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와 이목대/정장영
2010.08.22 08:18
오목대와 이목대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정장영
오목대라고 하면 전주 사는 분들은 모르는 분이 없지만 이목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옛날 남원방면에서 기차를 타고 신리역을 지나 전주로 올라오면 전주천변의 한벽당(寒碧堂)이 첫눈에 들어왔다. 아주 짧은 터널을 지난 순간 오목대(梧木臺)가 눈에 띄었지만 이목대(梨木臺)의 모습은 볼 수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 철길마저 옮겨졌으나 다행히 관광객이 경기전을 관람하고 한옥마을을 둘러본 다음 오목대를 안내하고 있다. 이곳에서 옛 구름다리 자리에 개축된 오목교를 건너면 이목대, 승암산(동고산성, 견훤궁터. 치명자산 천주교성지)으로 관광코스가 되어있다. 그러니 한 번 다녀간 분들은 잘 알게 되어있어 다행이다. 이 구름다리는 왜놈들이 승암산의 정기를 철길로 끊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철길이 옮겨지고 오목교란 다리를 그 자리에 남겼다.
오목대에 오르면 울창한 삼림(森林)으로 적막이 감돌며 가끔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에 한층 도심 속의 심산유곡 같은 기분이 든다. 이곳은 고려 말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울 때 왜구들이 진포(군산)에 군선 5백여 척을 매어놓고 백성들을 괴롭혔다한다. 고려 우왕은 수군을 총지휘하는 최영 장군으로 하여금 최무선이 만든 화약으로 왜적들을 무찌르게 하였다. 패퇴하던 왜구들이 몰려 산세가 험한 지리산(운봉, 함양)에서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이성계가 운봉으로 출동하여 황산에 진을 치고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죽이는 전과(1380:우왕5년)를 올리게 되었다. 이성계는 승전가를 부르며 귀경 도중 전주에 있는 종친들을 모시고 승전축하연을 베풀게 되었다. 이성계는 이 자리에서 한고조(漢高祖)가 불렀다는 대풍가를 불렀다. 이 노래는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고향에서 종친을 모시고 잔치를 벌이는 자리에서 읊은 시로 한나라를 세우는 시발점이 된 것이다. 그 자리에는 조정에서 축하 메시지를 전하려 내려온 종사관 정몽주도 있었다. 정몽주는 대풍가를 듣고 너무 놀라서 시름을 삭이려 남고산성의 만경대까지 걸어 갔다한다. 만경대 아래서 고려의 사직을 염려하는 포은(圃隱)의 우국(憂國)시를 남기기도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이목대는 이성계의 고조(4대조)인 이안사(李安社:목조)가 살던 곳이다. 이성계의 시조는 이 한(李 翰)으로 신라시대 사공을 지냈다. 이안사가 이곳에 살다가 전주지주(全州知州:산성별감)과 싸우고 강원도 삼척으로 이사 가기 직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고종(1900:광무 4년)황제의 친필로 새겨진 비석이 있으며 조선건국을 칭송한 용비어천가의 무대이기도 하다.
오목대나 이목대는 남들이 그렇게 부르니 그저 그렇게 알았고 향토 문화재에 관심을 갖지 못해 유서 깊고 역사적인 곳이란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목대를 처음 찾은 기억은 6‧25(한국전쟁)전인 것 같다. 고향선배가 명륜대학(전북대학교 전신)에 재학할 때 이 근처에서 하숙을 하고 있어 가끔 들른 적이 있었으나 역사적인 곳인 줄은 미처 몰랐었다. 지금은 수목이 울창하나 당시는 그렇지 못해 이곳에 오르면 전주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아마 칠팔백여 년 전부터 주거지였고 더욱 유서 깊은 곳이라니 감개무량하다. 또한 예전과 달리 잘 관리되고 있으니 찾는 이들의 기분도 상쾌하다.
천년고도(千年古都) 왕도인 전주는 예나 지금이나 왕기가 서린 도시다. 옛날엔 견훤이 궁터를 잡았고 또 조선왕조의 발상지다. 현대에 와서는 초대 대통령도 전주이씨 이승만이었다. 명예롭지는 못하지만 제5공화국의 주역인 전두환의 옛 고향이었고, 유일하게 악명 높은 독재체제의 주인공 김일성의 조상과 인연이 깊다니 앞으로도 또 누가 알겠는가? 천년왕도(千年王都)란 말 그대로 명성이 이어지길 바랄뿐이다.
(2010. 7. 10.)
※ 대풍가(大風歌) 해설
큰 바람이 일어나니 구름은 흩날리고/ 위세를 내해(內海)에 펼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이제 어디서 용맹한 무사를 얻어 천하를 지킬거나
전주안골노인복지관 수필창작반 정장영
오목대라고 하면 전주 사는 분들은 모르는 분이 없지만 이목대는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옛날 남원방면에서 기차를 타고 신리역을 지나 전주로 올라오면 전주천변의 한벽당(寒碧堂)이 첫눈에 들어왔다. 아주 짧은 터널을 지난 순간 오목대(梧木臺)가 눈에 띄었지만 이목대(梨木臺)의 모습은 볼 수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제 철길마저 옮겨졌으나 다행히 관광객이 경기전을 관람하고 한옥마을을 둘러본 다음 오목대를 안내하고 있다. 이곳에서 옛 구름다리 자리에 개축된 오목교를 건너면 이목대, 승암산(동고산성, 견훤궁터. 치명자산 천주교성지)으로 관광코스가 되어있다. 그러니 한 번 다녀간 분들은 잘 알게 되어있어 다행이다. 이 구름다리는 왜놈들이 승암산의 정기를 철길로 끊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철길이 옮겨지고 오목교란 다리를 그 자리에 남겼다.
오목대에 오르면 울창한 삼림(森林)으로 적막이 감돌며 가끔 들려오는 뻐꾸기 소리에 한층 도심 속의 심산유곡 같은 기분이 든다. 이곳은 고려 말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울 때 왜구들이 진포(군산)에 군선 5백여 척을 매어놓고 백성들을 괴롭혔다한다. 고려 우왕은 수군을 총지휘하는 최영 장군으로 하여금 최무선이 만든 화약으로 왜적들을 무찌르게 하였다. 패퇴하던 왜구들이 몰려 산세가 험한 지리산(운봉, 함양)에서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이성계가 운봉으로 출동하여 황산에 진을 치고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를 죽이는 전과(1380:우왕5년)를 올리게 되었다. 이성계는 승전가를 부르며 귀경 도중 전주에 있는 종친들을 모시고 승전축하연을 베풀게 되었다. 이성계는 이 자리에서 한고조(漢高祖)가 불렀다는 대풍가를 불렀다. 이 노래는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고향에서 종친을 모시고 잔치를 벌이는 자리에서 읊은 시로 한나라를 세우는 시발점이 된 것이다. 그 자리에는 조정에서 축하 메시지를 전하려 내려온 종사관 정몽주도 있었다. 정몽주는 대풍가를 듣고 너무 놀라서 시름을 삭이려 남고산성의 만경대까지 걸어 갔다한다. 만경대 아래서 고려의 사직을 염려하는 포은(圃隱)의 우국(憂國)시를 남기기도 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이목대는 이성계의 고조(4대조)인 이안사(李安社:목조)가 살던 곳이다. 이성계의 시조는 이 한(李 翰)으로 신라시대 사공을 지냈다. 이안사가 이곳에 살다가 전주지주(全州知州:산성별감)과 싸우고 강원도 삼척으로 이사 가기 직전까지 살았던 곳이다. 고종(1900:광무 4년)황제의 친필로 새겨진 비석이 있으며 조선건국을 칭송한 용비어천가의 무대이기도 하다.
오목대나 이목대는 남들이 그렇게 부르니 그저 그렇게 알았고 향토 문화재에 관심을 갖지 못해 유서 깊고 역사적인 곳이란 것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목대를 처음 찾은 기억은 6‧25(한국전쟁)전인 것 같다. 고향선배가 명륜대학(전북대학교 전신)에 재학할 때 이 근처에서 하숙을 하고 있어 가끔 들른 적이 있었으나 역사적인 곳인 줄은 미처 몰랐었다. 지금은 수목이 울창하나 당시는 그렇지 못해 이곳에 오르면 전주 시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곳이었다. 아마 칠팔백여 년 전부터 주거지였고 더욱 유서 깊은 곳이라니 감개무량하다. 또한 예전과 달리 잘 관리되고 있으니 찾는 이들의 기분도 상쾌하다.
천년고도(千年古都) 왕도인 전주는 예나 지금이나 왕기가 서린 도시다. 옛날엔 견훤이 궁터를 잡았고 또 조선왕조의 발상지다. 현대에 와서는 초대 대통령도 전주이씨 이승만이었다. 명예롭지는 못하지만 제5공화국의 주역인 전두환의 옛 고향이었고, 유일하게 악명 높은 독재체제의 주인공 김일성의 조상과 인연이 깊다니 앞으로도 또 누가 알겠는가? 천년왕도(千年王都)란 말 그대로 명성이 이어지길 바랄뿐이다.
(2010. 7. 10.)
※ 대풍가(大風歌) 해설
큰 바람이 일어나니 구름은 흩날리고/ 위세를 내해(內海)에 펼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다/
이제 어디서 용맹한 무사를 얻어 천하를 지킬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