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訓民正音) 속에 배인 민족혼(民族魂)
2008.10.20 12:28
훈민정음(訓民正音) 속에 배인 민족혼(民族魂)
우리 학계에서는 단순하게 우리말은 있어도 글자가 없어서 우리말을 적기위해서 세종 큰 임금께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드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에는 우리 민족혼(民族魂)이 담겨 있으며 세종 큰 임금께서 지니신 애국ㆍ애민정신과 자주독립 정신이 흠뻑 배어 있는 글자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대외적으로는 명(明)나라에 대한 문화선전포고문(文化宣戰布告文)인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양반세력으로 이루어진 극도로 폐쇄된 신분봉건사회(身分封建社會)에 대하여 사회혁명을 위한 도전장이었다.
대외적으로 우리 민족은 신라 김춘추가 당(唐)나라에 굴복하여 복속을 자처한 이래로부터 누대에 걸쳐 중국대륙 세력에 지배되어 왔다.
역사는, 김춘추가 백제를 멸망시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고 평가하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김춘추는 순전히 백제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근대사에서 나타난 오적(五賊)에 버금가는 민족 배반자로 평가되어야 한다.
신라가 진정 삼국통일을 이룬 국가로 평가 받으려면 옛 백제 땅을 비롯해서 옛 고구려 땅을 한 치라도 당(唐)나라에게 빼앗기지 않고 통일을 달성했어야 했다.
그러나 옛 백제 땅에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가 설치되었으며, 광활한 옛 고구려 땅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설치되어 당(唐)나라 지배 아래로 들어갔으며 수년에 걸친 전쟁 끝에 겨우 옛 백제 땅과 옛 고구려 땅의 지극히 일부분인 대동강 이남을 되찾았을 뿐이므로 이것은 형제와 영토를 당(唐)나라에 팔아 자기네 생존을 영위했던 것이나 다름없다.
이로부터 우리 민족은 누대에 걸쳐 중국대륙 세력에 굴종하며 조선왕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고려가 멸망한 것은 사회적인 혼란도 원인에 하나이지만 무리한 북벌정책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에 이르러 세자였던 양녕대군도 명(明)나라의 심한 내정간섭에 대하여 투철한 반명사상(反明思想)으로 북벌을 도모하기 위해 군사력을 키우는 정책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 초기 왕실은 반명사상(反明思想)이 강했으며 이러한 사상은 세종 큰 임금도 이어 받았던 것이다.
그러한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세종 큰 임금은 신기전(神機箭)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만들었고, 명(明)나라 천문(天文)이 아닌 우리 천문(天文)을 가져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력으로는 도저히 명(明)나라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우리말은 따로 있으되 글자가 없으므로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독자적인 글자를 만들어 문화적으로나마 명(明)나라 굴레를 벗어나야겠다는 것이 훈민정음(訓民正音)에 담긴 정신이라 할 수 있다.
명(明)나라 문물을 배척하고 우리 글자를 만든다는 것은 명(明)나라 측에서 볼 때 분명히 반란행위임에 틀림없다.
이런 면에서 보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글자는 단순히 우리말을 적기 위한 글자가 아니라 명(明)나라에 대한 문화선전포고문(文化宣戰布告文)이다.
대내적으로는 양반계급이 지배하고 있는 폐쇄적인 신분봉건사회(身分封建社會) 병폐인 반상계급(班常階級)을 타파하고 원시(元始) 민주주의 사회에로 개혁을 시도하기위한, 양반계급을 향한 도전장이다.
그 당시는 한학(漢學)을 공부한 소수 양반계급에 의해서 지배되던 사회로 대다수 일반 백성들 가운데 아무리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라도 출세할 길이 막힌 신분봉건사회(身分封建社會)였다.
세종 큰 임금은 이러한 모순된 신분계급사회를 타파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상민이든 노비이든 신분을 가리지 않고 등용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사회혁명을 시도하려고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들게 된 것이다.
즉 상민이든 노비이든 가리지 않고 이 나라 백성이라면 모두 글을 깨우치도록 하여 널리 숨은 인재를 발굴하여 균등하게 출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당시 노비 출신 과학 기술자인 장영실(蔣英實)을 등용한 것이다.
이와 같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은 그저 단순하게 우리말이나 적기 위해서 만든 글자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명(明)나라에 대해서는 문화전쟁을 의미하는 문화 선전포고문(文化宣戰布告文)인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수구 양반계급 세력에 대한 사회혁명을 위한 도전장인 것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글자는 이처럼 오늘날 핵폭탄(核爆彈)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고도의 위장전술로 명(明)나라와 양반세력의 눈을 가리려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연막전술은『어제 훈민정음(御製訓民正音)』서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國之語音국지어음, 異乎中國이호중국, 與文字不相流通여문자불상유통.”, 즉 「나랏말씀이 중심이 되는 나라와 달라서 글자[한자(漢字)]로는 서로 흘러 통하지 않도다.」
명(明)나라와 우리나라는 말이 서로 다른 문화권에 있으므로 한자(漢字)로서 자유롭게 소통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민족은 결코 명(明)나라 언어에 동화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는 것이기도 하여 자주독립정신(自主獨立精神)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대제학(大提學) 정인지(鄭麟趾)가 쓴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서문(序文)에서 “象形而字倣古篆상형이자방고전”, 즉 「글자 모양은 옛 진(秦)나라 이 사(李 斯)라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글씨체를 본떴다.」라고 하는 문구(文句)도 명(明)나라와 국내 반대세력들 눈을 속이기 위한 전술이지 실제로 옛 전자(篆字)를 본떠 만든 것이 아니다.
이 문구(文句)로 인해서 오늘날 학계에서는 훈민정음(訓民正音) 스물여덟글자 모양에 대하여 여러 가지 모방설이 난무하고 있는데 모두가 이 고차원적(高次元的)인 연막전술(煙幕戰術)에 현혹되어 올바른 시각(視覺)으로 꿰뚫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글날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그릇되게 인식되어온 훈민정음(訓民正音)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깊이 반추(反芻)해 보고 올바른 연구를 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한글 연구회
회장 최 성철
※ 월간 “문학 공간” 한글날 특집 기고문. [문학 공간 227호 참조]
우리 학계에서는 단순하게 우리말은 있어도 글자가 없어서 우리말을 적기위해서 세종 큰 임금께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드셨다고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인식은 잘못된 것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에는 우리 민족혼(民族魂)이 담겨 있으며 세종 큰 임금께서 지니신 애국ㆍ애민정신과 자주독립 정신이 흠뻑 배어 있는 글자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은 대외적으로는 명(明)나라에 대한 문화선전포고문(文化宣戰布告文)인 동시에 대내적으로는 양반세력으로 이루어진 극도로 폐쇄된 신분봉건사회(身分封建社會)에 대하여 사회혁명을 위한 도전장이었다.
대외적으로 우리 민족은 신라 김춘추가 당(唐)나라에 굴복하여 복속을 자처한 이래로부터 누대에 걸쳐 중국대륙 세력에 지배되어 왔다.
역사는, 김춘추가 백제를 멸망시켜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고 평가하고 있으나 그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김춘추는 순전히 백제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가지고 근대사에서 나타난 오적(五賊)에 버금가는 민족 배반자로 평가되어야 한다.
신라가 진정 삼국통일을 이룬 국가로 평가 받으려면 옛 백제 땅을 비롯해서 옛 고구려 땅을 한 치라도 당(唐)나라에게 빼앗기지 않고 통일을 달성했어야 했다.
그러나 옛 백제 땅에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가 설치되었으며, 광활한 옛 고구려 땅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설치되어 당(唐)나라 지배 아래로 들어갔으며 수년에 걸친 전쟁 끝에 겨우 옛 백제 땅과 옛 고구려 땅의 지극히 일부분인 대동강 이남을 되찾았을 뿐이므로 이것은 형제와 영토를 당(唐)나라에 팔아 자기네 생존을 영위했던 것이나 다름없다.
이로부터 우리 민족은 누대에 걸쳐 중국대륙 세력에 굴종하며 조선왕조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고려가 멸망한 것은 사회적인 혼란도 원인에 하나이지만 무리한 북벌정책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왕조에 이르러 세자였던 양녕대군도 명(明)나라의 심한 내정간섭에 대하여 투철한 반명사상(反明思想)으로 북벌을 도모하기 위해 군사력을 키우는 정책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 초기 왕실은 반명사상(反明思想)이 강했으며 이러한 사상은 세종 큰 임금도 이어 받았던 것이다.
그러한 사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은 세종 큰 임금은 신기전(神機箭)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만들었고, 명(明)나라 천문(天文)이 아닌 우리 천문(天文)을 가져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력으로는 도저히 명(明)나라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므로, 우리말은 따로 있으되 글자가 없으므로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독자적인 글자를 만들어 문화적으로나마 명(明)나라 굴레를 벗어나야겠다는 것이 훈민정음(訓民正音)에 담긴 정신이라 할 수 있다.
명(明)나라 문물을 배척하고 우리 글자를 만든다는 것은 명(明)나라 측에서 볼 때 분명히 반란행위임에 틀림없다.
이런 면에서 보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글자는 단순히 우리말을 적기 위한 글자가 아니라 명(明)나라에 대한 문화선전포고문(文化宣戰布告文)이다.
대내적으로는 양반계급이 지배하고 있는 폐쇄적인 신분봉건사회(身分封建社會) 병폐인 반상계급(班常階級)을 타파하고 원시(元始) 민주주의 사회에로 개혁을 시도하기위한, 양반계급을 향한 도전장이다.
그 당시는 한학(漢學)을 공부한 소수 양반계급에 의해서 지배되던 사회로 대다수 일반 백성들 가운데 아무리 재능이 출중한 사람이라도 출세할 길이 막힌 신분봉건사회(身分封建社會)였다.
세종 큰 임금은 이러한 모순된 신분계급사회를 타파하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라면 상민이든 노비이든 신분을 가리지 않고 등용하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사회혁명을 시도하려고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훈민정음(訓民正音)을 만들게 된 것이다.
즉 상민이든 노비이든 가리지 않고 이 나라 백성이라면 모두 글을 깨우치도록 하여 널리 숨은 인재를 발굴하여 균등하게 출세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려고 했던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당시 노비 출신 과학 기술자인 장영실(蔣英實)을 등용한 것이다.
이와 같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은 그저 단순하게 우리말이나 적기 위해서 만든 글자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명(明)나라에 대해서는 문화전쟁을 의미하는 문화 선전포고문(文化宣戰布告文)인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수구 양반계급 세력에 대한 사회혁명을 위한 도전장인 것이다.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글자는 이처럼 오늘날 핵폭탄(核爆彈)과도 같은 것이었기에 고도의 위장전술로 명(明)나라와 양반세력의 눈을 가리려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연막전술은『어제 훈민정음(御製訓民正音)』서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國之語音국지어음, 異乎中國이호중국, 與文字不相流通여문자불상유통.”, 즉 「나랏말씀이 중심이 되는 나라와 달라서 글자[한자(漢字)]로는 서로 흘러 통하지 않도다.」
명(明)나라와 우리나라는 말이 서로 다른 문화권에 있으므로 한자(漢字)로서 자유롭게 소통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리민족은 결코 명(明)나라 언어에 동화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나타는 것이기도 하여 자주독립정신(自主獨立精神)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대제학(大提學) 정인지(鄭麟趾)가 쓴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 서문(序文)에서 “象形而字倣古篆상형이자방고전”, 즉 「글자 모양은 옛 진(秦)나라 이 사(李 斯)라는 사람이 만들었다는 글씨체를 본떴다.」라고 하는 문구(文句)도 명(明)나라와 국내 반대세력들 눈을 속이기 위한 전술이지 실제로 옛 전자(篆字)를 본떠 만든 것이 아니다.
이 문구(文句)로 인해서 오늘날 학계에서는 훈민정음(訓民正音) 스물여덟글자 모양에 대하여 여러 가지 모방설이 난무하고 있는데 모두가 이 고차원적(高次元的)인 연막전술(煙幕戰術)에 현혹되어 올바른 시각(視覺)으로 꿰뚫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한글날을 맞이하여 지금까지 그릇되게 인식되어온 훈민정음(訓民正音)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깊이 반추(反芻)해 보고 올바른 연구를 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한글 연구회
회장 최 성철
※ 월간 “문학 공간” 한글날 특집 기고문. [문학 공간 227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