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긴 江 - 마종기
일찍 내린 저녁 산그림자 걸어나와
폭 넓은 저문 강을 덮기 시작하면
오래된 강 물결 한결 가늘어지고
강의 이름도 국적도 모두 희미해지는구나
국적이 불분명한 강가에 자리 마련하고
자주 길을 잃는 내 최근을 불러모아
뒤척이는 물소리 들으며 밤을 지새면
국적이 불분명한 너와 나의 몸도
깊이 모를 이 강의 모든 물에 젖고
아, 사람들이 이렇게 물로 통해 있는 한
우리가 모두 고향사람인 것을 알겠구나.
마침내 무거운 밤 헤치고 새벽이 스며든다
수만 개로 반짝이는 눈부신 물의 눈.
강물들 서로 섞여서 몸과 몸을 비벼댄다.
아, 그물빛,어디선가 내 젊었을 때 보았던 빛.
그렇게 하나같이 비슷한 방향으로 가는 우리.
길 잃고도 스러지지 않는 동행을 알았구나
* * * * * * * * * * * * * *
며칠 동안 혼자, 긴 강이 흐르는 기슭에서 지냈다.
티브이도, 라디오도 없었고, 문학도 미술도 음악도 없었다.
있는 것은 모두 살아 있었다. 음악이 물과 바위 사이에 살아
있었고, 풀잎 이슬 만나는 다른 이슬의 입술에 미술이 살고 있었다.
땅바닥을 더듬는 벌레의 가는 촉수에 사는 시, 소설은
그 벌레의 깊고 여유 있는 여정에 살고 있었다.
있는 것은 모두 움직이고 있었다.
물이, 나뭇잎이, 구름이, 새와 작은 동물이 쉬지 않고 움직였고,
빗물이 밤벌레의 울음이, 낮의 햇빛과 밤의 달빛과 강의 물빛과
그 모든 것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세상이 내 몸 주위에서 나를 밀어내며 내 몸을 움직여 주었다.
나는 몸을 송두리째 내어놓고 무성한 나뭇잎의 호흡법을 흉내내어 숨쉬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내 살까지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숨쉬는 몸이, 불안한 내 머리의 복잡한 명령을 떠나자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어깨가 가벼워지고 눈이 밝아지고, 나무 열매가
거미줄 속에 숨고,
갑옷의 곤충이 깃을 흔들어내는 사랑 노래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였다. 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크고 작은 것의 차이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의 차이에서 떠나고,
살고 죽는 것의 차이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내게는 어려운 결심이었다.
며칠 후 인적없는 강기슭을 떠나며 작별 인사를 하자
강은 말없이 내게 다가와 맑고 긴 강물빛 몇 개를
내 가슴에 넣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강이 되었다.
우화의 江 -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 듣고
몇 해쯤 만나지 않아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결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 보아주고
그대를 생각할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
유봉희 (2015-01-16 15:08:59)
<이세상의 긴 강>을 읽다보면
우리도 시인과 함께 강가에서 흐른는 강물을 바라보며 시인이 느끼고 생각했던 것을 함께 한 것 같다는 마음이됩니다
이렇게 시의 현장으로 독자들을 금방 불러드리는 힘은 삶에 대한 진정성을 바탕으로 시인의 체험이 살아있는 묘사로써 독자를 은근하게 안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시가 독자를 떼어 놓고 혼자 도망가지도 않고 이해되지 않는 문장으로 머리를 어지럽히지도 않습니다
시가 독자에게 가만히 스며듭니다
시 쓰기의 한 목적이 소통에 있다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걸음입니다
<이 세상의 긴 강>은 3연으로 되어있습니다
첫째 연에서는 시각을 통한 대상과의 대면
“저녁 산 그림자 걸어나와” “강 물결 한결 가늘어지고”
이 행을 읽을 때 우리는 시인이 오랜 시간을 강가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모든 일상을 떠나서 시의 대상과 자신만을 마주 앉게 하였습니다 만약 시인이 빠른 걸음으로 강을 지나갔다면 이런 묘사는 나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시각을 통한 대상과의 긴 만남이“강의 이름도 국적도 희미해 지는구나 ”하는 첫 번째의 생각을 만나게 되었을 것입니다
둘째 연에서는 청각으로 만남.
날이 어두워지니 강물은 보이지 않고 물소리는 더욱 커집니다
대상이 조금 더 가깝게 다가오고 마음의 거리가 좁혀집니다
이제 자주 길을 잃는 내 최근을 불러모아서 뒤척이는 물소리를 들으며 국적이 불분명한 너와 내가 깊이 모를 물에 젖어보니 “사람이 이렇게 물로 통해 있는 한 모두가 고향사람인 것을 알겠구나” 하는 깨닫음을 갖게 됩니다
세 번째 연에서는 촉각을 통해서
강물들 서로 섞여서 “몸과 몸을 비벼댄다” 이처럼 하나가 되어가며 결국엔 동행이 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새벽이 스며든다”라는 표현은 그냥 아침이 온다는 것과 어떻게 다를까요? 스며드는 것과는 더 이상 분리가 될 수 없는 상태일 것입니다 대상을 느끼며 찾아나감이 점 점 강도 높게 묘사되면서 궁극에는 대상과 하나라는 믿음 “ 길 잃고도 스러지지 않는 동행을 알겠구나”하는 큰 화합의 장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는 한 시인의 여행, 의도적인 길 잃기로 시작해서 궁극엔 불분명하던 국적, 잃어버린 고향 사람들, 스러지지 않는 동행을 찾는 것일 것입니다 이 과정을 통해서 시인은 내면의 진실한 자신을 만나서 시를 탄생시켰고 독자는 자연스럽게 그 시와 영혼의 교감을 갖게 됩니다
*시인의 말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였다 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크고 작은 것의 차이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의 차이에서 떠났고,
살고 죽는 것의 차이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내게는 어려운 결심이었다
며칠 후 인적 없는 강기슭을 떠나며 작별인사를 하자 강은
말없이 내게 다가와 맑고 긴 강물빛 몇 개를 내 가슴에 넣어 주었다 그래서 나는 강이 되었다
오늘은 의과대학에서 문학을 강의하시던 시인이자 의사인 마종기 선생님의 시 한편을 감상해 보았습니다
한 작품을 충분히 해독하기 위해서는 시인이 시를 완성할 때까지 사용한 시간의 1/10정도는 투자해야한다는 말을 10여년전 이곳 여름문학캠프에서 마종기시인께 들었습니다
이 시간엔 잠깐 저의 생각을 조금 펼쳐 보았을뿐 나머지는 여러분이 집에 돌아가셔서 완성시켜 주십시오
여러분들은 이곳에 시를 감상하러 오신 것 뿐 아니라 시를 완성하려고 오셨습니다 모든 예술분야가 그러하겠지만 시도 시인과 독자가 함께 완성 시키고 확장시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한국문학의 쓸쓸한 변방에 서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든 새 역사는 변방에서 이루어진다고 말하지요! 우리 함께 진실되고 절실한 마음으로 그러나 조용하고 꾸준하게 뜻있는 새 문학의 장을 만들어 가길 바랍니다
오늘 이렇게 따뜻한 자리를 마련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