 속의 한 마리 백로가 어찌 행복하겠는가.
내가 여왕이 된 기분으로 길을 걸으면 모든 사람들이 왕족처럼 보인다. 이런 기분은 좀 언짢았던 일도 곧 지워진다. 하다못해 찬거리를 사거나 물건을 흥정할 때도 여왕이 된 기분을 상기하면 서로 낯붉힐 일이 없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왕비가 되고 싶거든 남편을 왕으로 모시라.’고. 그렇다. 그러면 아들은 왕자가 되고 딸은 공주가 되지 않겠는가. 여왕이 되어 왕의 법도를 지키며 살아갈 일이다.
(2008. 7. 4.)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최정순
참으로 서먹서먹했다. 아파트로 이사 온지도 어언 금년 8월이면 1년이다. 그런데 아직도 익숙하지 못한 점이 많다. 몸에 밴 습관을 고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빨리 적응되지 않아 집에서나 밖에서나 많이 헷갈렸다.
누가 현관 벨을 누르면 나는 집안에서 인터폰 경비실버튼을 누르고는 ‘누구세요?’를 연발하니 경비원이 무슨 일인가하여 8층까지 달려오게 하기도 했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내릴 때 작동키를 누르지 않고 우두커니 서있다가는 ‘아참!’ 하며 그제야 8이란 숫자를 누른다든지, 어느 땐 15층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때도 더러 있다. 단독주택 아랫목에서 태어나 여기까지 흘러온 세월이 무릇 얼마인가? 세 살 버릇이 여든까지 간다더니 이렇듯 한 번 든 버릇은 무의식적 행동으로 나타나면서 예순네 살까지의 내 버릇을 하나하나 고쳐가는 중이다.
백수 아줌마는 거의 아침마다 화려한 외출을 한다. 그러다보니 가끔 경비실 아저씨 보기 민망할 때가 있다. 물론 이사 와서 인사야 했지만 자세한 얘기를 나눈 적은 없다. 그렇다고 외출할 때마다 먼저 인사를 할 수도 없고, 궁리 끝에 하루는 타월 2장과 식혜를 병에 담아 경비실 문을 두드렸다. 그 뒤부터는 훨씬 더 다정해졌다.
오늘은 경비실 아저씨가 아파트 화단 잡초제거작업을 열심히 하고 있었다. 시원한 식혜 한 병을 갖다드렸더니 무척 고마워하며 얼굴에 함박꽃 같은 웃음이 피었다. 이렇게 주고받는 인사는 마음의 벽까지도 무너뜨려 준다.
사람들은 아파트를 성냥갑이나 닭장에 비유하곤 한다. 사람이 땅을 밟고 살아야한다느니, 답답하다느니, 이웃과의 단절 등등 이유야 들추면 얼마든지 많다. 나도 역시 아파트로 이사 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그러나 아파트에 살아보니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무슨 일이든 마음먹기 달렸다고들 하지 않던가. 이 순간부터 나는 여왕이 된 것이다.
나는 승용차 앞 조수석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선 벨트 매는 게 싫고 햇볕 받는 것이 싫어서다. 그래서 항상 뒷좌석을 고집한다. 그러나 버스는 좀 다르다. 맨 앞좌석은 앞이 훤히 보여서 좋고, 맨 뒷좌석은 승차한 모든 사람들을 다 볼 수 있어서 좋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숨은 뜻이 있다. 승용차 조수석 뒷좌석은 귀빈석이기 때문이다. 귀빈은 바로 나요, 내가 곧 여왕이기 때문이다.
영국의 버킹검궁전을 나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여왕이 살고 있는 영국의 왕궁이라는 것 정도만 안다. 지금부터는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바로 버킹검궁전으로 생각하련다. 아파트 입구에는 근위병이 궁을 지키고 있으며 차를 타고 아파트 문을 지날 때면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건네주고, 또 돌아올 때는 잘 다녀오셨느냐며 인사를 나누니 이 또한 여왕이 된 기분이다.
그뿐인가 엘리베이터에 오르면 CCTV가 작동중이어서 나를 잘 지켜 주고 있으니 이만하면 여왕으로서의 대접을 아파트 말고 또 어디 가서 누려볼 수가 있으리오. 내가 거처하는 방 창문을 열면 정갈하고 깨끗하게 정돈된 궁전의 뜰이 보인다. 뜰 안에서는 왕자와 공주들이 자전거를 타며 놀고 있다. 정원사가 뜰의 나무들을 관리하기도 한다. 보랏빛 드레스가 노을에 젖어 황금빛 파도를 친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감사할 뿐이다. 여왕이 되게 해주신 주님께…….
남 앞에 군림하고 싶어서는 결코 아니다. 그만큼 소중한 나를 존중해서다. 내가 나를 존중해 주지 않을 때 그 누가 나를 존중해 줄 것인가. 같은 일이라도 생각하기에 따라 기쁠 수도, 슬플 수도 있다. 같은 값이면 밝은 쪽을 보고 살자는 것이다.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하지 않던가.
대접 받으려면 먼저 상대방을 존중하고 대접해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극단적인 예로 쓰레기 속의 왕이면 그게 무슨 왕이겠는가. 깨끗하고 잘 차려입은 황족들 사이에 있는 왕일 때 어울리는 춤도 노래도 나오지 않겠는가. 까마귀 떼 속의 한 마리 백로가 어찌 행복하겠는가.
내가 여왕이 된 기분으로 길을 걸으면 모든 사람들이 왕족처럼 보인다. 이런 기분은 좀 언짢았던 일도 곧 지워진다. 하다못해 찬거리를 사거나 물건을 흥정할 때도 여왕이 된 기분을 상기하면 서로 낯붉힐 일이 없다.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왕비가 되고 싶거든 남편을 왕으로 모시라.’고. 그렇다. 그러면 아들은 왕자가 되고 딸은 공주가 되지 않겠는가. 여왕이 되어 왕의 법도를 지키며 살아갈 일이다.
(2008. 7.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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