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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긴 江 - 마종기

2010.02.04 04:30

유봉희 조회 수:1000 추천: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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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긴 江  -  마종기

일찍 내린 저녁 산그림자 걸어나와
폭 넓은 저문 강을 덮기 시작하면
오래된 강 물결 한결 가늘어지고
강의 이름도 국적도 모두 희미해지는구나

국적이 불분명한 강가에 자리 마련하고
자주 길을 잃는 내 최근을 불러모아
뒤척이는 물소리 들으며 밤을 지새면
국적이 불분명한 너와 나의 몸도
깊이 모를 이 강의 모든 물에 젖고
아, 사람들이 이렇게 물로 통해 있는 한
우리가 모두 고향사람인 것을 알겠구나.

마침내 무거운 밤 헤치고 새벽이 스며든다
수만 개로 반짝이는 눈부신 물의 눈.
강물들 서로 섞여서 몸과 몸을 비벼댄다.
아, 그물빛,어디선가 내 젊었을 때 보았던 빛.
그렇게 하나같이 비슷한 방향으로 가는 우리.
길 잃고도 스러지지 않는 동행을 알았구나


* * * * * * * * * * * * * *

며칠 동안 혼자, 긴 강이 흐르는 기슭에서 지냈다.
티브이도, 라디오도 없었고, 문학도 미술도 음악도 없었다.
있는 것은 모두 살아 있었다. 음악이 물과 바위 사이에 살아
있었고, 풀잎 이슬 만나는 다른 이슬의 입술에 미술이 살고 있었다. 땅바닥을 더듬는 벌레의 가는 촉수에 사는 시, 소설은
그 벌레의 깊고 여유 있는 여정에 살고 있었다.

있는 것은 모두 움직이고 있었다.
물이, 나뭇잎이, 구름이, 새와 작은 동물이 쉬지 않고 움직였고,
빗물이 밤벌레의 울음이, 낮의 햇빛과 밤의 달빛과 강의 물빛과
그 모든 것의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이는 세상이 내 몸 주위에서 나를 밀어내며 내 몸을 움직여 주었다. 나는 몸을 송두리째 내어놓고 무성한 나뭇잎의 호흡법을 흉내내어 숨쉬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내 살까지도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숨쉬는 몸이, 불안한 내 머리의 복잡한 명령을 떠나자 편안해지기 시작했다. 어깨가 가벼워지고 눈이 밝아지고, 나무 열매가
거미줄 속에 숨고, 갑옷의 곤충이 깃을 흔들어내는 사랑 노래도
볼 수 있었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가 되어 움직이고 있는 것을 드디어 알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였다. 다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크고 작은 것의 차이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보이는 것과 안 보이는 것의 차이에서 떠나고,
살고 죽는 것의 차이에서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내게는 어려운 결심이었다.
며칠 후 인적없는 강기슭을 떠나며 작별 인사를 하자
강은 말없이 내게 다가와 맑고 긴 강물빛 몇 개를
내 가슴에 넣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강이 되었다.

우화의 江  -  마종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 듣고
몇 해쯤 만나지 않아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물결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 보아주고
그대를 생각할때면 언제나 싱싱한 강물이 보이는
시원하고 고운 사람을 친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