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날의 스케치

2008.07.30 17:38

김학 조회 수:780 추천:9

<월간 한국수필 2008년 7월호 발표>
어느 여름날의 스케치
                                                김 학


염천의 개 혓바닥처럼 축 늘어진 앞 집 옥상의 빨래가 갑자기 무녀(舞女)의 치맛자락처럼 펄럭이기 시작한다. 찌는 듯하던 여름밤의 무더위가 슬그머니 뒷문을 박차고 꽁무니를 뺀다. 혁명군인 양 치달아온 바람이 고요한 누리에 파문을 일군다. 뜨락의 나무들은 바람의 위세에 눌려 저마다 아부의 깃발을 흔든다.
키다리 백목련은 무당춤을 추어대고, 분기(分器)에 발을 담근 대나무는 나긋나긋 승무(僧舞)를 춘다. 수줍음을 타던 백합은 사근사근 어깨춤을 추어대고, 대추나무․은행나무․모과나무․사과나무․감나무․백일홍은 디스코를 춘다.
어느덧 우리 집의 손바닥만한 뜨락은 무도장(舞道場)이 되고 만다. 바람이 한눈을 팔면 몸놀림이 느슨해지다가 바람이 다시 눈을 부릅뜨면 어느새 춤동작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바람에 놀아나는 나무들의 작태다.

우스개 같은 어느 직장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탁구를 좋아하는 실권자가 부임을 했더란다. 그러자, 틈만 나면 직원들은 탁구장으로 몰려들었다. 얼마의 세월이 흐르자 그 실권자는 테니스 코트를 드나들었다. 또, 세월이 흐른 뒤 새로운 실권자가 부임했고, 그 새로운 실권자는 축구를 즐기는 분이었다. 직원들은 탁구나 테니스는 외면하고 축구장을 찾기에 바빴다. 월급이 적다는 불평은 접어둔 채 그 박봉을 털어 유니폼을 맞추어 입고 뻔질나게 운동장을 찾았다. 자리가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실권자의 기호에 따라 몰려다녔다. 마침내는 퇴근시간을 앞당기면서까지 축구장을 찾는 게 예사롭게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오래지않아 그 회사는 문을 닫게 되었다. 바람에 놀아난 나무와 무엇이 다르랴.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진다.
빗방울이 점점 굵어지더니 쏟아지는 속도가 금세 중중머리를 건너뛰어 휘몰이쯤에 이른다. 바람의 눈치를 살피며 춤을 추던 나무들이 이번에는 관현악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나뭇잎의 넓고 좁음, 두껍고 얇음에 따라 빗방울 부딪는 음향이 실로 다르다. 뿐만 아니라 내리는 속도나 빗방울의 크기에 따라 음색도 달라진다.
어둠을 뚫고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지붕에도, 장독에도, 돌멩이에도, 인도블록에도 비가 내린다. 빗방울은 그 자신이 부딪치는 대상에 따라 다른 음색을 낸다. 건반을 두드리는 피아니스트의 손놀림에 따라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연주되듯이.
다양한 소리들이 어울려 대자연의 합주를 이룬다. 오선지에 기록조차 할 수 없으니 아무도 흉내 낼 수 없는 생음악인 셈이다. 지금 우리 집 뜨락에서는 빗방울이 연주하는 경음악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다. 빗방울의 연주솜씨가 새삼 놀랍다.

시침(時針)이 자정의 고개를 엉금엉금 기어오르고 있는데도 비는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하수구로 빠지는 마당가의 물줄기가 도랑이 되어 흐른다. 우르릉 쾅쾅! 천둥과 번개가 고즈넉하던 밤의 적막을 깨트린다. 빗방울의 연주가 절정에 다다른 모양이다. 순간, 오싹하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누에의 뽕잎 갉아먹는 소리 같던 빗방울의 연주가 갑자기 총탄(銃彈)이 작렬(炸裂)하는 전쟁터의 소음으로 엇바뀐 탓일 게다.
해님의 법통을 이어받은 달님마저 그를 따르던 궁녀들인 별무리를 이끌고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채 기세가 당당하던 비가 다시 성깔을 누그러뜨린다. 더불어 나는 두려움의 사슬에서 풀려난다. 언뜻 시계를 보니 시침은 새벽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비가 멎는다. 비가 멎었다. 배음(背音)인 양 들려오는 간헐적인 차량의 발자국 소리만 없다면, 산사(山寺)의 적막이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나무들의 모습이 한결 더 푸르고 싱싱해 보인다. 목욕탕에서 갓 나온 열아홉 살 처녀의 자태처럼 풋풋하다. 자르르 윤기가 흐른다.

바람과 빗방울이 철수한 뜨락엔 또다시 평화가 샘물같이 솟아오르고 있다. 흘금흘금 눈치를 살피며 춤을 추지 않아도 되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음악을 연주하지 않아도 된다. 나무들은 원래의 자유를 되찾을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좁은 뜨락의 나무들에게서 나는 힘 있는 자에게 우롱당해 온 민초(民草)들의 슬픈 역사를 읽는다.

*김학 약력
198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아름다운 도전><실수를 딛고 살아온 세월> 등 수필집 9권, 수필평론집 <수필의 맛 수필의 멋>/펜문학상, 한국수필상, 동포문학상 본상, 영호남수필문학상 대상, 연암문학상 대상, 대한민국 향토문학상, 전주시예술상 등 다수 수상/전북수필문학회 회장,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전북문인협회 회장, 전북펜클럽 회장 역임/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전담교수,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 이사장(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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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작품평(월간 한국수필 2008년 8월호)>
문학평론가, 계간 에세이문예 발행인, 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 권대근
  
*김학/어느 여름날의 스케치

이 수필은 미적구조로서 수필이 갖추어야할 형상성은 물론 인식구조로서 수필이 가져야할 교훈성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수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용된 말도 구체적일뿐더러 말하고자하는 바를 형상으로 그려냈기 때문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 그 모습이 분명해서 좋다. 어떤 분은 문장을 전달하기 위해서 설명의 기법을 쓰지만 이 분은 ‘형상화’의 의미를 시각화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줌으로써 보다 효과적으로 자신의 표현 의도를 나타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서두 첫 단락에서 수필에 있어서 형상화란 ‘염천의 개혓바닥처럼 축 늘어진 앞집 옥상의 빨래가 갑자기 무녀의 치맛자락처럼 펄럭이기 시작한다. 찌는 듯하던 여름밤의 무더위가 슬그머니 뒷문을 박차고 꽁무니를 뺀다. 혁명군인 양 치달아온 바람이 고요한 누리에 파문을 일군다. 뜨락의 나무들은 바람의 위세에 밀려 저마다 아부의 깃발을 흔든다.’고 표현함으로써 눈앞에 그것의 개념이 그림으로 그려지게 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끝까지 읽어보지 않아도 수필의 역량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하는 발단부의 묘사적 문장이 주는 손맛이 일품이다. 수필 언어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 문학의 네 가지 속성을 고루 갖춘 멋진 표현이다.
발단부 둘째 문단의 문장들도 질서정연할뿐더러 대단히 조직적이다. 백목련은 무당춤을 추고, 대나무는 승무를, 백합은 어깨춤을, 그리고 대추나무 등은 디스코를 춘다는 진술이 절묘하다. 백목련이 무당춤을 추는 것처럼 느끼는 이유는 키가 크기 때문이고,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나긋나긋한 승무를 추는 것으로 묘사한 이유는 분기에 발을 담갔기 때문이다. 백합이 사근사근 어깨춤을 추는 이유는 수줍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추나무, 은행나무, 모과나무, 사과나무, 감나무 등은 왜 하필 디스코를 출까. 대추나무 등이 디스코를 추는 이유는 문장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한 줄 한 줄의 문장에 적확한 수식과 생략이 절묘하게 계산된 문장을 음미하면 미소가 번져 온다. 생략과 압축의 묘미로 수필문장의 맛을 잘 살린 탓에 어느덧 작가의 집에 있는 손바닥만한 뜨락은 각종 화목들의 무도장이 되고 만다. 여기서 이 정도의 묘사로 끝냈다면 결코 찬사를 받을 리 만무하다.
작가는 바람의 강약에 따라 나무의 움직임이 달라지는 데 착안하여, 화목들이 바람에 놀아난다고 적고 있다. 그 춤은 바람이 한눈을 팔 땐, ‘몸놀림’이 되고, 바람이 눈을 부릅뜨면  ‘춤동작’이 된다는 대칭적 표현도 매우 섬세한 관찰에서 나온 것이라 그 맛이 쏠쏠하다. 마지막으로,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의 춤은 작가에게 ‘작태’로 인식된다. 어휘 하나하나가 한 번도 허술하게 쓰인 적이 없다.
작가는 민초들의 슬픈 역사를 주제의식에 담기 위해 발단부에 주제에 대한 수준 높은 암시와 함축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바람과 나무는 상징이다. 바람이 권력자요, 실권자라면, 나무는 권력자의 기호에 따라 몰려다니는 무소신의 기회주의자들 또는 힘없는 민초들의 모습이다. 작가는 발단부에 암시된 주제의 상상화를 단 하나의 삽화를 전개부 상단에 배치함으로써, 긴장된 독자의 시선과 가슴을 녹여준다. 일반화에서 예시로 이어가는 문단의 연결성, 제재에 주제의식을 담아 풀어내는 솜씨가 단연 돋보인다. 전개부 하단은 또 다른 권력자의 상징으로 비[雨]를 조명하였다.
바람이 나무를 춤추게 하였다면, 비는 나무를 연주하게 한다. 빗방울의 강약에 따라 관현악이 되고, 생음악이 되고, 경음악이 되고, 그러다가 절정에 가서야 빗소리는 ‘총탄이 작렬하는 전쟁터의 소음’으로 작가에게 인식된다. 결국 바람과 비는 권력자요, 실권자의 상징으로서 작태와 소음의 주인이 된다. ‘바람과 빗방울이 철수하면서 뜨락에 평화가 샘물처럼 솟아오르고 있다’는 표현과 그럼으로써 ‘나무들은 원래의 자율성을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결말부에 제시된 게 ‘어느 여름날의 스케치’란 수필이다. 바람과 비로 연상되는 번개, 천둥, 두려움, 총탄, 전쟁터, 실권자는 그들의 철수로 평화, 자유의 개념에 도달하는 언어들의 연상 작용으로, 독자들은 힘 있는 자들에게 우롱당해 온 민초들의 슬픈 역사를 작가와 함께 읽을 수 있게 되는 영광을 얻는다.
구성 면에서, 표현력 면에서, 인식의 측면에서도 이 작품은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다. 같은 내용이면 한 단락으로 묶어야 하며, 모든 문장은 완결성을 확보해야 하는 게 글의 원리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발단부 셋째 단락을 두 번째 단락에 이어 쓰지 않고 별도단락으로 처리하여 문단의 완결성을 놓친 것과, 강조를 위해 전개부를 처음 여는 단락을 한 문장으로 해서 독립문장으로 처리한 것이라 하겠다. 어떠한 경우에도 전개부는 전환의 의미가 아니고서는 특수단락을 만들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문장론의 기본이다. 문장비평의 관점에서 두 가지 ‘옥의 티’가 발견되었지만, 이 작품의 허점은 작품의 성공도에 비하면 먼지에 불과하다고 하겠다. 불어 버리면 깨끗해질 정도로 미약한 것이란 말이다. 이런 수필을 자주 접할 수 있다면 월평을 쓰는 재미가 한 맛 더 있을 것 같다.
“좋은 수필 한 편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세상을 바르게 읽어야 한다. 세상과 교감할 수 있어야 하고, 그 교감은 평소 작가의 인간 삶에 대한 깊은 사유와 생활의 성찰에서 온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적 웰빙을 추구하는 삶의 자세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는 장호병의 말은 수필가가 가져야할 자세로서, 적절한 것이다. 연륜이 더할수록 김 학의 글에 더 깊은 맛이 우러나는 것은 삶의 깊은 사유와 성찰에서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