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남자와의 여행/안향자
2014.05.15 19:09
낯선 남자와의 여행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 목요반 안향자
“파리에서 런던까지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을 아시나요?”
“글쎄요. 비행기? 아니면 기차를 타고 영불해협의 해저터널 즉 바다 밑으로 쏜살같이 달려가야 하나요?”
그러고 보니 넌센스 퀴즈문제 같기도 합니다.
자식들이 수도권에 살다보니 종종 서울 나들이를 할 때가 많습니다. 자식들 만나러 다니다보니 토요일에 갔다가 이튿날 일요일 오후 고속버스로 돌아오게 됩니다. 일요일 오후 고속버스는 대부분 만원이어서 원하는 시간의 차표를 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허나 자주 다니다보니 이골이 나서 요령이 생겼습니다. 혼자일 때는 버스 앞에 줄지어 서 있다 보면 혹 예매하신 분 중 승차를 포기한 좌석이 종종 생깁니다. 그러면 한 자리쯤은 탈 수가 있습니다. 그날도 다행히 빈자리 하나 차지하고 앉았습니다. 헌데 바로 옆자리에 저와 거의 동년배쯤의 신사가 앉아 있었습니다.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 군산까지 줄잡아 3시간 정도 걸립니다. 그 3시간 중 중간에 휴게소에서 조금 쉬었다가 다시 출발합니다. 사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바로 옆 좌석에 異姓(이성)이 앉아있으면 신경이 쓰이기 마련입니다. 동성끼리라면 좁은 좌석에서 허벅지가 좀 닿은들 대수이겠습니까? 허나 상대가 남성인지라 다리도 좀 오그리고 일단 서로 몸이 닿지 않으려 긴장하게 됩니다. 물론 상대방도 조심하겠지요.
여행을 다니다 보니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그래, 옷깃 한 번 스치는 것도 정말 엄청난 인연이라는 불교의 말씀도 있듯이 이게 얼마나 커다란 인연이겠나 싶었습니다. 내가 먼저 말을 붙여보자. 잘하면 이 3시간이 지루하거나 불편하지 않고 가장 빨리 집에 갈 수 있는 방법도 되겠다 싶어서 먼저 말을 붙였습니다.
“저 군산이 집이세요?” 그러자 즉시 기다렸다는 듯 그 남성도 대답했습니다.
“아뇨. 집은 서울인데 직장이 군산이라서 이렇게 주말 부부로 삽니다.”
“그러세요? 군산 오신 지는 얼마나 되었나요?”
“사실 몇 달 안 되었어요. 본사는 서울인데 지방 지사로 발령이 나서요.”
이렇듯 간단한 대화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얘기는 차츰 더 친밀해져 갔습니다. 서로 가족 관계며 자식들 자랑까지 우리의 대화는 도착하는 시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서로 사돈 얘기까지 정말 스스럼없이 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길을 가다 보면 그 중 한 명쯤은 스승이라고, 누구에게서나 배울 점이 있다더니 나는 그날 그 분에게서 아주 좋은 정보를 얻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10여 년 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술과 담배 등 절제 없는 생활이 원인이었답니다. 그 후유증으로 한쪽에 마비가 왔는데 그걸 회복하는 방법으로 달리기를 시작하여 지금은 1년에 서너 번씩은 마라톤대회에 참가하여 풀코스를 완주한다고 했습니다.
"정말 그 정도로 달리기가 효과가 있다니 놀랍네요." 그러자 그 분은 달리기가 얼마나 좋은 운동인지, 골프도 해 봤고 테니스 등 다 해 봤지만 달리기만한 운동이 없다고 달리기 예찬론을 펼쳤습니다. 그 분의 사업과 인생역전 얘기며 자식 자랑, 부인과의 결혼 에피소드 등, 우린 마치 10년 지기처럼 스스럼없이 버스 속에서 즐겁게 담소하며 여행을 즐겼습니다.
나 역시 아직은 군산이 생소한 그 분에게 내가 아는 한도에서 군산이 과거 일정 때에는 호남에서 가장 잘 나가던 도시였었고, 일제 수난기에는 기름진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해 가려고 가장 먼저 개발한 항구도시였으며, 지금은 비록 다른 도시에 비해 인구도 줄고 많이 쇠퇴했지요. 하지만 이제 새만금의 완공과 더불어 군산이야말로 지정학적(地政學的)으로 중국과 인접해 있어서 가장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특히 우리 고장의 가장 큰 자랑인 월명공원은 전국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멋진 공원임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새만금이 점차 완공되어감에 따라 군산의 무궁무진한 발전 가능성에 대한 설명과 함께 군산의 명물을 소개해줬습니다.
밥맛 좋기로 소문난 군산지역의 기름진 쌀과 전국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꽃게장, 너무도 맛좋은 이성당 단팥빵, 복성루의 얼큰 매콤한 짬뽕,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맛볼 수 없는 아구찜, 전국 제일의 철새도래지인 나포 들녘의 찰보리쌀, 군산의 별미집 소개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유명 인사로는 해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는 <고은 시인>의 고향이며, 아직도 친일 논쟁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만식 문학관과, 그러나 민족애와 향토사랑이 탁월하게 묘사된 명작소설 <탁류>에 대한 설명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참, 여름철에는 가족들과 같이 선유도 해수욕장 한 번 가보셔요. 그 명칭도 선녀들이 노닐던 섬이라서 선유도라고 합니다. 정말 경치가 절경이죠. 인근 작은 섬들도 너무 좋아요." 관광지 홍보도 빼놓지 않았답니다.
"호남평야의 전답을 악랄한 수법으로 편취한 일본 대지주들이 많아 당시엔 호화주택인 일본식 목조주택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그 보존 가치를 인정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지금은 그 시절 그 장면이 필요하다보니 영화 촬영장소로도 많이 이용되기도 한다는 점도 잊지 않고 설명해 주다보니 어느 새 군산에 도착했습니다. 서로 통성명은 하지 않았지만 몇 시간의 짧은 여행동무로서 너무도 즐거웠습니다.
이성(異姓)이 아닌 누구라도 서로 얘기를 나누다 보면 모두가 다 이웃사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대화 상대로 재미있는 분은 할머니들입니다. 인생살이가 길고 그 시절 너무도 고생스러웠던 삶을 사신 분들이 많아서 대화 소재도 무궁무진합니다. 처음에 일단 말만 붙이면 온갖 세상살이 애환이 재미있게 펼쳐지고 배울 점도 정말 많거든요. 그분들의 살아오신 인생역정이 바로 우리의 현대사라고나 할까요?
영감님, 자식, 며느리, 사돈, 등 특히 시집살이 얘기로 화제가 이어지면 정말 실감나고 재미있습니다. 그분들 말씀으로는 내가 살아온 얘기를 글로 쓰자면 소설이 몇 권이나 될 거라고 하십니다.
이제 <파리에서 런던까지 제일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의 답이 나온 듯하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여행이라고 하지만, 그보다도 서로 옆자리 사람과 즐겁게 담소하며 가는 것이 가장 빨리 가는 방법이 아닐까요?