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속의 균형/문경근
2013.11.28 06:20
일상 속의 균형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문경근
산행 길에 걸음걸이가 불편함을 느껴 살펴보니, 한쪽 발 운동화 끈이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 일행에게 뒤쳐질까 봐 그냥 참고 걸으려니 갈수록 발의 균형이 어긋나는 것 같았다. 걸음걸이도 점차 부자연스러워졌다. 이내 몸 전체의 균형까지 조금씩 흐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쪽 발에 신경을 쓰다 보니 일행과의 대화에서 집중력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찮은 운동화 끈 하나의 균형이 깨지니 온몸이 반응한 것이다. 작은 불균형이 만든 주름이 마음속까지 번진 것일까.
소소한 불균형도 이러할진대, 신체 중요 기관의 균형이 깨진다면 그 여파가 어떠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병이라는 고통으로 이어질 게 아닌가. 건강은 몸의 각 기관이 균형을 유지하며 작동할 때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운동화 한 짝으로 인해 시작되었던 불균형이 한계를 느낄 즈음, 잠시 멈춰 끈을 당겨 조였더니 발걸음이 금방 가뿐해졌다. 균형을 회복하자 뒤덮였던 구름이 깔끔하게 걷힌 기분이었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 불균형의 불편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이렇듯 요즘은 작은 것들이 나를 깨우치곤 한다.
지난여름 방학 때 경기도 성남에 사는 외손자를 데려와 함께 지냈다. 백일 무렵부터 2년여 동안 기른 일이 있어 꽤 정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부모 곁을 떠나면서도 좋아서 방방 뛰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제법 철이 들고 대화도 통했다. 그 무렵 나는 지인에게 분경(盆景)을 배우고 있었다. 자연의 풍경을 작은 화분에 들여놓는 일이라 나로서는 꽤 호기심이 있던 일이었다. 이틀 만에 분경 두 개를 만들어 가져왔더니 거실의 분위기가 그럴듯해졌다. 나 혼자 으스대기는 했지만, 짧은 기간에 만든 작품이 오죽했으랴. 아직은 솜씨가 어설펐던지 아내는 별로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며칠 후 화분에 물을 주면서 넌지시 아내의 생각을 떠봤다.
“이건 유 서방에게 주고, 저건 김 서방 줄까?”
사위 둘은 멀지 않은 곳에 살며 자주 들르는 편이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던져본 말이었다. 아내는 작품을 한 번 훑어보더니 영 시원찮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줄 알았던 손자가 내 말을 들었던가 보다.
“그럼 고 서방은?”
자기 아버지를 챙기는 외손자의 반격에 나는 뜨끔했다. 사위가 셋이니 말 한마디라도 균형을 유지했어야 했다. 외손자의 짧은 한마디가 그걸 알려준 것이다. 다음에는 더 멋지게 만들어서 아빠한테 주겠노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외손자에게 잘못을 저지른 듯 찜찜한 기분이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외손자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게임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래도 자꾸 눈치가 보여 힐끗 쳐다보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자식과 손자가 여럿이다 보니 평소에도 균형을 유지하는데 신경을 써야 한다며 아내에게 신신당부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걸 망각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가장의 체통에도 상처를 입었다. 생각의 균형을 잃어 저지른 실수를 자책하고 반성했다. 균형 감각은 인간관계에서 꼭 필요한 덕목이라는 것도 마음 깊이 새겨두었다.
몸과 마음의 불균형도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닌 성싶다. 퇴임 직후 2년여 동안은 건강관리에 집중하며 운동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매달렸다. 걷기는 기본이고 틈틈이 자전거도 탔다. 그러나 점차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운동으로 마음의 공허까지 채울 수는 없었다.
다행히 최근 들어서야 심신의 균형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다. 수필공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그것이다. 요즘은 수필이 마음의 빈 곳을 조금씩 채워주고 있음을 실감한다. 수필은 마음공부가 됨은 물론이고, 덤으로 문우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마음에 힘이 붙는 것 같다. 몸과 마음이 조금씩 균형을 잡아가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진정한 건강은 심신의 균형과 조화로 주어지는 것인가 보다.
균형미(均衡美)라는 말이 있다.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고 고른 상태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균형 잡힌 삶은 아름다움과 닿아있다는 이야기다. 부부 사이의 균형미가 금실이라면, 친구 간의 균형미는 우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관계에서 균형미의 공통적인 조건은 사랑이 아닐까?
탈무드의 잠언집에는 삶의 균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갖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인간은 희로애락 중에 어느 한 가지 감정에만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인생은 균형이다. 그러니 온종일 울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어느 한 가지 감정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균형의 실종은 삶을 근본적으로 흐트러지게 할 뿐이다. 이제부터라도 불균형 때문에 쌓인 찜찜한 일이 있다면 하루빨리 벗어나야겠다. 무디어진 균형 감각도 깨워야겠다. 우선 일상 속의 작은 일부터 그래야 할 것 같다. 그래야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을 게 아닌가.
(2013.11.28.)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수요반 문경근
산행 길에 걸음걸이가 불편함을 느껴 살펴보니, 한쪽 발 운동화 끈이 조금 느슨해져 있었다. 일행에게 뒤쳐질까 봐 그냥 참고 걸으려니 갈수록 발의 균형이 어긋나는 것 같았다. 걸음걸이도 점차 부자연스러워졌다. 이내 몸 전체의 균형까지 조금씩 흐트러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쪽 발에 신경을 쓰다 보니 일행과의 대화에서 집중력도 떨어지기 시작했다. 하찮은 운동화 끈 하나의 균형이 깨지니 온몸이 반응한 것이다. 작은 불균형이 만든 주름이 마음속까지 번진 것일까.
소소한 불균형도 이러할진대, 신체 중요 기관의 균형이 깨진다면 그 여파가 어떠하겠는가. 그것은 바로 병이라는 고통으로 이어질 게 아닌가. 건강은 몸의 각 기관이 균형을 유지하며 작동할 때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운동화 한 짝으로 인해 시작되었던 불균형이 한계를 느낄 즈음, 잠시 멈춰 끈을 당겨 조였더니 발걸음이 금방 가뿐해졌다. 균형을 회복하자 뒤덮였던 구름이 깔끔하게 걷힌 기분이었다. 어쨌든 그 일로 인해 불균형의 불편을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이렇듯 요즘은 작은 것들이 나를 깨우치곤 한다.
지난여름 방학 때 경기도 성남에 사는 외손자를 데려와 함께 지냈다. 백일 무렵부터 2년여 동안 기른 일이 있어 꽤 정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부모 곁을 떠나면서도 좋아서 방방 뛰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부터는 제법 철이 들고 대화도 통했다. 그 무렵 나는 지인에게 분경(盆景)을 배우고 있었다. 자연의 풍경을 작은 화분에 들여놓는 일이라 나로서는 꽤 호기심이 있던 일이었다. 이틀 만에 분경 두 개를 만들어 가져왔더니 거실의 분위기가 그럴듯해졌다. 나 혼자 으스대기는 했지만, 짧은 기간에 만든 작품이 오죽했으랴. 아직은 솜씨가 어설펐던지 아내는 별로 탐탁지 않은 눈치였다.
며칠 후 화분에 물을 주면서 넌지시 아내의 생각을 떠봤다.
“이건 유 서방에게 주고, 저건 김 서방 줄까?”
사위 둘은 멀지 않은 곳에 살며 자주 들르는 편이었다. 그래서 별 생각 없이 던져본 말이었다. 아내는 작품을 한 번 훑어보더니 영 시원찮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줄 알았던 손자가 내 말을 들었던가 보다.
“그럼 고 서방은?”
자기 아버지를 챙기는 외손자의 반격에 나는 뜨끔했다. 사위가 셋이니 말 한마디라도 균형을 유지했어야 했다. 외손자의 짧은 한마디가 그걸 알려준 것이다. 다음에는 더 멋지게 만들어서 아빠한테 주겠노라고 둘러댔다. 하지만 외손자에게 잘못을 저지른 듯 찜찜한 기분이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외손자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다시 게임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래도 자꾸 눈치가 보여 힐끗 쳐다보았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자식과 손자가 여럿이다 보니 평소에도 균형을 유지하는데 신경을 써야 한다며 아내에게 신신당부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내가 그걸 망각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가장의 체통에도 상처를 입었다. 생각의 균형을 잃어 저지른 실수를 자책하고 반성했다. 균형 감각은 인간관계에서 꼭 필요한 덕목이라는 것도 마음 깊이 새겨두었다.
몸과 마음의 불균형도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닌 성싶다. 퇴임 직후 2년여 동안은 건강관리에 집중하며 운동을 최고의 가치로 삼고 매달렸다. 걷기는 기본이고 틈틈이 자전거도 탔다. 그러나 점차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면서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운동으로 마음의 공허까지 채울 수는 없었다.
다행히 최근 들어서야 심신의 균형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다. 수필공부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 그것이다. 요즘은 수필이 마음의 빈 곳을 조금씩 채워주고 있음을 실감한다. 수필은 마음공부가 됨은 물론이고, 덤으로 문우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마음에 힘이 붙는 것 같다. 몸과 마음이 조금씩 균형을 잡아가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진정한 건강은 심신의 균형과 조화로 주어지는 것인가 보다.
균형미(均衡美)라는 말이 있다. 기울거나 치우치지 않고 고른 상태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움을 말한다. 균형 잡힌 삶은 아름다움과 닿아있다는 이야기다. 부부 사이의 균형미가 금실이라면, 친구 간의 균형미는 우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관계에서 균형미의 공통적인 조건은 사랑이 아닐까?
탈무드의 잠언집에는 삶의 균형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갖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인간은 희로애락 중에 어느 한 가지 감정에만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인생은 균형이다. 그러니 온종일 울거나 화를 내서는 안 된다.’ 어느 한 가지 감정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균형의 실종은 삶을 근본적으로 흐트러지게 할 뿐이다. 이제부터라도 불균형 때문에 쌓인 찜찜한 일이 있다면 하루빨리 벗어나야겠다. 무디어진 균형 감각도 깨워야겠다. 우선 일상 속의 작은 일부터 그래야 할 것 같다. 그래야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야 할 일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을 게 아닌가.
(2013.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