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에서 심신을 씻다/김정길

2011.05.05 10:37

김학 조회 수:462 추천:2

[금요수필]소쇄원에서 심신을 씻다
김정길
전북일보(desk@jjan.kr)



풋풋한 봄빛으로 물들던 4월 초, 조선시대 선비들의 숨결이 오롯이 살아있는 소쇄원을 찾아 나섰다. 영산강을 잉태한 추월산과 담양호를 품은 담양에 들어서자 누정(樓亭)문화의 향기가 은은히 풍겨왔다. 예부터 벼슬에서 물러난 선비들이 낙향해서 산자수려한 곳마다 누정을 짓고 학문에 정진하며 후진을 양성했던 가사문학의 산실이기 때문일 게다.
울창한 대숲에서 불어오는 선들바람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혀주는가 싶더니, 소쇄원이 버선발로 쫒아 나와 세속에 찌든 내 심신을 맑게 어루만져 주었다. 예부터 소쇄원은 환벽당, 식영정과 더불어 한 마을의 세 명승지라 하여, 일동삼승(一洞三勝)으로 불려왔다. 일동삼승에 매료되어 누정문화의 텃밭을 일구었던 송순, 임억령, 김인후, 김성원, 정철 등이 남긴 주옥같은 문학작품들이 오늘날 후학들에게 큰 교훈이 되고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무릇 은자(隱者)는 지조와 절개가 세속에 빼어나는 풍모가 있어야 하고, 마음이 씻은 듯이 맑고 깨끗하여 홍진(紅塵)을 뛰어넘는 기상이 있어야 한다."
모름지기 숨어 사는 선비는 큰 학식과 덕망을 갖추고 있어도 씻은 듯이 맑고 깨끗해야 한다는 의미다. 속세와는 거리를 두고 숨어 지내는 사람의 마음을 절묘하게 비유한 소쇄공 양산보의 지혜가 번득인다.
오솔길로 접어들자 긴 돌담이 병풍처럼 둘러 처진 초가지붕의 작은 정자가 악수를 청했다. 바로 48영 중 제1영으로 일컫는 소쇄정이다. 주인장은 어디가고 봉황이 깃든다는 벽오동 한 그루가 손님을 맞았다. 소쇄정에는 귀빈을 봉황에 견주어 시인묵객을 기다린다는 의미로 대봉대(待鳳臺)란 현판을 걸어 놓았다.
오곡문(五曲門)은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가 무이구곡 중 오곡에서 무이정사를 경영하며, 후진을 양성한데서 연유했다. 오곡담 아래로 흘러나온 물이 암반에서 다섯 굽이를 돈다 해서 오곡문이라 한다는 설도 있다. 제월당(霽月堂)은 주인이 거처하던 공간으로 '비 갠 하늘에 밝게 떠오르는 달'에 비유해 양산보와 더불어 호남의 대표적 문인으로 일컫는 김인후가 소쇄원의 48경치를 예찬한 글귀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광풍각(光風閣)은 소쇄원의 중심이다. 왼쪽은 폭포, 마루 앞에는 계곡, 건너편에서는 물레방아가 청아한 물소리를 내며 손짓했다. 우암 송시열이 쓴 제월당과 광풍각 현판에서는 옛 선조들의 정취와 심상이 오롯이 묻어났다. 광풍각 뒷동산을 도연명의 무릉도원으로 재현하려는 듯 복사동산이라 이름을 지은 소쇄공의 해학과 풍류를 엿볼 수 있었다.
소쇄원은 맑은 계류와 자연폭포, 물레방아가 연출하는 인공폭포 등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진 조선시대의 민간 최초의 별장이다.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던 것을 복원하고 15대에 이르기까지 후손들이 잘 관리해 온 것도 자랑거리요, 본받을 점이다.
올곧은 조선 선비로 속세를 떠나 초야에 묻혀 살며 소쇄원을 지은 양산보, 소쇄원의 48영을 주옥같은 시로 예찬했던 김인후, 양산보의 외종형으로 면앙정시단을 이루어 기라성 같은 시인묵객들과 더불어 가사문학을 꽃피웠던 송순 등 당대의 내로라하는 죽림처사(竹林處士)들을 떠올리며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몄다. 비록 은자(隱者)는 아닐지라도 열한 번의 소쇄원 방문을 통해서야 비로소 가사문학의 꽃을 피운 선조들의 고귀한 정신을 깨달으며 심신까지 씻을 기회를 갖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수필가 김정길 씨는 2003년 <수필과 비평> 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저서 <전북 백대명산을 가다>  수필집 <어머니의 가슴앓이> <지구를 누비는 남자>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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